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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부터 68년까지 잇따라 가뭄, 68년 가장 극심주민들 고향 떠나고, 학생들 학교 자퇴하고… 이농 본격화보은산에서 기우제 올리고, 주민들 물싸움에 파묘까지 60년대들어 여기저기서 잘살아 보겠다고 밤잠 자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럴때면 늘 주민들을 괴롭힌게 천재지변이었다. 전쟁보다 무서운게 천재지변이였다. 그중에서도 60년대 중반부터 계속된 그 칠흑같은 가뭄은 60년대 주민들의 가장 큰 시련중의 하나였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가뭄을 살펴보면 67~68년 한해, 77~78년 한해를 꼽을 수 있다. 지금도 주민들 사이에는 ‘육팔한해’, ‘칠팔한해’ 하면 몸을 움찔거린다. 그정도로 심각한 한해였다. 당시에 집중적인 탈 농촌이 이뤄졌다. 한해때 농촌에서 삶의 터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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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9.21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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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후퇴 후‘인민군도 없고 경찰도 없는 시간’3~4일인민위활동 김성옥 서성리 마을회관 앞에서 현구선생 지목김성옥의 손가락질 한번이 현구선생 운명 바꿔 동생과 어머니가 경찰들의 손에 의해 죽은 것을 확인한 김성옥(24세 정도)은 더 이상 강진에 있으면 자신도 해를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는 야밤을 이용해 인민군들이 주둔하고 있는 영암으로 넘어갔다. 일반적인 길이였던 솔치길을 이용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고성사 좌측 산길을 통해서 넘어갔다.그리고 며칠 후, 1950년 8월 1일이 됐다. 풀치에서 인민군과 대치하던 경찰병력이 철수해 해창에 대기하고 있던 배를 타고 고금도로 철수하자 인민군이 강진에 무혈 입성했다. 1일 오전의 일이였다. 인민군들이 성전을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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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9.2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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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조망대 설치, 강진의 지명 한눈에 들어와 보은산 정상이 확 변했다. 잔목이 제거되고 서쪽으로 펼쳐진 전망이 확 트였다. 강진읍과 강진만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남쪽 조망지점에는 커다란 조망대가 세워졌다. 보은산 정상에 올라간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모습을 대하며 강진의 또다른 아름다움에 취하고 있다.보은산 정상의 가장 큰 변화는 서쪽 전망을 시원스럽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측으로 강진을 병풍처럼 보호하고 있는 월출산 자락에서부터 월각산이 이어지고, 해남의 흑석산, 서기산, 덕룡산등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매일 아침 보은산 정상에 오른다는 정성목씨와 김선제씨는 “정상을 잘 정리해 놓으니 보은산이 완전히 다른 산처럼 변했을 정도로 전망이 좋아졌다”며 “보은산을 오르며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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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9.21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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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현장서 주민불편 호소 들은 척도 않더라”극장통 볼링장앞 대형 상수도관도 부주의 파손상수도관 수리비 1,400만원 놓고 책임 공방까지강진읍 중앙로의 어지러운 전선을 땅속으로 집어넣는 작업인 강진읍 전선지중화 사업이 시공회사의 부실 공사로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고 있다. 도심에서 공사를 하면서 비산먼지 관리가 전혀되지 않고 있고, 시공중에 상수도관을 파손하는등 여러 가지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현지 중앙로에는 전선지중화를 위한 배관공사와 도시가스 배관공사, 전화케이블 지중화공사등 3가지 공사가 동시에 이뤄지고 있다. 한번 도로를 파헤칠 때 일시에 공사를 하기 위해서다. 한쪽에서 땅을 파서 가스배관공사를 하며 전진해 나가면 다른 한쪽에서 도로를 파서 전선공사를 해나가는 식이다.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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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9.21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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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 경북 경주와 함께 전국 시범지역으로 선정주민들 도서관건립추진위원회 설립‘십시일반’기금모아‘문화의 불빛을 밝혀줄 떳떳한 공공도서관’ 위용 드러내 올해 강진군립도서관 개관 50주년, 설립 반세기 국내 최고 소프라노 이경숙씨 초청 자선음악회도 60년에 강진성요셉여고의 개교와 함께 강진교육 가장 큰 변화중의 하나는 강진군립도서관이 개관한 것이였다. 1965년 1월이다. 올해가 50주년이다. 군단위에 이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서관은 경기도 파주와 강진뿐이다. 그만큼 강진은 도서관을 빨리 세웠다. 당시 강진도서관은 어떻게 지어졌을까. 1960년대 중반들어 정부는 마을문고 육성에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농촌의 근대화 없이 한국의 근대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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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9.10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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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벗고 방에 들어가야 하는 한국의 풍습 따르기 위해 준비1962년 개교 성요셉여고, 강진의 여성교육 새장 열어 1960년대는 지역사회가 전쟁의 아픔을 씻어내고 우리도 한번 해내 보자며 본격적인 웅비의 용트림을 하던 시기였다. 전쟁의 상흔과 만성적인 식량부족이 가시지 않은 정말 어려운 시기였지만 강진 주민들은 미래에 대한 꿈만은 어느 지역 못지 않았다.60년대 초반 강진의 가장 큰 변화중의 하나였다면 여자전문 고등학교가 들어선 것이였다. 성요셉여고가 그것이다. 성요셉여고의 설립은 강진 여성교육의 일대 혁명을 예고하는 것이였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1961년 10월 초. 미국 캘리포니아 항구에는 한국으로 가는 4명의 수녀가 화물선을 탔다. 캘리포니아 항구는 유난히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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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9.03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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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인 침몰 기록만 400여건, 한 건도 발견 안 돼강진 해창에서도 매년 봄 조운선 출발 조선시대 가을에 세금으로 걷워들인 곡식은 도암 해창의 창고에 저장해 두었다. 그러다가 봄이되면 본격적으로 한양으로 운송이 시작됐다. 꽃피는 봄날 벼를 가득실은 조운선이 한양을 향해 출발했다. 도암 해창 건너편 칠량 구로마을 뒷산의 이름은 국사봉이다. 국가의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조운선이 떠날 때 안전을 비는 제사를 국사봉에서 올렸다고 한다.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다산 정약용선생은 18세기 후반 강진농민들의 처지를 탐진촌요란 한시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새로 짜낸 무명이 눈결같이 고왔는데/방 줄 돈이라고 황두가 뺏어가네/누전 세금 독촉이 성화같이 급하구나/삼월 중순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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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9.03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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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밭 접근성 크게 높아질 듯… 방조제 활용 주민도 늘어강진읍 목리인근 갈대밭 데크길은 지속적으로 확충해가는 상황이다. 지난해 1차 사업이 마무리 돼 금사천을 연결하고 갈대밭 사이로 데크길을 설치했다. 지금은 2차 사업을 위해 용역이 진행중인데 올 하반기에 공사가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군은 2차 공사에서는 목리마을이나 환경정화센터 쪽에서 바로 건너편 뚝방으로 넘어올 수 있는 데크가교를 설치할 계획이다. 현재는 목리쪽에서 뚝방을 넘어오기 위해서는 구 목리교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둑을 타고 쭉 내려와야 가능하다. 목리나 환경정화센터 쪽에서 바다를 건너 건너편 방조제쪽으로 넘어올 수 데크가교가 생기면 주민들의 접근성이 크게 높아져 이 일대에 설치된 데크길을 이용해 강진만 갈대밭의 아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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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9.03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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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콘크리트 포장, 잡초 제거하지 않아 완전히 점령 구 목리교~방조제 입구까지 자전거 이동 가능주민들“방조제 정비하면 칠량 구로마을까지 뚫리는데” 강진읍 목리 건너편에는 한국농어촌공사 강진완도지사가 관리하는 길다란 방조제가 있다. 행정구역은 칠량면 송로리지만 강진읍의 남포 및 목리마을 건편이여서 강진읍 사람들에게 친숙한 곳이다. 이 방조제의 길이는 3㎞에 이른다. 목리건너편 지점에서 칠량 구로마을 입구까지 어어지는 길다란 방조제다. 강진만을 중심으로 서쪽지역인 강진읍 남포마을에서 도암 해창마을까지 방조제가 있고 그곳에 자전거 도로가 개설돼 있는데 그 반대편 방조제에 해당되는 곳이라 하면 쉽게 이해될 곳이다.방조제의 폭은 2.5m 정도 된다. 농어촌공사가 지난해까지 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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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9.03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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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 두 사람이나 강진 대구 요지 답사당시 강진부자들 최고급 여관지어 총독환대 1964년 7월 시작된 대구 사당리 이용희씨집 요지발굴은 66년 11월, 68년등 네차례의 발굴을 마치고 일단 중단된다. 이후 1973년, 지금의 고려청자박물관 오른쪽에 있는 원형가마가 발굴되기까지 요지발굴은 일시적인 휴면에 들어갔다. 73년 발굴과 이에따른 재현사업의 시작등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루기로 한다.그럼 1964년 사당리 이용희씨집터가 발굴되기 전까지 강진청자는 어떤 형태로 존재했을까. 우리역사상 최고의 발굴성과로 꼽히는 공주 무녕왕릉 발굴은 1971년 6월 29일 배수로 공사를 하던 인부가 삽끝으로 작은 돌을 하나 들춰내면서 시작됐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찬란한 신라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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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8.27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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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2월 5일 84세 일기로 삶 마감‘신용제일주의’흔들리지 않은 경영이념 확립 박세정 회장은 1976년 2월 1일 대선제분 대표이사에 올라 1994년 1월 31일까지 장장 28년 동안 회사를 이끌었다. 대선제분의 소유구조와 경영형태를 다시한번 되짚어 보면 강진과 장흥에서 행상을 하면서 돈을 모은 박세정 회장은 장흥에 삼성상회라는 수산물 유통업체를 운영했고, 6.25 발발후 부산으로 건너가 김을 수출해 큰 돈을 벌었다. 이를 기반으로 계동산업을 만들고 이후 이득춘, 함성준, 이기종, 홍종문등 4명이 계동산업에 합류하면서 5인 공동 운영체계의 주식회사가 탄생했던 것이다. 병영상인 출신의 박세정 회장과 개성상인 출신의 홍종문 사장이 만나 계동산업이라는 이상적인 동업체계를 이루었다는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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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8.27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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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이 형님 그리며 바라봤던 서쪽하늘스토리텔링 안내판 만들고 잔목정리해서 서쪽 조망케 해야 강진읍의 주산이라고 할 수 있는 보은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늘 한가지 아쉬움을 갖게 된다. 정상에 오르면 남쪽으로 시원한 강진만과 강진읍 풍경, 동쪽으로 군동 벌판과 탐진강 하류가 조망되고, 북쪽으로는 멀리 무등산이 보일정도로 전망이 좋지만 서쪽 전망이 꽉 막혀 있기 때문이다. 서쪽에는 잔목과 일부 심어 놓은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이 나무들이 점점 커가면서 서쪽 조망을 갈수록 어렵게 하고 있다. 보은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서쪽 풍경은 아주 아름답다. 가까운 곳에 서기산이 있고 우측으로 성전의 월출산 자락과 월각산이 펼쳐져 있고 멀리 뒤쪽으로는 해남의 흑석산이 아스라이 펼쳐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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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8.27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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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난곳에 표지석 세워‘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이번에 최초로 개방된 초당림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피서를 즐기고 있을 때 한켠에서 잔뜩 마음조리며 피서객들을 바라본 사람들이 있었다. 초당림 회사관계자들이였다. 이들은 혹시 관광객들이 불을 잘못 다루다 화재사고가 나지 않을까하며 노심초사했다. 여름이지만 낙엽이 많이 쌓여있기 때문에 언제든 화재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1968년부터 초당림을 가꾸기 시작한 백제약품 김기운(94) 회장은 화제에 극도로 민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0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숲이 순식간에 재로 변할수 있다는게 김회장의 지론이다. 초당림에 가면 이를 상징하는 표지석이 있다. 물놀이장과 가까운 곳에 화재표지석이 있다. 김회장이 화재가 났던 곳을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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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5.08.27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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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피우지 말자’규정 잘 지켜… 공공질서도 합격점초당림 확대 개방 큰 전기 될 듯 올 여름 휴가철 최초로 공개된 전국 최대 인공조림지 초당림. 7월말부터 8월말이 공식 공개기간이지만 휴가철이 끝나면서 피서객들의 발길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곳에는 지난 한달여 사이 1만2천500여명이 찾아 여름을 즐겼다. 처음으로 공개된 계곡 피서지가 이 정도의 사람들이 몰린 것은 대단한 성공으로 평가되고 있다.비밀의 문이 열린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초당림을 일반에 공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였다. 960㏊ 면적에 조성돼 있는 초당림은 편백 132만여 그루와 테다 소나무(미국 삼엽송) 105만여 그루, 백합나무 30만여 그루, 삼나무 18만여 그루 등 17종 440만여 그루등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다.
심층취재
주희춘 기자
2015.08.27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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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리 발굴 ‘고려의 대 발견’성과건물의 벽에 청자타일을 사용한 증거고려시대 높은 문화수준 반영 1964년 7월 대구 사당리 이용희씨의 앞마당을 파들어 갈수록 암키와, 암·수 막새기와 등 각종 청자기와가 쏟아졌다. 거의 완형에 가까운 것도 있고 서·누·남면등 지붕의 위치를 가리키는 글자가 음각된 것도 있었다.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정해(丁亥), 임신(壬申), 갑신(甲申), 기사(己巳)등 간지(干支)가 새겨진 조각도 나왔다.이 정도면 이곳이 개성 만월대 부근에 있었다는 양이정을 덮은 청자기와를 만든 터였고, 청자기와가 지붕의 어느쪽에 위치할 것까지 계산해 구워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였다. 1차 조사는 1964년 9월 22일부터 10월 3일까지 진행됐다. 그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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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8.12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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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떠나기 전날까지 병상에 누워 전화보고 챙기며 현장 관리1973년의 희망찬 새해 아침이 밝아 왔다. 유신정부의 출범으로 인해 나라 안은 서릿발처럼 차갑게 꽁꽁 얼어 붙어 있었지만, 전년도 12월부터 재가동에 들어간 정미공장이 본궤도에 올랐으니 이제 걱정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제분과 정미, 양쪽 공장 모두 탈없이 잘 돌아가고, 국가에 세금 정확하게 내고, 종업원 월급 제 날짜에 지급하고, 그렇게만 하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밝힌 새해 설계였다.그리고 회사가 생긴 이래 직원들에게 변함없이 강조하는 한 가지가 더 있었으니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말 조심, 행동 조심’이었다. 특히 한 가지 일에 매달리기 시작하면 유달리 집념이 강했던 박세정 회장은 책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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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8.12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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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군과 똑같은 공문 자매결연 지역에 발송했다 취소 소동교육이름, 일정, 강연제목, 공문제목, 공문색깔까지 그대로 남해쪽“이런 곤혹스런일이…”침통강진쪽“우리 푸소 전국에 떴네”표정관리경남 남해군이 강진군의 정책을 일방적으로 베끼려다 이를 취소하는 헤프닝을 벌였다. 남해군 입장에서는 망신살이 뻗쳤지만 강진군으로서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여서 관계자들이 표정 관리에 애쓰는 모습이다. 강진군의 정책이 그만큼 부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무더운 여름에 남해군의 처지가 안쓰럽게 됐다.남해군이 베끼려 한 것은 강진군의 4대 프로젝트의 하나인 감성 푸소 체험(FU-SO)이다. 푸소체험은 강진이 국내 지자체 최초로 시행하고 있는 감성 여행 아이템. 농촌마을에서 숙박하며 농촌을 체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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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8.12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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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전국을 깜짝 놀라게 한 고려청자 발굴소식개성박물관 소장 청자기와 파편‘만든 곳’아무도 몰라‘강진이 바로 청자기와를 생산한 곳이였다’ 요즘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는 청자축제. 매년 8월이면 강진에서 이렇듯 청자를 찬미하는 축제다. 광복후 70년의 우리나라가 역사가 파란만장 했듯이 오늘날의 강진청자가 있기 까지 세월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해방후 강진의 큰 변화중의 하나는 바로 청자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 역사를 살펴보자. 고려이후 800여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는 청자에 처음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일본사람들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어느날 대구면 주재소원이었던 일본인 중도의군이 청자요지를 발견해 총독부에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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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8.06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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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기 48대, 정맥기 18대 전소 피해1962년 정부의 조준 사정을 어렵게 피해간 대선제분은 정확히 10년 후인 1972년 또 한차례의 어려움에 봉착한다. 그해 1972년은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메가톤급 핫뉴스가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 5월에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판문점을 경유하여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했고, 7월에는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어 반공방첩밖에 모르던 국민들을 최면상태로 몰고 갔다. 그리고 10월에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며 국회를 해산하고,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서슬 퍼런 ‘10월 유신’의 전주곡이 울려퍼졌다. 이후락 남측 조절위원회 위원장의 두 번째 평양 방문 소식으로 조간신문이 온통 들떠 있던 11월 3일 밤은 날씨도 흐린데다가 음력으로 그믐을 앞두고 있어 서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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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8.06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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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경관·폭포수 위세 대단석문공원과 연계 개발하면 좋은 관광자원 될 곳에어컨과 냉장고가 없던 시절, 우리 조상들은 한 여름이면 물맞이라는 연중 행사를 하며 더위를 피하곤 했다. 계곡이나 냇가에서 흐르는 폭포수를 맞으며 더위를 이겨내고 했던 것이다. 강진에서는 그 일을 물맞는다, 물맞이한다등으로 표현했다.도암 석문공원과 가까운 곳에는 아주 유명한 물맞이 폭포가 숨어 있다. 폭포라고 하기에는 그 높이가 높지 않지만 냇물이 한곳으로 모아져서 쏟아져 내리는 기세가 대단하다. 예전에는 버스를 타고가면 도로옆 냇가에 있는 물맞이 폭포를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잔목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물의 깨끗함이 예전같지 않아 이용하는 사람들이 줄어 들면서 잊혀진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그러나 물의 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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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8.06 0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