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위원회 딱 한달‘강진의 가장 긴 시간’

인민군 후퇴 후‘인민군도 없고 경찰도 없는 시간’3~4일
인민위활동 김성옥 서성리 마을회관 앞에서 현구선생 지목
김성옥의 손가락질 한번이 현구선생 운명 바꿔

강진읍 서성리 서문마을에 있는 정자는 6.25당시 마을회관이 있었던 곳으로, 인민위원회가 사람들을 이곳으로 자주 불러 모았다.
동생과 어머니가 경찰들의 손에 의해 죽은 것을 확인한 김성옥(24세 정도)은 더 이상 강진에 있으면 자신도 해를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는 야밤을 이용해 인민군들이 주둔하고 있는 영암으로 넘어갔다. 일반적인 길이였던 솔치길을 이용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고성사 좌측 산길을 통해서 넘어갔다.

그리고 며칠 후, 1950년 8월 1일이 됐다. 풀치에서 인민군과 대치하던 경찰병력이 철수해 해창에 대기하고 있던 배를 타고 고금도로 철수하자 인민군이 강진에 무혈 입성했다. 1일 오전의 일이였다. 인민군들이 성전을 지나 강진읍 솔치마을을 거쳐 강진읍으로 들어올 때 인민군 행렬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며칠전 형과 어머니의 죽음을 보고 고성사 골짜기를 통해 영암으로 넘어갔던 김성옥이였다.

그는 기고만장해 있었다. 좌익의 누명을 씌워 어머니와 동생을 죽인 경찰들이 떠나고, 좌익의 본산인 인민군이 들어온 상태였다. 그는 피해자였고 한편으로 인민군에게 영웅이 아닐 수 없었다. 김성옥은 내무서(지금의 경찰서)에 배치됐다. 정확한 직책을 알 수 없으나 자전거를 타고 자주 읍내 순찰을 다녔다.

그의 어깨에는 항상 칼빈총이 메달려 있었다. 자전거나 칼빈총이나 누구나 함부로 이용하던게 아니였다. 김성옥은 강진인민위원회에서 상당한 직책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주민들은 그의 눈치를 봤다. 많은 사람들은 김성옥이 동생과 어머니를 잃은 사람이였기 때문에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어떤 보복을 해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인민군이 강진을 점령한 후 사흘후인 8월 4일 강진읍 우시장에 있었던 인민재판은 강진읍 사람들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 넣었다. 이날 우익인사였던 차래진 국민회장과 부회장이였던 배영석 강진읍교회 목사, 황호윤 칠량청년단장등 10명이 현장에서 사형에 처해 졌다.

인민군들은 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주로 밤에 활동하면서 주민들에게 교육을 시킨다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군청이나 관공서는 거의 마비 상태였다. 읍면사무소는 부분적으로 업무가 가동됐으나 특히 세무서는 대부분의 직원들이 피란을 갔기 때문에 업무가 폐쇄상태였다. 경찰과 세무서 직원은 인민위원회가 손 볼 대상으로 봤던 1순위였다. 서민들의 피를 뽑아먹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이유였다.

인민군들은 또 의용군을 뽑은다며 젊은 사람들을 모아 중앙초등학교에서 신체검사를 했다. 강진농고생들이 집중 대상이였다. 말이 신체검사였지 90% 이상이 의용군대상으로 뽑혔다. 그런 와중에 전세가 인민군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9월 15일 연합군에 의해 인천상륙작적이 성공한데 이어 28일에는 서울이 수복됐다. 수도권을 빼앗기고 남쪽에 남게 된 인민군은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됐다. 강진에 있던 인민군들은 10월 1일 부랴부랴 퇴각했다. 강진에 인민위원회가 세워진지 정확히 한달 후의 일이였다.

인민군이 퇴각하자 공황상태에 빠진 것은 지난 한달동안 인민군에 협력했던 좌익들이였다. 그들은 안절부절이였다. 고금도를 거쳐 청산도까지 후퇴했던 경찰은 10월 5일쯤에 해창을 거쳐 강진읍으로 들어왔다. 강진에서 인민군도 없고, 경찰도 없는 시간이 4~5일 정도 유지됐던 것이다.

이때 분위기를 주도한 것은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한 사람들이였다. 이들은 도망갈 시간을 저울질하며 쉴새없이 주민들을 불러 모았다. 어떤 결정이 내려지만 모두 함께 후퇴를 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강진읍 서성리에서는 지금의 서문회관 바로 뒷편에 마을회관이 있었다.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을 그곳으로 모이게 했다. 일반 주민들은 인민군이 떠났는지, 경찰이 오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 모이지 않으면 어떤 해꼬지를 당하지 않을까 해서 무조건 공터에 나가는게 일이였다.

10월 3일 오후에도 그랬다. 마을사람들에게 회관앞으로 모이라는 지시가 떨어지자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 사람들 틈에는 현구선생도 포함돼 있었다. 현구선생의 집은 회관과 불과 50여m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모이라는 명령을 못들은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다.

50여명의 사람들이 마을회관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을 때였다.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칼빈총을 맨 김성옥이 어딘가에서 나타났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 졌다. 김성옥의 위세를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상황이였다. 옆에는 수하로 부리고 있던 이성삼이라는 사람이 서 있었다.

이성삼이란 사람은 당시 금산양조장에서 막걸리 배달을 하고 있었는데 짐바리 자전거에 막걸리 한섬을 싣고 신작로를 활보할 정도로 힘이 쎈 사람이였다. 나이는 27세 가량 됐다. 조용히 있던 김성옥이 손가락으로 사람들 틈에 있던 현구선생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다시 한쪽에 있던 강진세무서 과장(당시 39세 추정)을 하던 김세원이라는 사람과 금릉중학교에서 음악선생을 하던 쌍둥이 형제 한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김성옥의 손가락 신호를 받은 이성삼이 즉각적으로 움직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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