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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빛가람종합병원 원장 오경규(吳炅圭, 1952-)이 최근 나주시민의상을 받았다. 오원장은 강진읍 남성리 출신이다. 오경규는 어려서 강진경찰서 아래 중앙병원 뒤 세탁소 안집에서 살았다.오경규는 나주에서 1988년도부터 약 35년간 나주시에서 의료활동을 펼쳤다. 의사로서 나주시민의 건강증진에 헌신해왔다. 최근 코로나19에 대응하여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여 봉사, 헌신했다는 공적이 인정이 된 것이다.오경규는 인프라가 열악하여 모두가 꺼려했었던 나주혁신도시에 자발적으로 종합병원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연면적 4,300여 평,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강진일보
2022.11.17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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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기록했듯 영랑과 현구 선생은 모두 한국전쟁으로 인해 희생됐다. 영랑선생이 신당동 집에서 몸을 숨기고 있은지 보름 정도가 지난 9월 23일 경의 일이었다. 이미 그때는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고 마지막 서울수복을 코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영랑선생은 그때까지도 밖에 나가지 못하고 집의 동쪽에 있던 부엌앞 처마아래서 먼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1950년 9월 23일 오후 시간이었다. 서울 신당동 주택에 갑자기 포탄 한발이 떨어졌다. 엄청난 굉음이 울려퍼졌다. 포탄이 떨어진 지점은 동쪽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강진일보
2022.07.07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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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균의 추억의 강진극장’은 영랑 김윤식 시인과 현구(玄鳩) 김현구 시인의 시문학적 재능과 소양 그들의 예술성은 물론 생가, 항일행적, 문우들과의 교제 등을 소재로 글을 쓰면서 강진의 시문학파ㆍ강진근대역사문화사를 비롯하여 한국초기문학사에 이르기까지 시야를 넓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을 이끌었다.특히 문헌적 자료 외에도 가족 또는 지인들의 생생한 입담을 그대로 글로 옮겨내며 독자들의 흥미와 재미를 이끌었다.현구는 6.25 전쟁 중 인민재판 끝에 희생영랑은 북한군 포탄 파편 맞고 끝내 숨져 필자는 1950년대 말 중앙초 5학년 무렵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김응곤 기자
2022.06.30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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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인간극장사’에는 강진의 역사적 인물들도 소개됐다. 초대항공대장 조경연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한 김영현, 강진야당 60년 박병춘, 강진역사의 산증인 박상우, 사회주의자 윤가현, 교육자 박동오 등은 우리 강진사람들이 꼭 한번은 되새겨서 그 기억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으면 하는 사람들이다.■‘부릉~부릉~’강진에 첫 비행선이 뜨다강진이 낳은 해군초대 항공대장 조경연 선생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인 지난 1959년도. 강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읍 목리에 비행선이 내렸다는 소식이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목리 나루터는 금세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김응곤 기자
2022.06.23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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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균 목사가 강진일보에 ‘강진인간극장사’가 132회의 연재를 마치고 1부를 마쳤다. 김 목사는 2019년 7월 첫째주부터 연재를 시작해 3년 동안 연재를 이어왔다.김 목사는 “강진에서 낳고 자랐던 이야기와 만났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면 혹여 내 고향 강진의 향토문화사에 조그만 보탬이 되겠다 싶어 연재를 시작하여 오늘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했다.김 목사는 “그동안 독자 여러분의 애독과 카나다ㆍ미국을 비롯한 서울등 경향각지에서 선후배 친구ㆍ지인들의 격려와 사랑으로 132주 연속으로 연재할 수 있었음을 감사드리는 바이다”며 “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김응곤 기자
2022.06.1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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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처럼 생각하고 실천하라다산은『경세유표(經世遺表)』서문에서 “일모일발무비병이”(一毛一髮無非病耳), 나라가 털끝 하나 병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급금불개(及今不改)”, ‘지금 당장 고치고 바꾸지 않으면’ “必亡國而後已)”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라고 경고했다.다산은 나라가 망하지 않도록 부정부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변화를 일으키고 개혁할 수 있도록 모든 논리를 제시해 놓았다. 그렇지만 아무도 다산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다산이 별세한지 74년 만에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했다. 우리 민족은 36년간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강진일보
2022.06.09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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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표이서(一表二書)다산은 자신의 저서를 크게 분류하여 철학적 논리인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의 ‘경학(經學)’과 정치ㆍ경제의 논리인 일표이서(一表二書)의 경세학(經世學)으로 나누었다.경학을 통하여 인간의 사고체제인 철학의 변화를 추구하였기에 자기 변혁을 꾀하도록 ‘자기 몸을 닦을(修己)’ 수 있게 했다고 했으며, 경세학을 통해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지침서를 마련했으니 천하의 국가가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근본적인 것(本, 제도와 시설을 포함한 통치술)을 모두 갖춘 셈이라고 자부했다. 六經四書 以之修己 一表二書 以之爲天下國家 所以備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강진일보
2022.05.26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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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회 제주 역모사건 밝히다(2)그런데 그중에 함께 있던 윤광종이란 사람이 상찬계의 우두머리 격인 김재검이란 사람에게 이를 고자질을 해 버렸다. 위기의식을 느낀 김재검은 그날 밤 목사를 구슬려 포졸들을 이끌고 양제해를 급습해 체포했다. 이 일로 양제해와 김익강을 비롯한 수십명이 체포되었다.이들에게는 모변죄가 씌워져 7명이 죽임을 당했다. 양제해는 옥중에서 72일간 굶주리며 지내다 44세(1813년 11월)의 나이로 옥사했다. 양제해 사건은 아전의 상찬계 조직이 양제해로 인해 자신들의 비리가 드러날 것을 염려해서 거꾸로 그를 무고하여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강진일보
2022.05.19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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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출신 제자 이강회(李綱會) 이강회(李綱會, 1789〜?)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굉보(紘甫), 호는 운곡(雲谷)으로, 이보만(李保晩)의 5대손이다. 이보만은 윤선도(尹善道)의 사위로, 보길도에 은거한 장인을 따라 강진에 입향하였다.이후 그의 자손들이 그곳에 세거하게 되면서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는 1789년(정조 13) 강진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였다. 그는 강진에 유배 온 정약용(丁若鏞)의 제자가 되었다.이강회는 형 이유회(李維會)와 함께 정약용(丁若鏞)의 문인으로, 다신계(茶信契) 계원이다.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의 교감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강진일보
2022.05.12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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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가족 강진 이주(移住) 계획1801년 신유박해 당시 함께 유배 길을 떠났던 정약전ㆍ정약용 두 형제는 나주 율정점에서 작별을 하게 되었다.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당시 소흑산도라고 불리웠던 우이도(牛耳島)로 떠나게 된다.이후 두 사람은 편지로 서로 왕래하면서 학문적으로 토론을 했다. 때론 집안일에 대해서 서로 의논하기도 했다. 현재 손암이 다산에게 보낸 편지는 14편, 다산이 손암에게 보낸 편지는 17편이 전해지고 있다.(출처: 홍동현,「~손암을 찾아 牛耳島에 가다」)정약용 형제가 유배된지 7년째인 정묘년(丁卯年, 1807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강진일보
2022.05.06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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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의 어류 연구 정약전(巽庵 丁若銓, 1758~1816)은 흑산도 근해의 어류 중에서 특히 홍어(洪魚)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訂正): 지난호의 紅魚를 洪魚로 바로 잡는다.)정약전은 홍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홍어의 두 날개에는 가시가 있어서 교미할 때에는 그 가시를 박고 교합한다. 암놈이 낚시 바늘을 엎드러질 적에 수놈이 이에 붙어서 교합하다가 낚시를 끌어 올리면 나란히 따라 올라온다. 이 때 암놈은 먹이 때문에 죽고 수컷은 간음 때문에 죽는다고 말할 수 있다. 수컷은 음란한 것을 탐하는 자의 본보기가 될만도하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강진일보
2022.04.28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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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봉(牛頭峰)에서 우이도(牛耳島)를 기리다정약용은 무척 사교적인 성격이어서 많은 벗들을 사귀었다. 특히 20대 청년시절에 깊이 사귀었던 벗은 이벽(曠菴 李檗, 1754-1786)이었다.그러나 정약용은 누구보다도 둘째형 정약전(巽庵 丁若銓, 1758~1816)을 무척 따랐고, 평생을 통해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知己)의 벗이라 했다.어려서부터 산사(山寺)에 가서 독서하며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함께 시우(詩友)들과 어울려 즐기기도 했다.정약전은 편지에다 아우 약용을 이렇게 자랑했다. “내 동생 약용은 젊어서는 글 잘하는 선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강진일보
2022.04.21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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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天眞庵)에서 노닐던 시인 다산 정약용은 1797년 정조의 명령에 따라 초봄부터 교서관(校書館)에 나아가 동료들과 함께『春秋』라는 책을 교정했다. 임금은 수시로 잔치를 베풀어 자신의 뜻에 맞는 신하들이 실컷 배불리 먹도록 했다.다산은 정조를 가까이 모시면서 평소 임금이 의심스럽게 여기던 어려운 한자말을 물어 왔다. 그때 마다 막힘없이 답변하여 크게 칭찬받을 때가 많았다.얼마 뒤에는 이문원(離文院)에 들어가 두보(杜甫) 시를 교정하라는 명을 받았다. 註) 이문원(離文院): 조선시대 역대임금의 어진(御眞)ㆍ선적(璿)ㆍ어필(御筆)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강진일보
2022.04.14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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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되다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34세때(1795) 7월 정3품 당상관인 우부승지(右副承旨)에서 종6품의 충청도 금정역(金井驛) 찰방으로 좌천되었다.이 일은 그가 관료생활을 하는 동안 얼마나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바로 정약용 자신이 한 때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있었다는 점이다.다산의 형제인 정약전ㆍ정약종ㆍ조선 최초의 영세교인 이승훈ㆍ백서사건의 주역 황사영을 비롯한 주위 친지들이 천주교 핵심인물이었다는 사실에 있었다.당시 조선의 천주교 공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강진일보
2022.04.07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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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나가다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1794년 6월에 아버지의 3년상을 마쳤다. 7월 23일,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에 제수되었다. 8월 10일, 비변랑(備邊郞)에 임명하는 계(啓)가 내려졌다. 註) 비변랑(備邊郞): 조선시대, 비변사(備邊司)의 종육품 벼슬인 낭관(郎官). 국내외의 군사기밀을 맡아보았다. 10월 7일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다가 28일 수찬에 제수되었다. 1794년 10월 정조는 그해 흉년이 들자 경기도 각 읍에 암행어사 10명과 적간사관(摘奸史官) 5명을 파견했다. 정약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강진일보
2022.03.3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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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생활 시작하다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관료생활은 28세 때 시작하여 39세 때(1800) 끝났다. 12년 간에 걸친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었다.다산이 관료 기간 중에 이뤄낸 업적이란 조선근대 역사에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정조가 재위하던 후반기 동안 정약용은 임금의 측근에서 극진한 총애를 입었다.정조는 평소 그의 뛰어난 재주를 사랑하고 인정했다. 그가 대과에 급제하자 곧 바로 규장각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했다. 註)초계문신(抄啓文臣): 조선시대, 규장각에 특별히 마련되 교육 및 연구과정을 밟던 문신들. 그해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강진일보
2022.03.2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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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실의(天主實義)』를 읽다1783년(정조 7년, 22세) 정약용은 진사과에 합격하여 성호 이익의 옛집과 묘소를 찾았다. 이 해에 큰 아들 학연을 얻어 득남한 기쁨까지 경사가 겹쳤다.그러나 해가 바뀐 스물 세 살의 갑진년(甲辰年, 정조 7년, 23세)은 다산의 일생에 가장 큰 사단(事端)이 있던 해였다. 임금 정조가 등극한지 7년이 되어 정치적 안정기가 왔다. 오랫동안 소외 당한 남인 세력들이 기지개를 켜면서 집단적 행동이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이해 봄에 이승훈 등 남인계 선비들이 주관한 향사례(鄕射禮)에 다산도 참여했다. 註)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강진일보
2022.03.17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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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과학기술과 정조(正祖)의 관심18세기 후반에 성호학파 신서파나 북학파의 지식인들은 청나라의 문물을 직접 견문했다. 이들은 낡은 전통의 지식과 기술로는 조선사회의 빈곤과 낙후한 현실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확인했다.서양의 과학기술과 청나라의 문물을 활용하여 사회개혁과 발전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은 젊은 제자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교의 사회적 기능이 한계에 부딪치고 있음을 절실하게 토로했다.오늘의 세대와 습속을 보니 마치 물이 쏟아져내리듯 하여 수십년전과 이미 전혀 달라졌다. 나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강진일보
2022.03.10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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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에게 천주교를 배우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이벽(李蘗)에게 천주교 진리를 들은 후 천주교 신앙에 접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벽은 누구인가? 이벽(李蘗, 1754년~1785년)은 조선 후기의 천주교 신자이며 이승훈ㆍ권일신 등과 함께 조선 천주교회를 창설한 주역이다.이벽은 경기도 포천의 기호학파 남인 집안에서 부친 이부만(李簿萬:1727~1817)과 청주 한씨 사이에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이벽은 신체가 건장하고 키가 8척에 이르며 힘은 장사였으나 형제들과는 달리 과거시험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했다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강진일보
2022.03.03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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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과거시험 공부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16세 때 부친이 전라도 화순(和順)현감으로 내려가자 부친을 모시고 따라갔다. 그는 화순현 관아(官衙)의 금소당(琴嘯堂)에서 독서할 때 이 지방의 선비 조익현(曺翊鉉, 1737-1800)을 만났다.그는 정약용보다 25세나 연상이었으며 박학하고 호걸스러운 인물이었다. 조익현은 이제 소년티를 겨우 벗은 정약용을 한번 만나 경전과 문장을 토론하고 나선 뒤, 나이를 불문하고 벗으로 사귀었다.정약용이 화순을 떠난 뒤 20년이 넘도록 편지를 왕복하고 또 자신의 저술(「희고재문답(喜告齎
김병균의 추억의강진극장
강진일보
2022.02.24 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