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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집 우물에서 콜레라가 발병했다더라”민심 흉흉경찰과 대한청년단 중심 우익, 좌익 무장세력 사이 혈육전 시작 해방 직후 중국과 일본등에서 출향인들이 대거 고향으로 몰려 오면서 희망과 기쁜 함성만 가지고 온 게 아니였다. 대규모 인구이동은 필연적으로 전염병을 몰고 다녔다.1945년 9월 중순경, 그러니까 해방이 된 후 한달도 안됐을 때의 일이다. 강진읍에 난데없이 피부병인 옴이 쫘악 퍼졌다. 옴은 진드기에 의하여 발생되는 전염성이 매우 강한 피부 질환이다. 강진읍의 한 주민은 “그때 강진사람들 중 옴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가려우면 하도 긁어서 겨드랑이나 사타구니 같은 곳에서 피가 줄줄 흐르곤 했다”고 말했다. 옴은 마을마다 집집마다 확산됐다. 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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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4.21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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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행버스 유일 5시간 안팎 소요강진 ~ 부산 연결 고속도로 무용지물서남부권 출발 직통버스 개설해야강진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일년에 서너 차례 부산에 가는 주민 A씨는 버스를 탈 때 마다 답답한 마음이 앞선다. 강진에서 부산까지 엄연히 고속도로가 연결되는 시대지만 강진에서 부산까지 직행버스를 타고 가는 시간이 예나 지금이나 4시간 30분에서 5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것도 부산 가까이에서 막히기 시작하면 5시간 30분에서 6시간이 걸릴 때도 많다. 이 시간은 고속도로가 뚫리기 전인 지난 2012년 5월 전과 똑같은 것이다. 이유는 강진에서 부산으로 가는 직통버스가 없고 예전처럼 직행버스가 다니면서 국도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 거치기 때문이다.현재 강진에서 출발한 직행버스가 부산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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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4.21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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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민들이 가종 좋아하는 생선 횟감인 넙치를 즉살해서 0도씨 부근에 보관하면서 육질의 단단함과 감칠맛 성분인 이노신산(IMP)의 변화를 조사했다. 육질의 단단함은 즉살후에 근육의 수축이 서서히 일어나서 4~5시간 정도 경과 후에 활어회보다 약간 증가해서 최대값을 나타냈고, 10시간까지는 육질의 단단함이 활어회와 비슷한 값을 유지했다. 하루가 경과한 후에는 육질의 퍼석함이 확연히 나타났다. 반면에 혀로 느끼는 감칠맛 성분인 이노신산은 살아 있는 활어에는 그 양이 극히 적었으나 시간의 경과에 따라 증가해서 하루 경과 후 최대 값이 되었고 그 후에 3~4일 동안 최대값이 지속됐다.이상의 결과로부터 활어회보다 즉살 후 4~5시간 정도에서 생선회가 근육의 수축으로 육질이 더 단단해서 씹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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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5.04.14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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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한국언론진흥재단 연수코스였던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에 있는 국립수산과학원은 우리나라 최대수산연구소다. 이곳에서는 지난 2011년 7월부터 큰 거북이 한 마리가 박제돼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이 거북은 1949년 도암면 송학마을 앞바다에서 한 어민이 설치한 그물에 잡힌 후 이승만 대통령에게 선물로 보내진 거북이다. 거북목 바다거북과에 속하는 붉은바다거북(학명 Caretta caretta)이라고 한다. 거북에 관심이 많았던 이 전 대통령은 이 거북을 당시 부산 영도에 있던 부산수산시험장(현 국립수산과학원)으로 옮겨 기르도록 했으나 한국전쟁 후 병이 들어 죽었다. 이에 상심한 이 전 대통령은 거북을 박제로 만들도록 한 뒤 경무대에 한동안 보관했다. 박제된 거북의 길이는 1.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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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5.04.14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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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어민들도 적극적인 관심 가져볼 만국립수산과학원, 내수면양식연구센터등 새품종 보급 한창미꾸리등 내수어종도 주민소득원 가치 높아 지난 9일 오후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에 있는 전남도해양수산과학원 양식장. 둥근모양의 어항에서 은빛 색깔을 띤 30㎝ 정도의 물고기 수십마리가 쉴새없이 좁은 공간을 떼지어 움직였다. 수산과학원 전영호 연구원이 바가지에 사료를 듬뿍넣어 뿌려주자 물고기들이 푸드득 거리며 뛰어올라 주변으로 물방울이 사정없이 튀었다. 생기있는 모습이었다.이 물고기들이 바로 냉수성 어종인 은연어(Coho Salmon)다. 전남도해양수산과학원이 올초 바닷물에서 연중 양식하는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어종이다. 강진에서도 연어를 파는 식당이 한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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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4.1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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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들이 변하는 것 보고 불안감 가중“미군들이 아이들에게 참 잘해줬던 기억이 납니다. 과자를 주면 그렇게 맛있었으니까요”해방당시 군동초등학교 학생이던 군동의 김방현 선생은 짚차를 타고 다니던 미군들의 모습이 멋있었다고 회고했다. 당시에는 일반 트럭도 구경하기 힘들었지만 짚차는 어른들도 처음보는 이동수단이였다.미군들은 읍내 주둔지에서 모아진 쓰레기를 짚차에 실어 지금의 군동 석교다리 주변에 버리곤 했다. 그곳에 임시쓰레기 하치장 같은 것이 있었다. 미군들이 짚차에 쓰레기를 싣고 석교다리쪽으로 가면 군동의 아이들이 줄을 지어 그곳으로 달려가곤 했다. 짚차를 쫒아가면 미군들이 아이들에게 쵸코렛을 나눠주곤 했기 때문이다. 또 쓰레기 사이에서 미군들이 쓰다 버린 생필품이 상당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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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4.14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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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23일 미군들 강진지역 접수지금 새마을금고옆 건물에 미군본부 설치좌익중심 강진건준위 해체 명령다시 우익이 주도권, 대한독립촉성국민회등 활발한 활동 해방 1주년 기념식 좌익계 농민 300여명 강진경찰서 공격1945년 9월 귀국한 황기순(81. 강진읍 출신. 서울시 은평구 거주)선생의 가족은 지금의 강진읍 고내마을 회관옆에 작은 집을 마련하고 정착했다. 일본에서 모아온 약간의 돈이 있었기 때문에 귀환동포 촌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을에 허술한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귀국하기전 황씨 가족은 원래 그곳에 들어갈 계획은 아니였다. 일본에서 노동일을 하면서 고향의 친척에게 귀국하면 살 집을 구입해 놓으라고 부탁하며 돈을 꼬박꼬박 부쳤었다. 그러나 그 친척이 돈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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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4.14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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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에는 여전히 5곳 성업… 군동, 대구, 성전, 옴천‘0’인구감소, 커피전문점 성업 영향다방 주인들“선거때도 손님 없어요” 10여년 전만 해도, 다방이 지역 문화를 주도할 때가 있었다. 모든 여론의 흐름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다방에서부터 시작됐다. IMF 직전까지만 해도 강진읍에 다방이 자그마치 37개가 있었다고 한다. 아침이면 다방에서 커피를 시켜 하루를 시작하는 사무실이 대부분 이였다. 사무실에 손님이 오면 다방에서 커피를 시켜 접대하는게 큰 문화였다.90년대 중반 강진읍에서 다방을 운영했던 한 주민은 “아가씨를 다섯명 데리고 있었는데 하도 장사가 잘돼서 돈을 정부미 포대에 담다시피 하며 돈을 벌었다. 그런데 그 돈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당시를 회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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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4.1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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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딸이 기차에서 위독두 딸은 그대로 이민기차에 태워보내고조치원에서 내려 딸 치료했으나 절명딸 셋 모두 잃고‘발만 동동’ 1939년 4월 5일자 동아일보 한 귀퉁이에 충남 조치원발 기사로 아주 조그만 강진사람 사연이 게재돼 있다. 신문은 ‘살길을 찾아 만주로 가다가 도중에서 어린아이를 여의고 오도가도 못하고 애타하는 사람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강진군 이행협(49)씨 부부는 어린아이 3명을 데리고 집단이민단에 끼여 만주로 향하고 있었다. 이행협씨 일가족이 영산포역에서 기차를 탔는데 그중에 두 살짜리 둘째딸 천이가 갑자기 병을 얻었다. 증상이 위독했다. 이행협씨 부부는 천이를 데리고 가까운 역에서 내려야 했다. 그런데 두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고민이였다. 부부는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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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4.07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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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강진법원 자리에 대규모 귀환인촌생활환경 열악, 그래도 꿈에 부풀어 귀향우익중심 강진건국준비위원회, 좌익‘광주화랑단’침탈1948년 9월 강진건준 좌익인사 중심 재편 해방 직후 일본과 중국등에서 귀국한 사람들을 집단으로 거주시키기 위한 ‘귀환동포’의 집이 지금의 강진중학교 앞 강진법원 자리에 줄줄이 들어섰다. 방한칸과 부엌이 전부였고, 그나마 외장은 헌 판자나 두꺼운 포장을 씌운 집이였다. 이곳에 입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였다. 일제강점기 먹고 살것을 찾아 떠날때도 그랬지만 고향에 돌아왔으나 농사지을 땅 한평이 없는 것은 이들의 여전한 현실이였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사람들이 떠난 고향에서 뭔가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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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4.07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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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부터 막걸리 생산 법규 대폭강화박병준 사장“먹걸리는 막걸리일 뿐인데...” 70, 80년대 강진에서 가장 유명한 막걸리를 생산했던 60년 역사의 작천주조장이 존폐의 기로에 섰다. 오는 6월이면 양조장 시설조건이 굉장히 까다로워져 이에 맞는 설비를 갖춰야 한다. 각종 위생시설과 저장시설을 갖추는데 약 5천만원이 들어간다고 한다.그러나 작천주조장 박병준 사장은 최근까지 설비보완 공사를 하지 않고 있다. 다음달 말에 있을 식약청광주지사의 정기검사에서 자격미달 판정을 받게 되면 더 이상 막걸리를 생산하지 못하게 된다. 박사장은 “5천만원을 투자해서 그만큼 막걸리가 잘 팔린다면 얼마든지 그 일을 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헛돈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 돈을 투자하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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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4.07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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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역 출발 어느덧 정읍, 익산... 1간만에 오송역 도착시속 300㎞ 왔가 갔다, 호남권 교통혁명 시작 대 예고지난 25일 오후 3시 38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역. KTX 차량 8량을 연결한 제9022 열차가 육중한 몸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리없이 역을 빠져나간 KTX가 외곽으로 나오더니 거침없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차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은 광주시의 외곽지역. 평소에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자주 봤던 익숙했던 풍경이지만 지나가는 속도가 달랐다. 친숙한 장면들이 확확 지나갔다.기차는 어느덧 장성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10분이 지나자 시속 300㎞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주변의 높은 산들이 역시 자주 봤던 풍경이다. 새로 뚫린 굴을 지나고, 깎아내린 절벽을 구경하고 있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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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3.31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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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되고 일본사람들이 하나둘 떠나 갔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것은 일본사람들이 지어서 살던 집들이였다. 일제강점기때 한국인들이 지은 집은 대부분 초가집이였으나 일본인들은 기와로 집을 지었다. 그렇다고 일본인들이 모두 부자로 살았던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조선땅에서 먹고 살기 위해 이주해 온 경우가 상당수에 달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가난하게 산 일본인들도 있었다.일제강점기 강진읍에서 일본인들은 중앙로 주변과 시장 주변을 석권하고 있었다. 지금의 강진읍 중앙초등학교~동초등학교 도로변에 있는 집들은 대부분 일본사람들이 지은 집들이였다. 벽에는 나무판자를 붙이고 지붕에는 일본식 기와를 올렸다. 시장 주변에는 2층집도 여러채 있었다. 이 집들 역시 강제 수용되는 형태로 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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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3.31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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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지도층 말살하려고 명단 작성 끝냈다”1948년 8월 13일 일경 고등계형사의 급보해방전야 긴장의 연속… 드디어 8.15 환호올해가 광복 70주년을 맞는 해이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강제 합병된 이후 36년의 세월을 보내다 드디어 해방을 맞이한 것이다. 해방후 70년, 우리나라는 큰 변화와 발전을 이룩했다. 그 속에 우리 강진의 역사가 있다. 해방되던 해 태어났던 사람들은 이제 70대로 접어들고 있고, 해방을 목격하고, 해방과 함께 힘찬 사회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이제 80대, 90대 나이가 됐다. 그들이 이룩한 대한민국의 위업, 그들이 이룩한 강진의 위업이 있다. 해방과 6.25전쟁, 5.16구테타, 새마을운동, 5.18민주화운동등 역사적 대 변혁을 겪으며 오늘날의 번영을 이룬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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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3.31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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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보길도 보옥리 공룡알 해변 다시 보길도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비파원이라는 민박 겸 문화컨텐츠 일을 하시는 선배형의 누나(김원자, 전 호남신문 편집국장)가 불러줬기 때문이다. 해남에서 ‘일상 판타지 스튜디오’라는 북까페를 운영하며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는 민경, 울돌목 임하도 레지던시 공간에 와서 작업하고 있는 수묵화가 신태수(안동), 김범석(김제), 그리고 선배형인 광주의 김윤기, 김대현(한문학, 전남대) 교수님과 함께였다.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보길도는 한국 사람들이 ‘가장 가고 싶은 섬’ 첫 번째로 꼽는 곳이었는데, 청산도가 뜨기 시작하면서 보길도는 관광객이 아주 적은 한적한 섬이 되어 있었다. 보길도는 소설가 임철우 형이 다섯권짜리 5.18 전작 장편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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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5.03.19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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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김충식선생은 6.25가 발발하자 미처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고 민가와 세브란스병원을 오가며 피란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전쟁직 후인 1952년 어느날 고향으로 내려와 군동 백금포에 작은집을 마련해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전쟁동안 본가인 보은산 기슭 동성리 대 저택은 좌익들에 의해 모두 불살라진 상태였다. 1953년 음력 1월 15일, 고혈압과 중풍등 각종 지병에 시달리던 동은선생은 백금포의 집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64세되던 해였다. 동은선생의 장례식은 쓸쓸하게 치러졌다. 부친등이 묻혀 있는 선산은 병영면 소재지 야산의 마장등이란 곳에 있다. 부친 영준씨의 장례식은 대단히 웅장했다고 한다. 묘지앞에 세운 석물들은 지금 봐도 웅장하다. 그러나 부친의 묘 아래 묻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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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3.19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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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적 자립기반 제공 오늘날 세브란스병원 있게 해김기종씨의 고향은 강진이 아닌 것으로 확인김충식같은 사람이 강진출신이라는 것 널리 알릴때 리퍼트 대사를 흉기로 찌른 김기종(55)씨의 고향이 강진으로 잘못 알려지면서 강진지역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지만 한편으로 이 사건을 계기로 진짜 강진 사람으로서 새롭게 조명 받아야 할 주인공이 있다. 바로 30, 40년대 강진의 기업인 김충식 선생이다. 리퍼트 대사가 입원하고 박근혜 대통령과 정치권 주요인사들이 문병을 하는등 사건내내 관심의 대상이 됐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이 재정적인 자립을 할 수 있었던게 바로 김충식 선생때문이였다.김충식 선생은 1946년 10월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 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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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3.19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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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도 3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으로실종 장소도 옛 모습 찾을 수 없어성주와 하은이가 실종된지 15년이 되고 있는 지금 참 많은 것들이 변했다. 우선 실종 아이들의 모습이 많이 변했을 시기다. 당시 9살이던 성주는 이제 23세가 됐을 나이이고, 하은이 역시 22살이 됐을 시기이다. 초등학교 2학 때 실종됐던 아이들은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 됐을 연배다. 실종 어린이들의 부모들도 그동안 15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하은이 엄마, 성주엄마 모두 아이들을 잃어버릴 당시 30대 후반의 젊은 시절이였지만 지금은 모두 50대 중반이 됐다. 참으로 모진 세월이였을 것이다.사건 몇 년 후 하은이 부모들은 강진을 떴다. 목회자였던 하은이 아빠는 수년 동안 하은이를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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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3.1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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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5년전. 2000년 6월 15일의 일이다. 강진동초등학교 2학년 김성주양이 하교길에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이 지난 2001년 6월 1일. 강진중앙초등학교 1학년 김하은양이 역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성주는 옛 우시장이 있던 지금의 군내버스터미널 인근에서, 하은이는 평동리 평동이발관 주변에서 사라졌다. 두 아이는 실종 15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흔적 조차 발견되지 않고 있다.그런데 이 15년이라는게 그냥 넘길 수 없는 숫자라고 한다. 모든 범죄행위의 공소시효가 15년이여서 올해를 넘기면 성주를 유괴했거나 또다른 범죄행위를 저질렀을지도 모를 범인의 공소시효가 끝난다는 것이다. 2007년 관련법이 개정돼 살인죄의 경우 공소시효가 25년으로 늘었지만 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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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3.19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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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강진에는 모두 135여 농가가 딸기를 재배하고 있다. 면적이 41.5㏊에 달한다. 전남지역에서 가장 많은 면적이다. 강진읍에 92농가 26㏊가 집중돼 있고, 그 다음으로 군동지역에 46농가가 10.8㏊의 딸기 농사를 짓고 있다.비교적 안정된 수익구조 때문에 농민들로부터 선호품목이 됐다. 강진은 딸기 강국이다. 강진에서 생산되는 딸기양은 막대한 것이여서 목포공판장의 경우 매년 이맘때 딸기 출하기가 되면 강진 딸기가 없으면 장이 서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강진딸기의 영향력이 크다.관심을 끄는 것은 귀농인들이 딸기 재배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비닐하우스 한동(200평)에서 보통 1천만원 이상의 순수익이 보장되기 때문에 처음 귀농한 사람들이 딸기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비닐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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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5.03.10 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