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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지역구 역사‘강진 단일선거구’ 해방후~1953년‘강진-영암’ 1963~1973년‘강진-장흥-영암-완도’ 1973~1988년‘강진-완도’1988~2008년‘강진-장흥-영암’ 2008~2016년‘강진-장흥-보성-고흥’ 2016년~ 22대 총선에서 민주당 문금주 후보가 당선됨으로서 강진은 16번째 국회의원을 뽑은 셈이 됐다. 스물두번째 국회의원 선거를 했지만 재선등을 포함해 16명의 인물을 국회의원으로 뽑았다는 뜻이다. 면면을 살펴보면 강진을 포함해 영암, 완도, 장흥등 출신지역이 다양했다. 그만큼 선거구 변화가 심했다.강진은 2
주희춘 기자의 강진인문기행
강진일보
2024.04.19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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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골목에 남아 있는 옛스러운 돌담마을에 돌이 많아 돌담을 쌓았다마을 주민들 복원추진 큰 관광자원 될 듯 송현마을에는 돌담이 많다. 원래 송현마을은 돌이 많은 곳이었다. 주변에 바위산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땅을 파기만 하면 돌이 나온다’ 할 정도로 돌이 많았다.그래서 오래전 마을에 주택을 짓는다거나 밭을 일구면 돌을 치우는 일이 가장 큰 일중의 하나였다.마을에 돌이 많아서 물이 고이지 않은 것도 특징이었다. 그래서 마을 주변 논밭은 가뭄을 유달리 많이 탔고, 반대로 적당히 비만 와주면 물빠짐이 좋아서 작물이 아주 잘 되는 잇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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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3.10.16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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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까지 강진읍장이 있던 자리각 섬에서 뱃길따라 물산 모이던 곳 강진읍 도원마을 강진천변에 배드리 공원라는 비석이 보인다. 배드리는 원래 강진장이 있었던 곳이다. 배가 닿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지명이다.주교시(舟橋市)라고도 불리었다. 신전면 영수리와 해남면 북일면의 경계 지역 작은 하천 다리에도 배드리란 지명이 있다. 그곳 역시 오래전 배가 들어왔던 곳이다.배드리 강진장은 강진사람들은 물론 완도지역의 각 섬과 인근 장흥, 해남사람들도 이용하던 장이었다. 배를 타고 오면 강진만을 따라 곧장 시장으로 올 수 있는 구조였다.
주희춘 기자의 강진인문기행
주희춘 기자
2023.10.0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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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멩이를 하나하나 쌓아 담장을 만들었다40~50년 전의 10%만 남아 있지만 장관 월남마을에 가면 돌담에 눈길이 간다. 마을입구에서부터 왠만한 축대는 돌담으로 쌓았던 흔적이 많고, 조금 마을 깊숙이 들어가면 굽이굽이 돌담으로 이뤄진 골목길이 이어진다.골목길을 만드느라 돌담을 만든게 아니고, 집의 담장을 돌담으로 만들었는데 이런것들이 이어지면서 돌골목길이 됐다. 다른 마을에서는 구경하기 어려운 오래된 돌담이다. 마을 회관을 지나 다리를 건너 산쪽으로 올라가면 아가자기한 돌담이 펼쳐진다. 원래 월남마을에는 작은 돌이 많은 곳이였다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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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3.09.2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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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풀벌레의 영혼을 달래주던 제사터자연 만물에 대한 생명존중 사상 있는 곳 목화마을에는 아주 특별한 제단(祭壇)이 있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아주 미천한 생명에게까지 제사를 지내는 여제단(厲祭壇)이 있었다. 지구 온난화가 심화돼 기상이변이 속출하는 세상에서 목화마을에 있었던 제단을 통해 전해오는 생명존중 사상은 당면한 지구의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 그 해답을 던져 준다. 목화마을 뒷산에는 큰 벼락수와 작은 벼락수라는 계곡이 있다. 이 벼락수라는 계곡에는 옛날에 형제가 살았는데 싸움이 심해 하늘에서 벼락을 자주 내렸다.그 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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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3.09.15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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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5년 임금의 허락받고 부조묘 건립임진왜란 당시 호남의 삼창의(三倡義)진주성 싸움서 장남과 함께 남강 투신1940년 나주서 강진읍 팔영마을 이전 팔영마을 뒤쪽 산기슭에 있는 부조묘란 제당이 있다. 이 부조묘(不祧廟)는 임진왜란당시 전라도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이킨 김천일(1537-1593) 장군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다.후손들은 정성스럽게 제를 올리고 나라를 지키다 순직한 그 분의 뜻을 기렸다. 김천일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지휘하다가 진주성이 왜군에 함락되자 아들과 함께 진주 남강에 몸을 던진 충신이다.그의 고향은 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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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3.08.31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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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산 자락에 돌담으로 계단밭 만들어 경작강진향교 뒤편에 산재70년대까지 경작 강진향교 주변 보은산 기슭은 오래전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1930년대 사진을 보면 지금의 남성리는 강진농협 건물이 있는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민가는 지금의 중앙로 북쪽에만 소수 분포돼 있었다. 바닷물이 가까이 들어 왔으니 집지을 땅이 없었고, 마을 형성에 가장 중요한 식수를 확보하는데도 불리했다. 서쪽 서성리는 주거지역이 아니었다.대신 지금의 동문샘을 중심으로 큰 마을이 있었다. 여기서 확장된 마을은 자연스럽게 보은산 자락을 따라 교촌리쪽으로 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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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3.08.24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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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가우도 죽방망이에서 포획‘세계 최대’ 주목 받으며 전국적 관심이승만 사랑받으며 전국적 관심 사람들은 술 먹이고 등에 올라타부산으로 가서 수족관 생활중 사망지금은 박제되어 국립수산과학원에 전시 중 ‘1949년 강진 거북이’ 이야기가 김옥애 작가를 통해 동화로 태어났다.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때 그 사연을 당시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본다./편집자 주. 1949년 4월초 어느날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 전남 강진에서 엄청난 크기의 거북이가 잡혔다는 급보가 올라온다. 경무대는 술렁거렸다. 며칠전에는 창경원에 파랑새가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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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3.08.18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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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이후 청자관심 역사속으로어디서 어떻게 생산된지 누구도 몰라1900년대 초 일본인들 도굴 본격시작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최대 도굴꾼1914년 스에마시쿠마히코 대구 첫 답사“영롱한 색깔과 상감의 예술성이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정수품이다” 고려청자는 고려가 멸망하고 백자 사용이 성행하면서 오랫동안 역사속에 묻히게 된다. 강진의 바닷가 주변에서 분청사기 도요지와 조선백자 도요지가 발견되는 것으로 봐서 그 옛날 청자를 생산했던 도공의 후예들이 강진일대에서 자기를 계속 생산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또 칠량면 봉황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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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3.02.23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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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의 신으로 소 대가리 신봉그 풍요는 강진이 해상무역의 도시이고상업의 도시임을 말해주고 있어 남포를 내려다보는 정면에 위치고대로부터 강진만에 들어오는모든 뱃사람들은 우두봉에 소원 빌었을 것태백산의 원래 이름도 우두산(牛頭山)상주의 우복동(牛腹洞)과 강진의 우두봉(牛頭峰)이 가장 주목돼‘강진은 온통 소로 뒤범벅이 되어있는특이한 뉘앙스의 지역이다’다음은 조선일보에 ‘조용헌 살롱’을 20년째 연재 중인 조용헌 선생이 주간조선에 게재한 보은산 우두봉에 대한 글이다. 조용헌 선생은 주간조선에 ‘조용헌의 영지 순례’코너에도 장기간 글을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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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3.02.17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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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죽은자, 전염병으로 죽은 자100여개 위패 세워 억울한 넋 위로마을회관에는 제상에 익힌 음식다리 밖에는 생것 차려 추모 남포는 조선시대 해양교역의 중심지해양사고, 전염병 확산 많았던 마을 마을회관앞에는 전염병 창궐 때약제마련해준 현감 민영은 불망비 매년 정월 대보름 전날 밤이 되면 강진읍 남포마을 서쪽 강변에는 촛불이 켜진다. 북쪽에 젯상을 차리고, 남쪽으로는 금줄을 치고 100여개의 위패가 세워진다. 위패는 아주 작다. 싱싱한 대나무를 쪼개 그 끝에 창호지에 적은 신위란 푯말을 끼워넣는다.남포마을 천제는 독특하다.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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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3.02.09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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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강진, 영암, 무안등 논 1억원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 기탁지금 돈으로 600억 이상 가치연대 세브란스 재정자립 기틀마련세브란스병원에 ‘동은의학박물관’1953년 음력 1월 15일 영포서 사망강진갑부의 말년은 쓸쓸했다 1953년 음력 1월 15일, 그러니까 딱 이맘때이다. 군동 백금포의 허름한 한옥에서 대한민국의 거부 김충식 선생이 영면에 들었다. 그의 나이 64세였다. 해방직후 김충식 선생의 재산은 77억환, 지금 돈으로 1조2천억원에 달했다.그러나 농지개혁으로 농지를 거의 몰수당했고, 6.25까지 겪으면서 사업기반을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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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3.02.02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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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면 소재지 석제원터고려, 조선때 주요 관리들말 갈아타고 숙박하던 곳난중일기에 ‘석제원에서점심을 먹었다’기록 확실표지석 하나 없는 쓸쓸한 장소지역주민들 “옛 터 기념하는비석이라도 세워 후손에 전했으면”전국 지자체들 경쟁적으로이순신 선양사업 진행중‘성전이 이순신 장군이점심먹은 곳이다’알리면지역경제 활성화 큰 기여 할 듯 이순신이 다시 뜨고 있다. 영원한 거물이다. 영화 ‘한산’이 벌써 500만 관객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지난 2014년 영화 ‘명량’에 이어 잇따른 히트다. 우리 역사속에 이순신이란 거목은 영원불멸의 위인이라는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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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2.08.1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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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은 바다의 시야가 가장 좋을 때다. 쌀쌀한 기운이 유입되면서 미세먼지를 밀어 낸다.이때쯤에 제주도 한라산을 보려면 마량의 봉대산이나 대구의 만경대에 올라가면 된다. 좋은 날씨에 말이다. 예전 사람들은 나침반이 없었기 때문에 목측항해를 했다.눈으로 주변의 지형지물을 보면서 돛배를 몰았던 것이다. 10월, 11월, 12월은 목측항해에 가장 좋은 시기였다. 그래서 옛 강진~ 제주 항해 기록을 보면 유독 이 시기 항해가 많이 보인다.이번 인문기행은 조선시대 강진에서 제주도로 가던 항로를 따라 가보자. 조선시대 강진에서 제주도로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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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0.10.15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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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군이 군동면 영포에 추진하고 있는 새뜰마을 사업과 관련해 현지의 농업창고가 관심을 받고 있다. 근대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활용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강진군청 이재연 학예연구사가 글을 기고해 왔다. 이번주 강진인문기행은 이재연 학예연구사의 글을 요약해 싣는다. / 편집자 주.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에는 백금포에서 거래되는 하루 평균 어물 거래량이 1~2톤 가량에 달했고, 영포마을 주민들은 지금 돈으로 100만원 정도 현금을 집집마다 갖고 있을 정도로 부유했었다고 전해진다.또한, 냉장고가 없었던 시절 이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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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20.10.08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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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강 하류에 있는 군동 영포마을. 지금은 다소 허전한 곳이지만 이곳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를 전후한 시기까지는 강진의 최대 포구였다.서쪽의 강진읍 남포마을이 주로 수산물을 취급한 큰 항구였다면 동쪽의 영포는 쌀과 화물을 실어나르는 포구였다.이곳의 다른 이름은 백금포인데, 하얀쌀을 실어 나르는 곳이여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영포는 조선시대 군영포(軍令浦)라고 불리던 곳이다.지금의 병영면에 있었던 조선시대 전라병영성의 전용 포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568년에 군영(軍營)으로 고쳐졌으며, 1577년 정유재란때에는 이순신 장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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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0.09.2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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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모두의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했던 행동들이 꽉 막혔다. 어디론가 떠나기가 두렵고 사람을 만나기 겁난다. 답답하다. 일상이 그립다.사람들이 움직이고, 누군가를 만나고, 무엇인가를 소비하는게 그렇게 성스러운 일인 줄 몰랐다. 인간사회를 구성하는게 무엇인지,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 뚜렷하게 보이는 요즘이다.이번 인문기행은 답답한 마음을 푸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시대 강진에서 세상의 변화를 꿈꾸던 한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다.다산선생의 수제자로 꼽히는 신전 출신의 운곡 이강회
주희춘 기자의 강진인문기행
주희춘 기자
2020.09.1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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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따라 태풍이 지나가고 있다. 기상이변이라 할만 하다. 지난주 인문기행은 강진에 큰 영향을 미친 태풍을 몇가지 살펴보았다.태풍과 홍수피해라면 강진사람들이 한번쯤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 탐진강 하류을 어떻게 막았는가 하는 일이다. 눈여겨 보면 알겠지만 강진은 온통 방조제 투성이다.탐진강 하류인 군동면 일대에서부터 강진읍 앞에도 바닷물을 막아주는 방조제가 있다. 남포에서 해창으로 가는 길도 방조제이고, 군동 하신에서부터 칠량 구로마을까지 이어지는 긴 방조제가 있다.읍과 가까운 곳에 이렇게 방조제가 많은 곳도 전국에서 찾기 어려울 것이
주희춘 기자의 강진인문기행
주희춘 기자
2020.09.10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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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선생이 강진에 유배온지 9년째 되는 해인 1810년 7월 28일의 일이다. 다산의 나이 49세때의 일이다. 엄청난 규모의 태풍이 강진 지역을 강타했다.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7, 8월이면 태풍이 자주 있었을 것이다. 태풍의 위력과 피해에 놀란 다산은 염우부(鹽雨賦)란 시문에 당시의 생생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다산의 정확한 태풍기록당시에는 인공위성이 있을 때도 아니지만 일본에서 태풍이 북상해 제주를 거쳐 강진에 상륙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어 다산의 기록정신에 다시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돈장이라 경오년에 /그 율
주희춘 기자의 강진인문기행
강진일보
2020.09.0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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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면 박동마을에 있는 적벽천은 병영의 동쪽을 흐르는 병영천의 일부 구간이다. 그 길이가 대략 200m 정도 된다. 이곳을 적벽천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적벽밑을 지나는 하천이기 때문이다. 적벽은 일망대란 바위산 아래 있는 절벽이다.바위에 ‘赤壁淸流(적벽청류)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전라병사를 비롯한 관리들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그만큼 바위의 풍광이 좋고, 바위 사이를 흐르는 물이 아름답다. 병영 사람들이 크게 아끼는 관광지이기도 하다.정교한 하천이 곳을 구경해 본 사람들은 느꼈겠지만, 적벽 보다는 적벽아래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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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0.08.27 1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