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련까지 큰 화물선이 왕래했다

군동 영포에 있는 옛 창고 건물이다. 강진읍 농협 소유 건물인데 그동안 보존이 잘돼 있어 근대문화유산으로서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포마을에 새뜰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경우 이 건물이 상징적으로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군동 영포에 있는 옛 창고 건물이다. 강진읍 농협 소유 건물인데 그동안 보존이 잘돼 있어 근대문화유산으로서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포마을에 새뜰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경우 이 건물이 상징적으로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탐진강 하류에 있는 군동 영포마을. 지금은 다소 허전한 곳이지만 이곳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를 전후한 시기까지는 강진의 최대 포구였다.

서쪽의 강진읍 남포마을이 주로 수산물을 취급한 큰 항구였다면 동쪽의 영포는 쌀과 화물을 실어나르는 포구였다.

이곳의 다른 이름은 백금포인데, 하얀쌀을 실어 나르는 곳이여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영포는 조선시대 군영포(軍令浦)라고 불리던 곳이다.

지금의 병영면에 있었던 조선시대 전라병영성의 전용 포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568년에 군영(軍營)으로 고쳐졌으며, 1577년 정유재란때에는 이순신 장군이 다녀갔다는 기록이 전한다.

한때는 군사용 항구
 

영포마을은 한때 다섯 개 이상의 정미소가 있었던 곳으로 이곳에서 생산하는 쌀이나 벼를 보관하는 창고가 50여개가 넘었다.
영포마을은 한때 다섯 개 이상의 정미소가 있었던 곳으로 이곳에서 생산하는 쌀이나 벼를 보관하는 창고가 50여개가 넘었다.

 

군영포로 사용될 때에는 군인과 말의 전용 항구였고, 동학학명 이후로는 민간항으로 바뀌어 장삿배들이 주로 정박하는 곳이 되었다.

1932년 탐진강 하류에 제방이 쌓아진 이후 본격적인 항구가 되면서 백금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일제는 작천의 질좋고 양이 많은 쌀을 탐냈다.

그래서 영포에서부터 까치내재를 넘어 작천으로 넘어가는 길을 뚫었다. 영포에는 양곡도정공장이 많이 들어섰다.

영포는 강진의 각종 산물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출발점이 됐다. 주변 해남이나 장흥, 보성 등에도 백금포만한 벼 집산지가 없었다.

백금포에서 선원으로 활동했던 정상렬씨(2015년작고. 대구면 미산마을 출신)씨의 증언에 따르면 백금포에는 크고 작은 창고가 50여 개가 넘었고, 50톤급 대형 풍선과 기계선(통통배) 40여 척이 들락거렸다.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강진은 전혀 다른 상업환경을 맞이하게 된다. 일제하에서 전통적인 갑부들은 재산증식 기회가 더욱 늘어났다.

강진의 갑부 김충식의 경우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논을 전통적인 지주경영방식으로 운영해 오다 1910년 강제 한일병합이 된 이후 (주)호남은행(1920년), 강진창고금융(1925년), 전남도시제사(주), 소화전기, 동은농장(1929년), (주)조선거래소, 금익증권(1940년) 등 다양한 업종에 진출하며 1940년대 들어서는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광산왕 최창학과 함께 조선의 3대 갑부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또 일본인들이 이주해 들어오면서 1920년대 초반에는 강진에만 일본인이 972명이나 살았으며, 1930년대 들어서는 50정보 이상 대지주가 5명이나 되는 등 일본인의 농지소유도 급격히 증가했다. 김충식씨의 경우 1930년대 땅 소유 규모가 1천215정보까지 늘어났다.

한때는 군사용 항구

142정보를 가지고 있던 일본인 翊田辛次郞이란 사람은 논농장을 경영하면서 정미업을 함께 운영해 일본측 문헌에는 강진쌀의 성가를 드높힌 사람이며 강진을 개척한 선구자로 평가 받았다.

이같은 지주들의 화려한 변신과 일본인들의 토지잠식 뒤에는 서민들의 고통이 뒷따랐다. 백금포는 그런 역사 흐름의 중심지였다.

자본축적이 진행되고 해상항로를 통한 상업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면서 내륙 깊숙한 곳에 형성돼 있는 백금포는 육지의 산물을 밖으로 실어나르는 최적의 포구였다.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던 영포(백금포)의 기능이 더욱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김충식씨와 차종채씨의 창고업과 해운업, 일본인들의 창고업, 이에따른 군소전주들의 상업거래가 대부분 백금포에서 시작됐다.

김충식씨는 1940년대 초반부터 발동선을 구입해 서창, 해창, 장흥 수문포, 고흥 녹동, 고흥 나로도간의 연안항로를 개설해 운영하면서 해운업 확장에 박차를 가했고, 차종채씨는 해운, 비료, 주조, 관염 등에 뛰어들었다.

1940년대 말을 전후해서 백금포에는 50톤 안팎의 대형 풍선 30여 척이 들락날락거리고 있었다. 제주로 왕래하는 배가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목포배였다. 제주배는 생선류와 젓갈류를 많이 싣고 와서 쌀과 바꿔갔다.

이때문에 백금포에는 정미소뿐 아니라 생선을 받아서 넘기는 곳, 젓갈을 쌀과 바꿔주고 다시 상인에게 넘기는 다양한 사람과 기능들이 버글거리고 있었다.

남포와 함께 양대산맥 이뤄

강진읍은 동쪽의 백금포에서 상선을 통해 돈이 왕래하고, 서쪽에서는 남포에서 고깃배들이 돈을 펌프질하고 있었던 형국이다. 일제강점기 때 강진에서 돈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는 것은 이런 경제구조에서 연유됐을 것이다.

1940년대 말 백금포에는 강진사람 소유의 큰 풍선이 다섯 척 정도 있었다. 당시 백금포의 실질적 점주였던 차종채씨가 50톤급 풍선 두 척을 가지고 있었고 강진읍 목리의 유재희씨가 한 척, 역시 목리의 김관평씨가 한 척이 있었고 대구면 계치마을의 조귀속이란 사람의 배가 또 한 척 있었다.

차종채씨는 당시 규모로 대단한 사업가였다. 자신이 끌고 다니는 식솔이 20명에 달했다. 30톤 규모의 풍선은 규모가 엄청났다. 배의 길이가 30m였고, 넓이는 15m 정도 됐다. 높이는 배안으로 들어가면 어른의 머리가 닿지 않았다.

백금포에는 정미소가 많았기 때문에 인근 장흥과 해남, 영암 등지의 쌀이 대부분 이곳으로 실려왔다. 선주(船主)가 있고, 하주(荷主)가 있었다. 선주는 배의 주인이고 하주로부터 물건을 위탁받아 원하는 장소로 실어다주는 사람이었다.

하주들은 사방에서 왔다. 부산사람도 있었고, 여수사람도 있었고, 제주사람도 있었다. 강진풍선에 선적되는 품목도 다양했다. 우선 쌀이 가장 많았다. 30~40톤 정도의 풍선에 80㎏ 짜리 쌀이 1천가마~1천500가마까지 실렸다.

주변에는 유흥가 크게 번성

1945년 해방 직전까지 영포에서 출발한 화물선이 중국 대련까지 왕래했다. 영포가 포구로 발전하면서 주변산업도 발전했다. 지금의 바닷가 주변에 여성종업원이 있는 술집이 다섯곳이나 됐다.

정미소 종사자들이나 왕래하는 선원들이 묵는 여관도 세곳이나 됐다. 지금의 차종채 선생 옛집 주변에는 상가들이 즐비했다.

선원들이 구입하는 물건도 많았지만 고금도나 약산도등 인근 섬에서 배를 타고 나와 영포에서 물건을 구입해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거리가 활성화되면서 고급 한옥도 들어섰다.

영포에 차종채 선생 가옥이 두채나 된다. 한 채는 00번지에 있는 것이고, 하나는 00번지에 있다. 00 번지에 있는 것은 거의 무너지다시피했다. 지금은 먼 집안 친척인 차종래(87) 김동심(85) 부부가 산다.

차종채선생은 사업이 한창 잘되던 시절에 한옥을 한 채 더 지었다. 내부 원형이 지금도 잘 보존돼 있는 편이다. 아들 차운영씨를 거쳐 현재는 문화재 수리사업자인 조모씨 소유다.

영포마을에 있는 김호남 선생 가옥이다. 김호남 선생은 1952년 7월부터 1957년 5월까지 군동면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지금은 며느리가 집을 지키며 산다.
영포마을에 있는 김호남 선생 가옥이다. 김호남 선생은 1952년 7월부터 1957년 5월까지 군동면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지금은 며느리가 집을 지키며 산다.

 

또 한 채는 1952년 7월부터 1957년 5월까지 군동면장을 지냈던 김호남 선생이 지었던 한옥이 있다. 이 한옥을 지었던 우스겟소리가 있다. 차종채 선생은 김호남 선생 보다 훨씬 앞선 1930년 11월부터 1934년까지 군동면장을 지냈다.

6.25가 지난 후 김호남 선생이 면장시절  때의 일이다. 한번은 차종채 선생집에 일을 보러갔다. 한옥의 규모에 놀란 김호남 선생이 “이 정도 한옥을 지으려면 얼마 정도가 들어갑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차종채 선생이 “자네는 아직 이런 집을 가질 처지가 못되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김호남 선생은 그 길로 돌아가 돈을 만들어 차종채 선생 건너편 일반가옥 일곱채를 매입했다. 그리고 가옥을 철거하고 지금의 큰 한옥을 지었다. 그것도 건너편 차종채 선생 한옥 보다 한칸이 더 넓게 지었다.

기와를 공급받기 위해 지금의 농업기술센터 인근에 기와공장까지 차렸다. 지금도 있는 큰 굴뚝은 그때 기와공장할 때 올린 것이다. 김호남 선생 한옥은 아들 김정창씨 부부가 살다가 남편이 작고했고 지금은 며느리 윤성자씨(70)가 살고 있다.

영포 동쪽 끝 탐진강변에는 당시로서는 최고급 시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얼음을 저정하는 석빙고(石氷庫)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얼음이나 어획물을 저장해 두었다가 한 여름에 시원하고 싱싱한 생선을 꺼내먹었던 곳이다.

백금포에 있는 석빙고가 비교적 온전한 모양으로 전해온다. 크기는 서너평 정도이다. 실내 높이는 2m 정도이며 2개의 실로 이뤄졌다. 이곳은 지금 아무도 찾지 않은 폐허가 되어 버렸지만 여름에는 냉기가 살아 있다. 석빙고는 백금포가 한창 번성하던 1930년대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빙고등 옛 유적 많아

백금포 석빙고는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한때 유랑객들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섬에도 육지로 이사 온 사람들의 임시 거처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인근 주민들이 간단한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70년대 초반에는 영포거리가 영화 촬영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옛 항구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였기 때문이다. 마을 주민들은 영화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소 달구지를 끌고 가던 모습을 촬영한 것은 기억이 생생했다.

강진군이 영포일대에 새뜰 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새뜰사업은 영포처럼 낙후된 시설이 많은 곳을 새롭게 개선하는 사업이다. 영포는 지금도 탐진강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고, 지금도 옛 유적지들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중 오래된 창고는 이곳의 보물이 될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주변 아파트에는 많은 주민들이 살고 있다. 가까운 곳에 강진만 갈대밭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탐진강 하류 정비사업이 잘 돼서 사방으로 산책로가 개설돼 있다. 영포의 새뜰사업은 이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엮어내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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