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박정희를 중심으로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이때를 기점으로 지역 사회에서도 분위기가 달라진 점이 하나 있었다.바로 서리문화가 사라진 것이다. 나는 학창시절 친구들과 개구쟁이들처럼 여기저기 놀러다니면서 장난을 많이 치곤 했다.그중 하나가 바로 서리였는데 친구들과 배가 고프면 인근의 밭에 들어가 고구마나 수박 등을 몇 개 서리해서 나눠먹곤 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어른들도 어느 정도 아이들의 장난으로 여기면서 묵인해주는 분위기가 있었다.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달라졌고 친구들중 몇 명은
내가 배구부로 활동했던 강진중학교는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1개 학년에 4~5개 반이 운영되고 있었고 반에는 50여명이상 학생들이 공부를 했다. 1개 학년당 최소 200명이상 3개 학년이면 500~600명이 함께 다녔다.이때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50년말이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정상적인 나이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의 기억속에도 당시에 24살이었던 분중에 김흥영이라는 사람이 학교에 다녔던 기억이 있다.이 사람처럼 이때는 나이가 많은 만학도들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 내가 이 사
지난호에 현재 강진우체국 있던 자리에 중앙초등학교 분교가 있었고 그곳에서 군민들의 응원을 받으며 배구대회에 출전했던 이야기를 했다. 이번주에는 중앙초등학교 분교와 그 일대 역사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고자 한다.내가 중학생이던 무렵이었다. 아마 50년후반에서 60년대 초반 무렵일 듯 싶다. 이때는 중앙초등학교가 1개 학년에 7반까지 있었다. 당연히 학생수도 거의 3천명에 육박할 정도로 많았다.학생수가 많다보니 중앙초등학교 건물이 부족했던 탓에 그곳에서 모두 수업을 받지 못하고 현재 강진우체국 자리에 있었던 분교에서 일부 학년이 수
나는 대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강진중학교로 진학하게 되면서 배구부 활동을 했다. 이번호에는 배구부 이야기를 해보자.중학교에서 입학할 당시 나는 키가 170㎝정도로 또래들에 비해 큰편이었다. 그러다보니 운동부 선배들에게 눈에 띄었고 2학년때에는 배구부에서 활동하게 됐다. 이때 배구부는 강진농고 배구부 선배들과 함께 운동을 했는데 장흥출신이었던 박주동이라는 선배는 키가 180㎝가 넘는 큰 키가 인상깊었고 그 외에도 유영갑, 김춘옥 선배 등 키가 큰 선배들이 배구부로 활동하고 있었다.내가 배구부 활동을 할때만 하더라도 실내체육관은 존재하지
금곡사 벚꽃길을 바라보면서 금곡사의 예전 일들이 생각난다. 금곡사는 지금은 백련사나 무위사 등 강진내에 여러 곳의 사찰들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멋진 건물들과 종각까지 들어서 있다. 사찰 주변의 산세와 어우러져 멋진 풍광까지 자아내는 곳이다.내가 어린시절 이 곳 금곡사 일대는 낡은 암자 정도에 불과한 건물만 있을뿐 황량했다. 이랬던 금곡사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금곡사 신도들의 지원과 도움이 컸다.그중에서도 박기환 선생은 금곡사 신도회장을 맡아 많은 활동을 했다. 지난주 소개했던 것처럼 금곡사 대웅전 복원사업을 추진할
한겨울 추위가 물러가고 따뜻한 봄이 오면서 지역 곳곳에서 꽃이 피어나고 있다. 강진에는 봄하면 떠오르는 축제는 바로 금곡사 벚꽃축제다. 금곡사 벚꽃길은 군청 공직자들이 나서서 조성했던 길이다.내가 학창시절 금곡사는 지금과는 다르게 벚나무가 거의 없었다. 금곡사로 올라가는 길목 주변에 닭집 2~3곳 정도가 영업을 하고 있었고 벚꽃은 야산에 자생적으로 피어나 자라는 나무들이 몇그루 있었을 뿐이었다.이런 시절 내 기억속에 금곡사하면 닭이 떠오르기도 하고 강진농업고등학교 재학시절 이 곳을 자주 지나다녔던 기억도 난다. 강진농고는 지금도 그
제52회 강진청자축제가 10일동안 청자촌 일원에서 열렸다. 나도 여러명의 지인들과 축제기간동안 여러차례 행사장을 찾았다. 축제 첫날과 개막식날 많은 비가 내리면서 관광객들이 찾아올까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우려에 불과했다.많은 강진군민들과 출향인, 관광객들이 찾아오면서 성황을 이뤘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강진청자축제의 옛 모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내가 어린시절 백사마을과 가까웠던 당전마을과 미산마을 주변은 나의 주된 놀이터이기도 했다. 그곳에 할아버지가 농사를 짓던 논과 밭이 있었고 현재 고려청자박물관이 있는 뒤편 야산도 집안 소유
제52회 강진청자축제가 대구면 청자촌 일원에서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다. 내 고향마을은 백사마을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당전마을 인근에서 열리는 청자축제를 바라보면서 예전 기억들이 떠오른다.지금은 여러 가지 시설들이 들어서 있고 청자를 만드는 많은 개인요 업체들이 들어서 있는 청자촌은 예전에는 모두 논밭만 있었을 뿐 허허벌판이었다. 특히 이 일대는 논도 별로 없었기에 대부분 밭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 한국농어촌공사에서 경지정리를 하면서 일부 밭들이 논으로 바뀌었다.내가 어렸을때 지금 청자축제가 열리고 있는 미산마을과
제주도 수학여행 시절을 갔던 일도 기억에 많이 남지만 중학교 학창시절 강진읍내를 친구들과 돌아다녔던 추억도 떠오른다.무더운 여름철이면 시장에 나가면 옛날모습을 보여주는 드라마의 모습처럼 “아이스께끼”를 외치며 파는 장사꾼이 있었다.‘아이스께끼’는 아이스크림의 사투리였는데 나무로 만들어진 통안에 아이스크림을 넣고 두꺼운 담요같은 걸로 싸매고 녹지 않게 들고다니는 상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친구들과 무더운 여름철이면 하나를 사서 나눠먹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개당 10원에 사먹었던 것 같다.내가 다녔던 강진중학교 근처에는 작은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강진은 지금과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지금이야 강진읍내에 도로들이 생겨 많은 차들이 운행되고 있지만 60~70년대만 하더라도 자동차는 구경하기도 힘든 교통수단이었다.학창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강진극장이다. 현재 강진읍 동성리 극장통 거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볼링장이 들어서있다. 그곳에 오래전 강진극장이 있었는데 아이들에게는 흥미로우면서도 가고싶은 곳이었다.다양한 영화가 상영됐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에 구경거리도 많았다. 나와 친구들은 학교 수업이 없을때면 강진극장에 놀러가곤 했
나는 강진농고에 진학하면서 학교 선배들로부터 씨름부 활동을 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배구도 재미있었지만 씨름은 재미와 재능을 동시에 발견했던 운동이었다. 어려서부터 백사마을의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친구들과 동네형들과 씨름을 하며 놀았던 기억이 있었기때문인지도 모르겠다.아무튼 농고에 진학후 씨름부 활동을 하게 됐고 전국대회까지 출전하게 됐다. 이때 전라도권에서는 나름대로 성적이 좋았었고 자신감을 갖고 경상도 강팀들과도 경기를 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날 경상도 지역의 씨름이 강했던 영신고등학교와 씨름 경기를 하게 됐다. 나는 이때 체중이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뛰어노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학업성적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지만 운동과 노는 것이 더 즐거웠다. 6.25전쟁중이었지만 전쟁중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할정도로 학교를 다니는 데에 큰 지장이 없었다.내가 정식적으로 운동부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였다. 지난호에서 밝혔듯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배구부에서 활동하던 선배가 스카웃 제의를 받고 배구부 활동을 했다. 중학교 내내 배구부로 활동하면서 중앙초등학교와 강진농고 운동장에서 연습을 하며 대회에 출전하곤 했다.평소에는 강진에
8살의 나이에 대구국민학교에 입학했고 6.25전쟁 직후였지만 큰 불편함없이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마을에서 뛰어돌던 것처럼 다양한 놀이를 하며 친구들과 뛰어놀곤 했다.내가 특히 좋아했던 것은 운동회였는데 운동회를 할때면 가장 신이났던 기억이 난다. 여러 가지 종목이 있었지만 내가 특히 좋아했고 잘했던 것은 달리기와 던지기였다. 달리기는 거의 경기를 할때마다 1등을 놓치지 않았을 정도로 잘했고 던지기도 나를 따라올 친구들이 없을 정도였다.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어렸을때부터 운동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외가쪽 피를 많이 물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움을 모르고 바다와 들로 뛰어다니며 철없이 놀았던 나는 집안에서 농사일을 도와주던 일꾼들과 자주 들에 나가곤 했다. 당시에 적게는 5명에서 많을때는 7명정도 일꾼들이 있었는데 그분들과 들에서 나는 주로 논의 새를 쫓는 일을 했다. 이때는 새가 벼를 쪼아먹는 경우가 많아서 이를 쫓기 위함이었다.이 시기가 6.25 전쟁 직후였기 때문에 이때 들에서는 새를 쫓고 있는 나는 날카로운 죽창을 든 여러명의 청년들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이들은 동네 주변을 돌아다니며 치안활동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사람들은 들에
나는 어린시절을 대구면 백사마을에서 보냈다. 내가 돌도 지나지 않았을 때 아버지는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대부분의 추억은 할아버지와 함께 보낸 것들이 대부분이다.우리 집안은 주변에서 대농이라고 부를정도로 농토가 많았기 때문에 어린시절 집안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다. 할아버지도 지역사회에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며 지내곤 하셨는데 손자인 나를 대리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할아버지는 장날이면 주로 강진읍시장을 다니곤 하셨는데 그럴때마다 나도 함께 따라다니곤 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비포장 도로에 버스는 하루에 1~2번 겨우 다닐까말까 했던
나는 1944년 대구면 백사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고향 강진을 지키며 살아오고 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이듬해인 1945년 무렵 각기병으로 돌아가셔서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아버지는 그때 31세셨는데 대구면사무소에 근무하는 공직자셨다. 이 때문에 어린시절의 기억 대부분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관련된 기억들이 대부분이다.어린시절 우리집은 백사마을에서도 꽤나 부유한 집안이었다. 사람들이 대농이라고 부를 정도였는데 당시 농사 규모가 논 150마지기 정도였다. 집안에서 부리는 일꾼도 5~7명정도 있었다.이때 백사마을은 대략 86
지난해 5월을 시작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의 다섯 번째 주인공이었던 김성우 와보랑께박물관장의 사투리와 민속품이야기가 30편을 끝으로 마무리되면서 여섯 번째로 584호부터 황호용 강진군노인회장이 들려주는 ‘강진체육정치사 이야기’를 연재한다.황 회장은 대구면 백사마을 출신으로 지역에서 역도 선수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은퇴후에는 전남도의원과 강진문화원장 등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직책을 맡아 많은 활동을 해왔다. 현재는 강진군노인회장으로 활동중이다.황 회장은 돌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조부모 밑에서 성장했던 일과 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