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백사마을앞 바닷가 흰 모래사장 지금도 눈에 선해

나는 1944년 대구면 백사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고향 강진을 지키며 살아오고 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이듬해인 1945년 무렵 각기병으로 돌아가셔서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때 31세셨는데 대구면사무소에 근무하는 공직자셨다. 이 때문에 어린시절의 기억 대부분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관련된 기억들이 대부분이다.

어린시절 우리집은 백사마을에서도 꽤나 부유한 집안이었다. 사람들이 대농이라고 부를 정도였는데 당시 농사 규모가 논 150마지기 정도였다. 집안에서 부리는 일꾼도 5~7명정도 있었다.

이때 백사마을은 대략 86~7호정도가 모여살았는데 가구당 최소 5명에서 많은 집은 10명이상까지도 있었기에 약 600여명이 모여사는 큰 마을이었다. 이때 조부모와 부모, 자식까지 3세대가 사는 곳은 기본이었고 4~5세대가 함께 모여사는 집도 있을 정도로 대가족들이 많았다. 

할아버지는 벼농사외에 소도 7~8마리를 키웠다. 소를 팔거나 소와 관련된 물건들을 사기 위해 장날이면 강진읍시장을 찾곤하셨다. 할아버지는 읍시장을 나갈때면 항상 나를 동행하셨다.

이때는 버스가 하루에 1대가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기에 보통은 걸어다녔는데 백사마을에서 강진읍까지 걸어서 약 3시간정도 시간이 소요됐다.

이때 다니던 차들은 목탄차라고 불렀던 차였는데 현재 차에 비해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현재 매자리식당 부근에서 재를 넘어갈때면 차가 오르지 못할때가 많았다. 그럴때면 버스에 탑승했던 사람들이 모두 내려서 차를 밀어 재를 넘어가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적 백사마을에는 아이들도 많았다. 내 또래 아이들만 10여명이 넘었는데 나는 친구들과 마을을 뛰어다니며 놀곤 했다. 손재주가 좋았던 탓인지 만드는 것을 좋아했는데 팽이나 제기 등을 만들어 친구들과 함께 놀기도 했고 땅치기 등 다양한 놀이를 즐기며 뛰어놀았다.

백사마을과 주변 마을에 친척들도 많이 살고있었는데 명절이면 친척집들을 돌아다니며 세배를 하러 다니기도 했고 성묘를 다니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요즘은 가족묘원처럼 한 곳에 모아두는 것이 문화가 되었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남호와 백사 등 대구면 곳곳에 조상들의 묘가 있었기에 성묘를 다니려면 한참 걸어다녀야만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살았던 백사마을은 바다와 접해있는 마을이지만 어렸을 적 배를 갖고 있는 집은 많지 않았다. 마을 앞뜰에 농토가 많았던 탓인지 바다보다는 논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았다.

이때 배를 갖고 있는 집은 약 3~4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주로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거나 바다에 발을 설치해서 삼치나 대구, 문어 등을 잡아 시장에 내다팔거나 이웃들과 나눠먹으며 지내곤 했다.

내가 막둥이삼촌이라고 불렀던 분이 낚시배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나는 삼촌과 그 배를 타며 바다에 나가 낚시를 즐기기도 하며 놀기도 했다. 또 심심할때면 마을 백사장에서 씨름도 하고 친구들과 뛰어다니며 놀곤 했다.

마을이름이 흰백자에 모라사를 써서 흰모래가 많은 마을이라는 의미인데 마을이름처럼 마을 바닷가네느 하얀색 고운 모래들이 많아 경치가 아름다웠다. 모래사이를 잘살펴보면 미처 빠져나가지못한 물고기들이 숨어있는 경우도 있어 이것을 잡고 놀기도 했다.

어린시절을 보냈던 백사마을은 농촌의 모습과 어촌의 모습을 함께 갖춘 북적거리는 마을이었다.<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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