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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대구면 청자도요지를 가다가 옛날 금강휴게소 옆 칠량천이 흘러 바닷물과 만나는 곳을 우연히 들르게 됐다. 칠량 장계리 기수갈고둥 서식지라는 안내간판이 서있고 주위가 산뜻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이제까지 강진에 살면서 이런 곳이 있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이다. 장계리에서 봉황마을로 가는 얼마 전 새롭게 다리가 놓인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기수갈고둥은 바닷물과 하천물이 만나는 곳에 산다고 한다. 사진을 보니 우렁이 를 닮아 보였는데 생태계훼손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 멸종되어가는 생물이라고 한다. 환경청에서 전국의 서식지를 보호하고 있다는 말도 새로웠다.강진의 이곳 칠량 장계리에 기수갈고둥이 서식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에야 알게 됐고 그만큼 강진의 환경이 깨끗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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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8.07.05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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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유배지… 이제는 수려한 경관이 사람 맞는다완도의 북동쪽 섬은 조선시대때까지만 해도 모두 강진현에 속해 있었던 지역이다. 대표적인 유배지역이기도 하다. 고금도나 신지도는 조선왕조실록에 단골로 등장하는 유배지다.완도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신지도로 들어간다. 이 다리가 마량으로 이어지는 길목이 된다. 신지도에는 ‘명사십리(鳴沙十里)’가 있다. 신지도의 명사십리가 ‘우는 모래’란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은 이렇다. 조선시대 왕족 사대부로 관료사회의 부정부패와 시국의 참상을 과감하게 비판했던 이세보. 그가 철종 때 외척 세도일가의 전횡을 논하다가 이곳 신지도로 유배를 오게 됐다. 그는 밤이면 해변에 나가 북녘하늘을 바라보며 유배의 설움과 울분을 실어 손가락이 닳도록 모래톱에 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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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11.1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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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북일면, 영암 시종면등에서 14기 발견신전면과 맞닿아 있는 해남군 북일면 일대는 역사의 보고이다. 위치가 해로의 중심지다. 동쪽으로는 일본, 서쪽으로는 중국으로 이어진다. 고대로부터 당연히 사람들이 많이 왕래했을 곳이다. 이곳은 사방의 바닷물이 합쳐지고 흩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지금도 해산물이 가장 맛있는 곳으로 유명하다.북일면 일대에 고대고분이 집중돼 있는 것도 모두 그런 이유다. 북일면에 전남도지정 고분이 방산리 장고봉 고분, 신월리 방대형고분, 용일리 용운고분, 방산리 독수리봉 고분, 내동리 밭섬고분군등 다섯 개나 된다. 이중에서 단연 관심을 받아 온 것이 방산리 장고봉고분이다. 장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장고봉고분이라고 하고 자라봉고분이라고도 한다. 정확한 학술적 명칭은 전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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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11.06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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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지나 강진유림의 후손들이 남강사 짓고 학문기려주자 가르침 담은 현판 남포에 표착주자와 우암 두분 함께 모셔 1689년 2월 23일 저녁 무렵 83세의 한 노인이 강진에 도착했다. 노인은 조선후기 근대사를 대표하는 최대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우암 송시열 선생이였다. 그는 배를 타기 위해 강진읍 남포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의 목적지는 제주였다. 왕세자 책봉문제로 숙종임금의 진노를 사 제주도로 위리안치(圍籬安置) 귀향을 떠나는 길이였다. 위리안치란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두는 것이다.그런데 다음날 큰 바람이 불었다. 배가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 우암의 아우 송시걸이 현감의 말을 전했다. 선박을 구해 수리할 동안 물맛이 좋은 만덕사로 옮겨 머무르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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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10.09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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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곡백과가 풍요로운 살기좋고인심좋은 고장이란 의미 담겨좋은 강진 만들어 보자는우리 강진사람들의 큰 염원 깃들어 있어 금릉을 통일신라시대 또는 그 이전 강진지역의 한 지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군동면이나 병영면이라고 불리는 소단위 지역명칭을 말하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강진의 지명은 백제시대때 도무군과 탐진현이였다가 통일신라시대때는 양무군으로 소속됐다. 양무군은 강진군 일대와 해남군 일대를 포함하는 행정구역이였다. 물론 기록에 당시의 강진내에 금릉이란 지명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금릉의 위치는 강진읍 신풍마을 뒤쪽이였다는 주장이 있다. 그곳이 1천여년전에 요즘으로 말하면 강진읍내였다는 것이다. 신풍리 뒤쪽 골짜기를 가보면 다랑치논들이 즐비한가운데 여기저기에 돌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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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9.25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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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에서부터 군동까지 금(金)자 지명 큰맥 형성금릉과 어떤 연관 있었을까강진에는 유난히 금(金)자가 붙은 지명이 많다. 이런 지명이 고려시대때 별호로 정해진 금릉(金陵)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금’자가 붙은 지명이 강진을 잇는 큰 맥이라는 시각이 있다. 이를 풀어보자.강진의 북쪽산 월출산 아래에는 금릉 경포대가 있다. 이곳의 물이 흘러 흘러 탐진강으로 유입된다. 우선 금릉경포대의 물은 성전 신풍리에서 무위사쪽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수한다. 또 성전면소재지에서 밤재에서 내려온 물과 다시 만나 작은 하천을 이룬다. 이 강의 이름이 금강천(錦江川)이다. 금강천은 작천으로 내려간다. 성전에는 금당마을이 유명하다. 작천 용정마을은 동음지(冬音志)에 금릉경승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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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9.18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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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릉은 강진을 청자의 성지로 만들겠다는 고려왕실의 의지를 담았을까남송의 수도 금릉, 월주요와 인접지역고려시대, 남송과 교류활발... 금릉은 중국청자의 성지강진을 고려의 청자성지로 만들겠다는 의지있었을 것 금릉의미 여러 가지로 해석가능강진에 금(金)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은 것도 특이한 현상고려시대 왕조가 전국 50여개 지역에 별호를 지으면서 강진(도강)을 금릉이라고 칭한 것은 틀림없이 어떤 의미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설명했듯이 고려 성종임금은 별호를 지으면서 그 지역의 특성을 반영했다. 금릉은 중국 남경의 옛 이름으로 중국의 오랜 수도였다. 그럼 강진은 중국의 수도에 못지 않은 어떤 의미를 가졌던 것일까.시기적으로 몇 가지를 탐색해 보자. 고려성종이 별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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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9.1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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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성종 10년 전국 50여개소에 별호 제정중국 지명 인용한 것 많아... 금릉은 옛 중국의 수도 남경의 옛 이름지역특성 반영해 별호 정해그때 강진의 특성은 무엇이었을까그럼 고려시대부터 사용된 ‘금릉(金陵)’이란 강진의 별호는 왜 사용된 것일까. 별호를 사용한 것은 고려의 시대적 배경과 깊은 연관이 있다. 고려왕건은 태생적으로 두가지 한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나는 지방호족들과의 관계가 약하다는 것이였고, 두 번째는 중국과의 관계개선이 시급했다는 것이다. 고려의 탄생은 통일신라시대 중앙정부의 부패와 이에따른 지방호족들의 세력강화에서 비롯됐다. 왕건도 송도의 호족이였다. 이 때문에 안정적인 국가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지방토호세력과 연대가 필수적이였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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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9.04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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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자, 학교이름, 문화행사등에 광범위하게 사용 1973년 시작된 ‘금릉문화제’ 주민들의 압도적 찬성으로 이름정해강진사람들의 금릉(金陵)에 대한 애착은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난다. 강진유림회관에는 금릉사마안(金陵司馬安)이라는 작은 책자가 전해온다. 1809년(순조 9년) 강진지역 인사들중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나 진사가 된 인사들의 명단을 적은 책이다. 당시 강진의 지명은 도강(道康)이였으나 책이름을 도강사마안이라고 하지 않고 금릉사마안이라고 지었다.임진왜란의 명장 양건당 황대중 장군의 문집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양건당 문집속에 임진왜란당시 강진의 유력인사들이 군대를 일으켜 국왕을 호위하고 조선의 사직을 지키기 위해 뜻을 일이킨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한 부분이 있다. 이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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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8.28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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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사용했던 별호인 듯도읍지라는 의미 강해강진은 어느 소국가의 도읍지였을까금릉(金陵), 이름만 들어도 호사스러워 보인다. 금릉은 강진의 별호(다른 이름)였다. 언제부터 강진이 금릉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왕조 세종실록에 금릉이란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지리지 전라도 나주목에 ‘도강의 별호는 금릉이다’라고 적었다. 도강(道康)은 고려시대 태조 23년(940년)부터 조선 태종 17년(1417년) 강진현이란 이름을 얻기까지 500여년 동안 사용했던 우리지역의 지명이다. 금릉이란 별호가 도강이 태어날때부터 사용됐다면 그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940년은 막 고려청자가 강진에서 생산 되기 시작할 무렵이다. 고려청자는 1200~13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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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8.21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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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올 2월에 극적인 해후황수홍씨, 정민 교수에 전화 “황상자료 몇권 있다”정민교수 깍듯한 예의에 감동... “가져가 활용 후 돌려달라” 자료건네이번 청자축제의 큰 수확중의 하나는 다산탄생 250주년 특별전에 이 일반에 공개됐다는 것이다. 정황계안은 지난호에 설명됐듯이 154년전(1845년) 다산의 아들인 정학연과 다산의 제자인 황상이 두집안이 영원히 잊지 말자며 만들었던 일종의 계책이다. 당시 두부를 만들어 두 집안이 한권씩 나누어 가졌다. 이중에 정씨 집안에 내려오던 한 권은 원본이 한국학 중앙연구원에 소장돼 있었다. 다산연구 학자들은 과연 나머지 한권이 어디에 있을지가 궁금했다. 황상집안에 갔던 한권이 오리무중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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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8.07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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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깊은 역사적 화해 상징 이순신장군은 국가사업으로 ‘성웅’김억추장군 본격적인 조명 있어야현무공 김억추장군은 1618년 1월 23일 7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1577년 무관이 되어 관직을 시작한 후 임진왜란이란 역사상 유례없는 변란을 겪었던 강진 출신의 장수는 그렇게 조용히 고인이 됐다. 후손들은 1781년에 강진읍 영파리에 금강사를 세우고 김억추장군과 이순신장군을 함께 모셨다.금강사에 김억추와 이순신을 함께 모신 것은 김억추장군이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을 도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안내간판에는 설명하고 있다. 금강사 앞에는 두사람의 동상을 나란히 세워 이순신 못지 않은 김억추의 임진왜란 공훈을 느끼게 하고 있다 .두 장군이 한 사당에 모셔지고 나란히 동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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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7.31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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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三星장군으로 명량해전 참전이순신과 미묘한 갈등, 음해기록 많아왜란후 진주목사등 고위관직 두루 섭렵김억추장군의 임진왜란승리 공적 입증김억추 장군은 장흥부사로 재임하던 중 1597년 7월 25일 전라우수사 발령을 받고 해남우수영으로 부임한다. 명랑해전이 벌어지기 딱 3개월 전이었다. 전라우수사는 정3품에 해당되는 벼슬로 요즘 계급으로 중장(쓰리스타) 정도의 위치였다. 통제사인 이순신 장군(종2품)은 대장급이였기 때문에 김억추장군 보다 한 계급 위였다.김억추장군이 전라우수사로 부임했을 때 전라 서남해안 일대는 긴박한 전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경상도에서 밀려온 조선수군이 전라우수영에서 배수진을 쳤다. 조선의 명운이 이곳 우수영의 전세에 따라 좌우될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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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7.24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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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추를 데리고 오라”평양으로 피신떠난 선조 김억추 가장 먼저 찾아1597년 전라우수사 맡으며 이순신장군과 운명적 만남 김억추는 힘쎈 장군이었다. 전형적인 무신의 기질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전설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어릴 때 고향인 작천 박산의 뒷산에서 병영 수인산 정상을 향해 화살을 쏘면 수인산 중턱의 노적봉에 꽂혔다고 한다. 그만큼 활쏘는 기술과 힘이 좋았다는 뜻으로 보인다. 과거에 급제하던 해(1577년) 선조임금이 당시 병조판서이던 율곡 이이에게 김억추의 활쏘는 능력을 시험해 보라고 하자 김억추 장군은 화살 3개를 표적에 정확히 맞혔다고 한다. 그런데 그 표적이 살의 꼬리부분 이었다. 표적으로 화살의 꼬리를 놓았는데 3개를 정확히 그곳에 맞힌 것이다. 이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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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7.1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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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당파싸움을 가장 첨예하게 겪었던 조선시대 무신모함이 많았던 시대... 관직 두루거쳐 청주김씨, 작천 박산서 태어나 1577년(선조 10) 알성무과(謁聖武科· 임금이 성균관의 문묘에 참배한 뒤 개최한 무과시험)에 합격한 김억추(1548~1618)는 훗날 정3품 벼슬인 병마절도사까지 오른다. 또 1615년에는 지금의 국방장관인 ‘증 병조판서’로 추서된다. ‘증(贈)’이란 관직떠난 사람에게 임금이 일종의 명예직책을 내리는 것이다. 임진왜란이란 역사상 유례없는 참변을 몸소 겪은 무신이 병마절도사까지 오르기까지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김억추는 ‘철쇄(鐵鎖)’로 유명한 사람이다.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과 함게 진도 울돌목에 철쇄를 설치해 명랑해전의 승리를 굳히는데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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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7.10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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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조선의 사화(士禍)만큼 잔인한게 없었다강진·해남에 유학의 씨앗 뿌린 금남 최부중국에 표류해 갖은 어려움 극복하고 6개월만에 돌아왔지만1504년 갑자사화에 휘말려 극형...강진 덕호사에 배향탐진최씨 금남 최부(1454~1504)가 강진과 해남등에 유학의 씨앗을 뿌리며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하고 학파를 형성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나주에서 태어났지만 해남의 정씨에게 장가들면서 주로 해남을 근거지로 활동했다고 한다. 최부의 외손자인 대유학자 유희춘은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처가인 해남에서 윤효정, 유희춘 자신, 유계린등을 가르치면서 해남이 확 바뀌었다’고 적었다. 최부가 이 지역에 미친 학문적 영향이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윤효정은 윤행·윤구·윤복 등 3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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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7.03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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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정 강진에 살다 해남으로 이사해남윤씨 반석위에 올려놓아그들은 어떻게 퇴계학문과 연결되나 사림이니 유파니, 서인이니 남인이니 하는 말은 참 복잡한 말로 들린다. 이런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게 당파싸움이요 조선시대를 일관적으로 관통했던 파벌싸움이다.그러나 이들 계파와 유파속에 끈끈하게 유지되어 온 학문의 세계는 조선시대를 지탱해 온 척추같은 것이였다. 그럼 강진이나 해남등과 같은 호남지역 서남해안 지역의 학맥은 어떻게 구성돼 있을까. 서남해안 지역의 학맥을 알려면 우선 호남사림이라는 큰 틀을 봐야 한다. 유학 계보를 보면 올해 탄생 500주년을 맞은 행당 윤복 선생의 위치나 그 주변 사람들의 모습, 퇴계학문이 호남지역에 전파되는 경로등을 파악할 수 있다. 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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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6.26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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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학문뒤에는 아픈 가족생활이 있었다다산도 비슷... 대학자 뒤에 있는 아픈 가족사행당 윤복선생과 그의 후손들이 퇴계학을 호남지역에 전파한 주역으로 알려지면서 퇴계 이황선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퇴계선생은 조선의 주자학을 확립한 학자다. '주리설'을 기초로 삼강오륜의 봉건적 도덕이론을 체계화했다.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퇴계선생의 이미지는 1천원짜리 지폐에 있는 얼굴이다. 퇴계선생의 초상화는 1973년도부터 1천원짜리 지폐에 새겨져 있다.퇴계선생은 34세되던 1534년에 과거에 합격하면서 벼슬길에 오른다. 그러나 퇴계는 애초에 벼슬에 큰 뜻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런저런 관직을 맡아 오던 퇴계는 50세 되던 해에 풍기군수재직중에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15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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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6.1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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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선사, 중국 남종선 총본산 법통이어 건립깊은 가지산 자락 위치... 여순사건, 6.25 고스란히 겪어 장보고가 청해진(828~841)을 설치하고 활동했던 통일신라시대를 전후해서 호남지방에 불교가 매우 성하게 된다. 중국의 불교문화가 주로 남쪽지방을 통해 들어오면서 통일신라시대 불교를 대표하는 구산선문(九山禪門) 사찰들이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구산선문이란 도의의 가지산문, 홍척의 실상산문, 혜철의 동리산문, 도윤의 사자산문, 낭혜의 성주산문, 범일의 사굴산문, 지증의 희양산문, 현욱의 봉림산문, 이엄의 수미산문을 말한다. 이중에서 성주산문, 사굴산문, 수미산문과 봉림산문외에는 나머지 5개 산문이 호남지방에 집중돼 있다. 이 산문을 세운 스님들이 대부분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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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6.1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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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정치적 혼란기 중심 잃지 않은 선비 조선최고 양반촌 안동부사 역임선생의 ‘높은 인품·학문세계’ 반영 흔히 관운이 좋은 사람으로 고건 전 총리를 꼽는다. 61년 23세의 나이에 고등고시에 합격해 만 35세이던 73년에 강원도 부지사가 됐고, 2년 후인 75년에는 당시 최연소로 전남도지사에 올랐다. 이후 전두환 정권때 교통부 장관을 거쳐 농수산부 장관이 됐다.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내던 87년에는 내무부 장관에 올랐다. 97~98년 김영삼 정부의 마지막 총리를 역임했고, 김대중 정부에선 민선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2002년 2월에는 노무현 정부의 초대 총리로 다시 ‘부름’을 받았다. 총리로 재임하던 2004년 국회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에 따라 3월12일부터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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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6.05 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