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락전 우측편의 「선각대사 편광탑비」바로 곁에 있는 무위사 삼층석탑은 「선각대사 편광탑비」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고려초기의 석탑으로 최근 새 건물들이 들어서기 전의 작고 소담스럽던 무위사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 탑이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이어받은 이 탑은 전형적인 2층 기단의 3층 석탑으로 각 부재가 잘 조화되어 균형미를 느낄 수 있는 석탑이다. 여러 장의 장대석을 결구하여 펼쳐 놓은 지대석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층기단 중석이 연결되고 있는데 양면에 우주를 표현하고 중앙에는 탱주 1주 새겨놓았다. 각 면의 우주와 탱주사이에는 비교적 정교하고 세련된 안상이 새겨져 있다. 하대갑석은 전면에 장방형의 판석 1장과 후면에 두 장, 3장의 판석으로 결구되었으며 아랫면은 1단의
강진의 문화재
강진일보
2012.06.05 11:10
-
형미대사의 숨소리 들려오는 듯「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는 신라 효공왕 9년(905) 이후 이곳 무위사에 머무르면서 사찰을 중건하고 널리 교화를 펼쳐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던 선각대사 형미(逈微, 864~917)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고려 정종 원년(946)에 세워졌다.극락보전에서 서편으로 약 3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이 비는 한 개의 돌을 조각하여 사각 네모꼴의 대좌와 귀부를 표현한 위에 비신과 이수를 얹었는데 전면부에만 비문이 있다. 비명은 「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銘幷序」이며, 고려 시대 문신인 최언위(868~944)가 비문을 지었고 유훈율이 구양순체로 글씨를 썼다. 72자 1행에 총 35행으로 기록되어 있다.보물 제507호로 지정되어 있는 선각대사 편광탑비는 비
강진의 문화재
강진일보
2012.05.29 09:39
-
간절한 구도 염원이 낳은 예술 무위사 극락보전의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간으로 닫집 모양의 보개천정(寶蓋天井)을 세우고 그 아래 불단에는 아미타삼존불상을 모셨다. 아미타삼존상은 가운데 아미타불이 있고 그 오른쪽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이 있으며 왼쪽에 보관을 쓴 관음보살이 있는 전형적인 아미타삼존상이다. 양쪽의 두 보살은 각각 바깥쪽 다리를 늘어뜨린 자세를 취했다.이 아미타삼존상의 뒤편 벽에 그려진 아미타삼존도와 거의 같은 양식으로 불전과 불상, 그리고 후불 벽화가 거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보통 법당을 지을 때 먼저 부처를 모시고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 목재나 벽채의 수분이 빠진 후에 벽화나 단청을 올리는 통례로 보아 그림보다 약간 먼저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불상
강진의 문화재
강진일보
2012.05.22 11:28
-
어떤 경계도 없이 절간으로 들어간다일제강점기인 1934년 극락전이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고, 1974년 극락전을 보수하면서 벽면의 벽화들을 통째로 뜯어내어 벽화 보존각에 따로 모시게 되었다가 지금은 성보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위사는 세상 어느 절집보다도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고, 방문객을 반기기도 했던 곳이었다. 우선 큰 도로에서 절집으로 찾아가는 길부터가 여느 한국의 시골마을들과 전혀 다름이 없는 그저 싸목싸목 길가의 온갖 것들과 이야기나 나누며 걷고 싶은 한적하고 평화로운 길인데다 절간과 마을이 이웃하고 있어 어떤 종류의 엄숙함이나 경계심이 없이 바로 절간에 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을 위한 공덕을 쌓기 위한 중창불사를 탓할 마음
강진의 문화재
강진일보
2012.05.15 11:00
-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3번 국도를 따라 강진쪽으로 향하거나 성전면에서 영암쪽으로 향하거나 월남사터와 성전면의 중간 지점에 ‘국보 제13호’라는 입간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3번 군도를 따라 3㎞쯤 가다보면 월출산 동남쪽 능선 자락에 무위사가 있다.무위사는 「무위사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관음사(觀音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고, 그 후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중창하여 갈옥사(葛屋寺)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고려 정종 원년(946)에 선각대사가 3창하고 모옥사(茅屋寺)로 개칭하였다. 조선 명종 10년(1555)에는 태감선사가 4창하고 비로소 절 이름을 무위사(無爲寺)로 고쳤다 한다. 이 사적기는 영조 15년(1739)에 당시의 주지였던 극잠이 절을 보수
강진의 문화재
강진일보
2012.05.08 14:18
-
남쪽으로 가면 마량에 이른다23번 국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강진만을 끼고 남으로 달리는 길에서 보면 강진의 풍경은 순하고 착하게만 보인다. 오른편으로 한 눈에 봐도 큰 파도 한 번 일 것 같지 않은 잔잔한 바다 너머로 도암면의 느릿한 산줄기들이 가뭇가뭇 이어지고, 바다 가운데 모나지 않은 둥근 섬들이 점점이 떠 있다. 허전하게 트이지도 않았고 또 답답하게 막아선 것도 없는 강진만의 바다는 그저 마음을 내려놓기만 하면 오랜 친구처럼 허물없이 안겨든다. 옛날 청자를 굽던 가마터들이 널려있는 대구면을 지나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마침내 마량, 강진 땅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 잡은 항구에 다다른다. 강진읍에서 고금도가 건너다보이는 마량까지 이어지는 23번 국도는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다. 특
강진의 문화재
강진일보
2012.04.25 12:21
-
고려청자에 대한 주된 관심을 청자의 우수성과 예술적 가치에 대한 논의의 차원을 넘어서 ‘왜, 그리고 어떠한 배경 하에서 청자의 명산지로 강진이 부각되었는가?’ 하는 관점에서 문화의 생성과 변화, 발전을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이라는 지리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강진의 청자 발달이 강진 지역이 지니고 있는 지리적 조건과 배경에 연유한 것이었음은 재론할 여지가 없을 것이나, 이러한 지리적인 조건만으로 고려청자 문화가 발생하고 발달할 수 있었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술한 자연지리적인 조건과 함께 그러한 자연적인 조건들을 이용하고 활용할 수 있었던 이 지역의 사람들에 관해서도 고려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간략하게 추측해 볼 수 있는 내용들로는 우선 이 지역의 토기 제작의 기술
강진의 문화재
강진일보
2012.04.17 11:27
-
강진의 고대 유적은 청동기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 주거지로 추측되는 군동면 파산리 유적과 83개소에 약 680여기의 고인돌의 분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고인돌 집단의 세력 기반을 중심으로 한 강진의 고대 문화권은 마한 시대에 이르러 활동 범위가 영산강 유역으로까지 확대된 것으로 여겨지는 데, 이는 영산강 유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 마한 시대의 대표적인 묘제로 알려진 옹관묘가 강진에서도 군동면 호계리 호동, 파산리 금곡, 나천리 시목, 풍동리 풍동·봉산 등지에서 발견된 점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강진은 마한에 이어 백제가 탐라를 복속시킨 무렵인 5세기 후반 경부터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는데 이때부터 강진 지역은 해로를 통한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함께 정
강진의 문화재
강진일보
2012.04.10 11:34
-
“각 마을에 분포돼 있는 요지들이 시대변천을 조용히 말해주고 있다” 전국의 고려청자 가마터의 분포 상 특징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서해안과 남해안 일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전라남북도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부안, 강진, 해남, 고창, 진안, 고흥, 함평, 영광 등지에 360여 개소의 가마터가 집중되어 90% 가량의 요지가 전라남북도 지방에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옛날 고려청자를 굽던 가마터에 대한 관심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부터였으나 강진의 고려청자 요지에 관한 종합적인 지표조사는 해강도자미술관의 조사단에 의해 1991년 8월부터 1992년 2월까지 6개월 간 이루어졌다. 당시의 지표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진의 청자 요지는 대구면 일대의 용문천 좌
강진의 문화재
강진일보
2012.04.03 12:40
-
선의 아름다움과 섬세하고 세련된 문양, 그리고 인간이 이루어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신비로운 색깔의 완벽한 조화로 한국 문화 사상 그 예술적 가치를 널리 인정받고 있는 고려청자는 강진을 대표하는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강진의 문화유적의 대표선수도 마땅히 사적 제68호로 지정된 고려청자 도요지가 되어야 한다. “천하에서 제일 귀하고 값진 것”, “누가 나에게 신에 이르는 길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고려청자를 통해서라고 대답할 것” 등 다양한 찬탄 속에 한국 문화의 진수로써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려청자에 대한 인식은 비단 도예 전문가나 미술사가들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우리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일반화된 상식이기도 하다. 탯줄을 묻은 곳은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인근 장흥 땅에
강진의 문화재
강진일보
2012.03.27 13:37
-
병영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들판을 가로질러 난 작은 도로를 따라 1.5km쯤 가면 하고리와 중고리가 나오는데 이곳이 병영성이 생기기전 옛 도강현의 치소가 있었던 자리이다. 이곳은 강진읍이나 병영에서 영암을 지나 나주-광주-서울로 이어지던 과거의 주요 도로가 지나던 길목이자 병영성의 출입관문이었다. 지금도 병영에서 배진강을 지나 토마치재를 넘는 길을 ‘한길’이라 부르고 있다.면소재지에서 하고리로 연결되는 길 중간 지점의 배진강 옆에는 ‘홍교’라고 부르는 멋진 무지개다리가 하나 있다. 이 홍교는 일명 배진강 다리라고도 하는데, 높이 4.5m, 너비 3.1m, 길이 6.75m의 크기로 장방형 화강석재 74개를 홍예형으로 결구하고 잡석을 채워 보강한 다음 점토로 다리 위를 다졌다. 특이한 축조
강진의 문화재
강진일보
2012.03.20 10:58
-
월남사터 맞은편에 있는 월남저수지를 지나 8번 지방도를 따라 약 2.5km쯤 작천 방향으로 가다 보면 길 왼편 산자락에 남쪽을 향해 1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따뜻한 햇살바라기를 하고 있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마을 왼편에 세 그루의 늙은 당산나무(느티나무) 그늘 아래 마을 사람들의 공동 작업 공간이나 휴식 공간으로 쓰이는 모정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옆에 특이한 모양의 입석상이 하나 서있다.지름이 대략 1.5m쯤 되는 둥근 대좌를 두고 가운데 구멍을 뚫어 높이가 1.2m 가량 되는 돌기둥을 세워놓았다. 둥근 대좌는 세 조각으로 갈라져 있는데 8개의 돌출부를 가진 무늬를 새겨놓았는데 아마도 연꽃잎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돌기둥은 비석 형태를 띠고 있지만 반듯하게 다듬지 않고 울퉁불퉁
강진의 문화재
강진일보
2012.03.13 11:37
-
13번 국도를 따라 동쪽의 누릿재와 함께 영암과 강진을 갈라놓은 풀치재(풀치터널)를 지나서 월출산을 동쪽으로 끼고 돌아 십 여리를 더 내려오면 길 왼편으로는 제법 큼지막한 월남저수지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월남리가 나온다. 월출산의 최고봉인 천왕봉으로 오르는 등반로 입구(금릉은 강진의 옛 이름으로 여름밤의 밝은 달과 계곡물에 비치는 달그림자가 아름다워 금릉경포대라는 이름이 붙었다.)로 더 잘 알려진 곳으로 새로 뚫린 도로로 우회하여 약 300여 미터쯤 올라가다 대나무 숲에서 오른쪽 샛길로 들어서면 탑전마을에 이르게 되고 마을 안에 월남사터가 있다.월출산의 화려한 능선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탑전마을에는 대나무와 동백나무, 그리고 정겨운 돌담에 둘러싸인 월남사터 삼층석탑과 석비가 있고, 한 때
강진의 문화재
강진일보
2012.02.28 15:05
-
월남사터 3층 석탑이 있는 곳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아주 용맹스럽게 생긴 커다란 거북 위에 얹힌 비석이 하나 있다. 월남사를 창건한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을 기리는 비로 알려져 있다. 진각국사는 고려 고종 때 살았으며 스물네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당시 조계산에서 수선사를 열어 선풍을 펴고 있던 보조국사 지눌에게 가서 어머니의 명복을 비는 제사를 지낸 후 머리를 깎고 지눌의 제자가 되었다. 지눌이 살아있을 때 그의 후계자로 인정을 받았고, 1210년 지눌이 입적한 후 조계산 수선사(지금의 송광사에 있던 수행결사)의 제2세 사주가 된 사람이다. 당시 무신정권의 실력자였던 최우가 그의 명성을 듣고 여러 번 초청했으나 오지 않자 그의 아들인 만종과 만전(최항)을 보내 제자로 삼
강진의 문화재
강진일보
2012.02.20 23:30
-
월출산의 화려한 남쪽 능선이 올려다 보이는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탑전마을에 이르면 마을 가운데 돌담과 대나무, 동백나무에 둘러싸인 훤칠하게 잘생긴 탑 하나가 있다.고려시대 세워진 탑으로 탑신이 늘씬하고 우아한 풍모를 지니고 있다. 단층 기단과 1, 2층 몸돌, 각 층의 지붕돌 등 탑 전체가 여러 개의 작은 석재를 맞춰서 만들어져 있어서 모전석탑(模塼石塔)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각각의 석재들이 벽돌(塼)모양은 아니다.탑의 훤칠한 느낌은 높이가 7.4m에 이르는 데다 기단의 폭이 1층 지붕돌 폭보다 좁고 1층 몸돌이 훌쩍 높기 때문이다. 2, 3층의 몸돌은 높이는 같지만 폭만 좁아졌고, 3층 몸돌은 1, 2의 몸돌과는 달리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다.1, 2층은 네 모서리의 우주와 면석이 각각 다른
강진의 문화재
강진일보
2012.02.15 10:37
-
김종명 선생님의 우리고장 문화재병영을 이야기하면서 하멜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나라를 최초로 서방세계에 소개한 『하멜표류기(1668)』는 당시 조선의 생활풍속과 지리, 정치․군사․종교․교육 등을 상세하게 기록해 서방세계에 알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알려져 있다. 하멜 일행은 1653년 8월(효종 4년)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이었던 상선 ‘스페르위르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다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로 들어왔다.이후 1666년 여수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약 14년 간을 우리 나라에서 억류생활을 하게 되는데 제주도와 서울, 남원, 순천 등을 거쳐 이곳 병영에서 7년 간을 머무르게 된다.당초 그가 밀린
강진의 문화재
강진일보
2012.01.31 1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