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8일자 554호부터 연재를 시작했던 사투리와 민속품이야기의 연재가 이번호를 끝으로 마무리하게 됐다. 지금까지 나는 병영면 도룡마을에서 태어나 병영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의 중학교 진학하면서 타향살이를 시작했었다. 결혼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990년 중반무렵부터 와보랑께박물관 운영을 시작했다.고향에서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돈이 되지 않은 박물관을 운영하고 수집품을 비싼 돈을 들여 구입하고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의
나는 2002년부터 2010년까지 8년동안 도룡마을의 이장으로 일하게 됐다. 이장을 맡게 되면서 가난한 농촌마을중 한 곳이었던 도룡마을 주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던중 농촌체험마을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8년동안 이장으로 다양한 사업들을 진행하면서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이는 건강이상으로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뇌졸중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인데 곧바로 광주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정기적인 검진과 함께 약도 복용하게 됐다.이때 한가지를 깨닫게 됐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세상을 떠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
가난한 농촌마을이었던 도룡마을은 와보랑께박물관과 연계하면서 큰 변화를 맞이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체험마을 조성사업이었다.나는 이장으로 일하면서 가난한 도룡마을에 어떻게 하면 새로운 소득원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지난 2009년 강진군의 도움을 받아 문화체육관광부와 농림수산식품부에서 추진했던 ‘문화와 전통이 살아숨쉬는 농촌’ 조성사업을 준비하게 됐다.사업을 준비하면서 쉽지않았지만 사업계획서를 만들고 이를 발표한 끝에 2010년 2월 사업에 최종 선정됐다. 이때 경북 영덕군과 함께 강진군까지 단 2곳이 선정됐다.이 사업은 말그대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병영면 도룡마을. 병영에서도 그리 크지 않은 작고 조용한 마을이다. 마을이 장흥으로 연결되는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보니 교통은 좋지만 마을 주변에 농토가 부족한 마을이었다.농토가 부족하다보니 농사를 짓기도 힘들었고 부와는 거리가 멀었던 마을이었다. 마을 주변에 있는 농경지도 상당부문 다른 마을 사람들 소유로 그들이 농사를 짓고 있어 실제 도룡마을 주민들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이때문인지 마을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상업에 종사하곤 했다.내가 학교에서 정년퇴직을 한 이듬해였다. 2002년
이번호에는 매실을 재배하며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병영으로 돌아온 이후 와보랑께박물관을 운영했는데 학교에서 근무를 하면서 부업으로 과수농장을 운영했다. 과일은 바로 매실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0여년전 처갓집이 광양 매화마을이었는데 어느 날은 봄철에 그곳을 찾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광양 매화마을은 매년 봄이면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으로 인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축제도 펼쳐지는 마을이다.나도 처갓집을 봄에 찾으면서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됐는데 그야말로 그림같은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모
나는 와보랑께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우연한 기회에 사투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투리와 한글로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는 주로 지역을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풍경이 있으면 그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내는 풍경화를 그리곤 했다.주로 병영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렸고 어머니를 비롯한 어린 시절 추억이 생각나는 곳들을 찾아다니며 그림으로 남기곤 했다.이렇게 내가 그린 그림과 스케치북에 소묘로 남겨놓은 작품들을 모아 책으로 펴낼 기회가 생겼다. 화집을 발행했던 것인데 1991년으로 기억한다.화집의 제목은 ‘마음의 옷을 벗고’였으며 내가 어린시절부터
김종일 교수의 아이디어로 사투리를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그림에 사투리를 표현할 것인가였다. 글자를 그림으로 표현해낸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기에 전국의 여러 전시회장을 찾아다녔다.나는 현재 남부현대미술협회라는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데 이 단체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부산과 대구, 전주 등지에서 전시회를 갖는다. 전체 회원들은 100여명으로 적지 않은 단체이며 회원들중에는 추상적은 느낌의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이 많다. 이 때문에 이 곳에서 개최하는 전시회에는 추상적인 느낌의 그림들이 많았다. 나는 이 전시회장을
나는 와보랑께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지만 화가로서 활동도 하고 있다. 나는 주로 일반적인 풍경화보다는 와보랑께박물관의 상징과도 같은 사투리를 그림에 접목시켜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그림은 박물관 홍보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번호에는 사투리 그림을 그리게 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나는 어렸을 때에는 그림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 주변을 다니며 주변 풍경을 스케치북에 담아 그림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 교실 뒤편에 내가 그린 그림이 걸릴때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던 기억도 난다.그림을 그리는
나는 와보랑께박물관을 운영하게 되면서 골동풍을 좋아하는 광주, 전남지역 사람들의 모임에도 가입해 활동하게 됐다. 그곳에는 박물관을 운영하는 사람들외에 일반인들도 많았다.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도 있고 농장을 운영하는 사람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골동품들에 대한 정보 교류를 하곤 했다.이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알게 되면서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 곳에서 사람들과 서로 보유중인 물건을 교환하기도 했고 필요한 물품이 있을 때면 공동으로 시중가보다 저렴하게 구입하기도 했다.와보랑께박물관을 운영하면서도 민속
TV와 라디오 등 여러 가지 방송매체를 통해 와보랑께박물관이 전파를 타게 되면서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다. 그둘 중에서는 물건을 기증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기억에 남는 몇 명에 대해 소개해보고자 한다.이 사람은 전남도교육청에서 장학사를 지내기도 했던 교육 공무원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근무할 때 알게 된 직장동료였는데 어느 날 이분이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방송을 통해 박물관 소식을 접하게 됐다면서 자신도 물건을 기증하고 싶다는 것이었다.이분은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 어느 날 박물관을 찾아왔다. 그가 가져온 물건은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또 한명의 기증자가 있다. 와보랑께박물관에는 군인관련 용품 몇가지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 물건을 기증해준 사람의 이야기다.2017년 2월경이었다. 어느 날 지인들과 외출중이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의 내용은 아들이 모아온 수집품이 있는데 물건들을 박물관에 기증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나는 기증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통화를 하고 바로 그 다음날 박물관으로 1톤 트럭 2대가 갑자기 나타났다. 물건을 어디에 둘까요를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당황했다. 바로 전날 통화했던 기증
조병선이라는 친구의 연락을 받고 서울의 친구집을 방문하게 됐다. 친구의 집은 약 100여평 규모의 단독주택이었는데 주택 곳곳에는 친구가 평생 수집한 수석들이 가득했다. 정확히 숫자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대략 1천개는 넘어보일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다양한 모습의 수석들을 바라보며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친구는 내가 고향에서 박물관을 운영한다는 것을 TV를 통해 보게 됐고 고향을 내려간 김에 박물관을 찾아 구경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고향 주민들과 관광객, 나를 위해서 평생 모은 소중한 물건들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수석의
와보랑께박물관이 TV를 통해 여러차례 방송이 되면서 지역 주민들은 물론이고 나와 인연이 전혀없는 사람들도 기증하고 싶다는 연락이 오게 됐다.한번은 나와 평소에 알고 지냈던 관내 한 면단위 사설우체국을 운영하고 있던 우체국장이 연락을 해왔다. 아마 2000년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체국에서 폐기처분된 오래된 물건들을 창고에서 정리하고 있는데 버리자니 아까워서 나에게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물건을 기부해주겠다는 고마운 마음을 생각해 곧바로 우체국 창고를 찾아갔다. 창고에는 다양한 기계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수표
와보랑께박물관 2층으로 올라서면 전시장 바로 왼쪽 벽면에는 오래된 사진이 하나 걸려있다. 3장의 사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인데 이 사진이 바로 지난호에 설명했던 김흥연 선생이 촬영해 나에게 선물했던 사진이다. 김흥연 선생님은 같은 병영면에 살고 있었기에 자주 왕래하면서 친분을 쌓았던 분이셨다. 내가 와보랑께박물관을 운영하게 되면서 선생님은 나에게 예전에 사용했던 농기구중에서 쓰지 않는 낡은 물건들을 나에게 가져다 주셨고 병영의 예전 사진자료들도 기증해주시기도 하셨다. 박물관 2층에 걸려있는 1968년 병영면 시가지 사진은 귀
와보랑께박물관이 처음 생겨나고 지금까지 운영되기까지 내가 살고 있는 도룡마을 주민들의 도움이 컸다. 처음 주변에서 쓰지 않는 오래된 물건들을 창고에 수집하고 있을 때에는 도룡마을 주민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했고 “쓸때없는 것 뭐하러 모으느냐”며 핀잔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하지만 와보랑께박물관이 정식으로 만들어지고 박물관다운 모습이 갖춰지면서 초창기에는 도룡마을 주민들이 나서서 민속품을 기증해주었고 이는 박물관이 운영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90년대 후반 무렵 내가 민속품과 같은 오래된 물건들을 수집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번에는 내가 컴퓨터를 다루게 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필자는 1947년생으로 7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다. 70대 노인이 컴퓨터를 다루는 경우는 흔치 않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나는 박물관과 관련된 자료와 각정 서류 등을 모두 컴퓨터로 문서작업해서 파일로 보관하고 있다.내가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된 것은 학교에 근무했기에 가능한일 이었다고 생각한다. 70년대 내가 병영국민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한 출향인이 고향 후배들을 위해 학교에 컴퓨터를 기증을 하게 됐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학교에서는 학부형들을 초청해 운
와보랑께박물관이 만들어지고 난후 현재는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박물관을 찾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일이 큰 도움이 됐다.나는 최근에도 매년 3~4회 정도 방송출연 제의를 받고 촬영을 하고 있고 많을 때는 일년에 10여차례 이상 방송과 라디오 출연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다.수십여차례 방송출연 경험이 있지만 아직까지도 카메라가 찾아오면 긴장되는 것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똑같다.수많은 방송출연 속에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KBS 2TV에서 인기리에 방송됐던 스폰지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일이다. 때는 20
우연한 계기로 와보랑께박물관을 만들고 점차 입소문이 나면서 여기저기에서 물건을 가져다 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바로 인근 마을의 주민들에서부터 멀리는 해남, 서울 등에서 기증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당연히 수집물품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는데 문제는 40평 창고가 물건을 진열할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아졌던 것이다. 나 자신도 창고에 들어가 구경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사람들도 박물관을 찾았다가 구경하고 밖으로 나서기도 힘든 지경이었다.더 큰 문제는 좁은 것까지는 좋은데 창고 건물이 재사용 건물이다보니 비만 오면 천장에서 누수가 되는 것이
지난 시간에는 박물관이 탄생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박물관의 이름부터 다소 특이한 와보랑께박물관으로 지은 이유는 우연히 가족들과 찾았던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라고 부산 사투리로 손님들을 불러모으는 시장상인들의 말을 듣는 것이 계기가 됐다. 이 말을 들은 나의 막내딸이 부산사람들의 사투리처럼 전라도 사투리를 인용해 “와보랑께”라고 박물관 이름을 붙여보자는 의견을 반영했다.박물관의 이름에서부터 사투리를 적극 활용했는데 와보랑께박물관은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사투리박물관으로 더 유명세를 타게 됐
창고를 만들고 그곳에 물건을 줄줄이 세워놓은 모습을 보고 한 지인이 ‘박물관 같다’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1997년 무렵에는 병영성 복원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지인의 말을 듣고 병영성이 복원되고 나면 관광객들의 방문이 이어질 것이고 그에 따라 병영에도 볼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관광객들에게 작은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수집품을 모아 박물관 형태로 만들어보자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나는 병영성 복원을 앞두고 볼거리를 준비한다는 마음에 여러 가지 민속품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쓰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