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동료 덕분에 사투리의 중요성 깨달았다

지난 시간에는 박물관이 탄생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박물관의 이름부터 다소 특이한 와보랑께박물관으로 지은 이유는 우연히 가족들과 찾았던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라고 부산 사투리로 손님들을 불러모으는 시장상인들의 말을 듣는 것이 계기가 됐다. 

이 말을 들은 나의 막내딸이 부산사람들의 사투리처럼 전라도 사투리를 인용해 “와보랑께”라고 박물관 이름을 붙여보자는 의견을 반영했다.

박물관의 이름에서부터 사투리를 적극 활용했는데 와보랑께박물관은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사투리박물관으로 더 유명세를 타게 됐다. 사투리를 박물관과 접목하게 된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먼저 나는 사투리나 방언 전문가가 아니다. 사투리와 관련해서 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한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사투리에 빠져들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던 것 같다.

내가 옴천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당시 장흥군 용산면이 고향이었던 사람과 함께 근무하게 됐다. 이 사람은 나보다 5살정도가 많았던 사람이었다. 내가 이 사람을 아직도 기억하게 된 이유는 사투리때문이었다.

평소에도 전라도 사투리를 많이 사용했던 사람이었는데 처음 이분과 대화를 할때 특이하기도 했고 사투리가 심해 학교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박물관의 이름을 ‘와보랑께’라고 짓고 난 후에는 사투리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옛 물건들속에서 사람들이 향수를 느낀다면 말에서는 사투리를 통해 우리의 옛 향수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점을 깨닫게 되면서 우리 마을과 주변을 돌아보자 사투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됐다. 이렇게 가다간 10여년 후에는 사투리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사투리를 보존하고 널리 보급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함께 근무했던 그 분으로 인해 나는 우리 지역에서만 사용하는 사투리의 중요성과 소중함, 가치를 느끼게 됐던 것이다. 이후 나는 공책을 나의 근무지 책상옆에 매달아 놓고 그 분이 사용하는 말을 모두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약 한달정도 그분과 함께 생활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사투리를 기록해나갔고 노트에 기록된 양이 상당히 많아졌다. 내가 사투리를 기록하는 모습을 보고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도 읽어보고 재미있어 하면서 기록되지 않는 사투리를 나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그 외에 자료들은 인터넷을 찾아다니며 사투리를 수집하기도 했는데 사투리를 수집하면서 나 자신도 점점 사투리에 빠져들게 됐다. 그러던 중 우연하게 귀중한 자료를 얻게 됐다. 

어느날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고물을 수집한다는 걸 알고 헛간을 정리하다가 나온 옛날 고서적을 주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 책은 그 분이 해방전후 시기에 교사로 근무하면서 사용했던 책들이었다. 이 책들은 해방전후 시기에 국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책들이 많이 있었는데 나에게는 보물같은 자료들이었다. 

이 책들 속에는 나비박사 석주명씨의 제주도방언집, 표준말 모음집, 한글의 바른말 등이 있었다. 특히 제주도 방언집에는 제주도 방언외에도 전국 각 지방 방언과 비교하는 자료가 있었다. 이 책의 자료들은 모두 정리해서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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