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14일부터 ‘강진청자 이야기’를 주제로 40화에 걸쳐서 해왔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작년 강진일보 창간11주년 특집호부터 연재를 시작해 약 10개월동안 청자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독자들에게 들려주었다.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대구면 당전마을의 어린시절 모습을 시작으로 어렸을 때 배우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야학회를 열었던 일 등 가벼운 소재를 시작으로 우연한 기회에 나의 집 마당에서 발견된 청자기와편을 계기로 청자 발굴작업이 시작됐던 일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청자 이야기가 진행됐다.특히 청자재현사업이 시작되는 과정 이야
1960년대 나의 집에서 출토된 청기와 파편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발굴조사가 시작되면서 강진에서는 청자를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생겼고 1977년 청자재현사업추진위회가 만들어졌고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사라졌던 고려청자는 강진에서 다시 만들어지게 됐다.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50년이상의 세월이 흐르면서 청자를 만드는 방법과 작품들에게 많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 변화는 현재도 계속 진행중이다.재현사업 초기에는 가마가 없었기에 경기도 도자기 제작 업체들의 가마를 보고 가마를 만들었다. 이때 예산이 많
나는 1939년 대구면 당전마을에서 태어나 군대를 다녀온 이후 우연히 발견된 청자편으로 인해 청자를 만드는 도공의 길을 걷게 됐다.많은 사람들중 나와 인연이 깊은 사람으로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있다. 이 사람과는 청자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함께 해오면서 서로 신뢰가 쌓이기도 했고 내가 청자를 만들고 가마터를 지키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격려를 해주고 여러 가지 조언도 해주었던 분이다.정 전 관장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내가 군제대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64년 무렵이었다. 이때 당시 학예관보였던 정 관장과 당시 최
지난호에도 언급했던 세계도자기엑스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나는 나의 집에서 청자편이 발굴된 일을 계기로 청자를 비롯한 도자기를 한평생 연구하고 보다 좋은 품질의 도자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자료도 수집하고 공부를 많이 했다.기초적인 부분을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발굴을 위해 강진을 찾아왔던 수많은 박물관 관계자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며 청자에 대한 것들을 배웠고 도자기를 만드는 기본적인 것들을 연구해서 공부했다. 한마디로 평생 도자기에 대해 연구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이렇게 평생 도자기에 대해 연구해오고 자
나는 어려운 시절을 살아오면서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당연히 도자기에 대해서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우연히 나의 집터에서 청자가 발굴되면서 이 일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청자를 만들고 있다.1977년 강진청자재현사업 추진위원회 시절부터 최근까지 반평생을 강진 청자를 위해 살아왔다. 지금까지 청자를 만들어오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청자 재현을 통해 지역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잇었던 것에 대해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고 있다.1977년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맥이 끊어졌던 청자가 다시 강진에서 생산되면서 강진의 특산품은 청
청자재현사업추진위원회 시절부터 청자사업소에 근무하면서까지 오랫동안 강진 청자를 위해 일해왔다. 많은 군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있었던 좋은 기억, 나쁜 기억들도 많다. 1977년 무렵 강진청자재현사업 추진위원회가 생겼고 그곳에서 나는 간사를 맡아서 일을 했다. 당시 위원들은 강진 지역에서 유명한 지역 유지들이 참여했고 추진위는 군청 소속은 아니고 사단법인 형태로 별도 조직으로 활동했다.나는 간사로서 기획과 예산집행, 여러 가지 심부름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맡아서 했기 때문에 상당히 바쁘게
강진군에는 현재 188기의 고려청자를 굽던 가마터가 존재한다. 고려시대 약 400여기의 가마터중 절반가량이 강진에 있었던 셈이다.대구면 청자도요지는 국가사적지로 보존되어 오고 있는데 나는 청자사업소가 탄생하기 이전인 1964년 무렵부터 도요지 보존과 관리를 해왔다.나의 집에서 발굴작업이 시작되면서 청자에 관심을 갖게 됐고 공부를 하기 위해 이곳저곳 도요지를 다니며 자료조사를 하면서 관리일도 자발적으로 해왔다.이때 도요지를 발굴하고 나서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에 제대로 차단을 할 수 없었고 단지 새끼줄로 들어가지 않도록 설치만 해놓았을
나는 강진청자 사업에 뛰어들면서 여러 가지 기관에도 강연을 할 일이 많았다. 나 스스로도 상당히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임했던 일이었다. 아무래도 강진 청자에 대해 알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강연준비도 나름 철저히 했던 기억이 난다. 오늘 일은 그런 일중 하나이다.때는 2011~2년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라남도경찰청이 광주광역시에 있다가 도청이 이전되면서 전남경찰청도 함께 무안 남악으로 이전을 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 청사 기념 행사를 진행하는데 내부적으로 기념품 선정을 놓고 고민하다가 청자가 선택됐다. 경찰청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홍동화의 주도로 각 분야의 명인들이 모여 일본에서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갖게 된 이후 일본과 교류가 이어지기 시작했다.일본에는 민예사라는 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우리 선조들이 일본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을 상설전시하며 일본에 우리나라 문화를 전파하는 단체였다. 일본과 교류하게 되면서 이 단체와 인연을 맺게 됐다.이 단체의 야나기라는 인물은 한국문화에 대해 일본에 전파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내가 방문했던 2000년대 초반에는 야나기라는 사람의 아들이 단체를 운영하고 있었다.이 곳에 학예연구실장으로 ‘오기’라
제51회 강진청자축제가 많은 관광객들의 방문으로 성황리에 잘 마무리됐다. 올해 청자축제를 바라보면서 예전 일본과 문화교류가 생각난다.때는 2000년 초반무렵이었다. 나는 우연히 칠분야 장인으로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홍동화라는 사람을 알게 됐다.홍동화의 주도로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전국의 명인들을 모아 일본에 우리 문화를 알려보자는 제안을 했다.모임의 이름은 ‘한국 문화의 정수’였는데 민화, 보자기, 소목, 청자 등 각 분야 명인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일본에서 전시회를 갖게 됐다. 전시회는 일본 도쿄에 있던 한국대사관내
오늘 제51회 강진청자축제가 시작된다. 올해 청자축제는 많은 군민들의 기대속에 겨울축제로서 도전하게 된다. 코로나19로 인해 대면축제로는 3년만에 개최되면서 청자를 만들고 있는 도공들도 오랜만에 바쁘게 축제 준비에 나서고 있다.축제장에는 청자전시를 빼놓을 수 없다. 청자전시의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보자. 때는 1960년대 중반무렵이었다. 이때부터 강진 청자는 전국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청자로 인해 강진이라는 지역명이 국민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한 것인데 오늘날로 말하면 상당히 큰 홍보 효과를 누렸던 것이다.이때 발굴작업이 진행되면서 엄청
제51회 강진청자축제 개막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강진에서 청자를 소재로 축제를 개최하는 이유는 역시 강진에서 최상품 고려청자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강진은 맥이 끊어졌던 고려청자를 재현하는데 성공했으며 이는 오늘날 강진청자산업의 기틀이 되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국내 연구진에 의해 이런 정확한 내용이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연구논문을 발표돼 증명된 적이 있었다.전남대학교 김화택 교수는 2002년 무렵 ‘고려청자는 ’친환경 반도체‘’라는 제목
당전저수지 축조 공사 중단으로 이뤄진 10호요지 발굴과정에서 ‘상약국’이라는 글자가 적힌 청자편이 발견됐다.이때 발굴단에는 기쁨의 환호성이 터져나왔었지만 몇 년후 발굴조사 결과를 담은 보고서가 나왔는데 이 책에는 상약국 청자편에 대한 내용이 없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운반과정이나 보관과정에서 누락됐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이처럼 나는 고려청자 발굴에서부터 참여하다보니 국내에서 여러 사람들의 청자 연구에 도움을 주거나 연구 자료를 제공해주었던 일들이 많았다.1964년 강진 청자도요지를 처음 발굴했던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최순우 과장
가마붕괴로 다쳤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됐던 1981년 무렵 대구면 용운리 일대 저수지와 관련된 일이 터졌다. 이 일은 물이 부족해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사가 어려웠던 용운리 일대에 논농사를 위해 저수지를 막기 위해 시작됐다.용운리 저수지 공사가 막 시작됐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지금으로 말하면 문화재청이지만 당시에는 문화재관리국이었다. 문화재관리국에서 전문위원들이 저수지에 있는 도요지를 보존해야 한다는 이유로 저수지 공사를 중단하라는 공문이 내려온 것이었다.이때 공사를 담당했던 농지개량조합은 상당히 난감한 처지였다. 저수지
곧 설 명절이 다가온다. 청자사업소 운영 초창기에는 설이나 추석 명절이면 선물 주문들이 많이 들어왔다. 이때에는 주로 고려시대 작품들을 재현한 매병이나 주병, 상감청자 등이 인기가 많아 주문이 많았다.가격이 비싼편이기 때문에 일반 주민들보다는 주로 큰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람들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주로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용으로 주문하곤 했다. 이때 선물용으로 강진군이나 전라남도에서도 주문이 많았다.이시기에는 강진군에서 중앙부처에 어떤 사업을 건의하거나 요청하러 가기 위해서는 선물용으로 강진의 명물이었던 청자를 들고가곤 했다.
2023년은 강진청자축제가 큰 변화를 시작하는 해이다. 지금까지 여름, 가을철에 개최해왔던 청자축제가 사상 처음으로 겨울축제로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지난해 코로나19로 인해 개최되지 못했던 청자축제는 오는 2월23일부터 3월1일까지 7일간 개최된다.나도 지금까지 오랫동안 청자축제를 경험해왔지만 겨울축제는 처음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대도 되고 우려스러운 부분도 있다.겨울과 관련해서 청자를 생산하면서 기억나는 일이 있다. 1977년 청자재현사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도자기의 기본틀을 만들어 초벌구이 작업을 1977년 진행했지만 가장
지난호에도 이야기했던 강진향토문화연구회 활동에 대해 기억나는 일 몇가지를 더 이야기해보고자 한다.1989년 창립된 강진향토문화연구회는 80~90년대 강진의 향토문화 연구와 발굴을 위해 많이 노력했던 단체였다. 지난호에 이야기했던 마을사를 조사해 책으로 발간했던 일외에 성터조사를 했던 기억도 난다.해안가인 대구면 구수리 남호마을에서부터 장흥 회진까지 상당히 긴 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이 성은 ‘만리성’ ‘마류성’이라고 불렸다고 전해지는 데 이를 조사하기 위해 강진향토문화연구회 회원들이 나섰다.나와 회원들은 대구 남호마을에서
나는 군대 제대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청자발굴과 재현사업에 뛰어들었다. 그정도로 나는 젊은 시절부터 강진의 향토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강진읍내에서 다양한 학술발표가 진행될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해오고 있다.이는 지역 주민들 스스로 내 고장에 있는 문화유산에 대해서 유창하게 설명할 정도로 잘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청자와 향토문화와 강진의 향토사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이런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왔던 생각이었고 다행스럽게도 강진 곳곳에서 나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청
청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흙이 중요하지만 유약을 어떠게 만드느냐도 상당히 중요하다. 흙이 도자기의 형태를 만들기 위함이라고 한다면 유약은 도자기에 선명한 비취빛을 입히기 위한 재료이기 때문에 청자를 만들때는 유약도 흙만큼 중요한 재료이다.나는 재현사업을 진행하면서부터 청자를 만드는 재료에 대한 고민을 해왔다. 발굴당시 알게 됐던 정양모 선생을 비롯한 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구하기도 수차례. 그들은 나에게 “당신 주변에 선생님이 있는데 어디서 찾고 있느냐”라는 답을 들었다.이 말은 청자 가마터를 살펴보면 그 해답을 알수 있다는 말이
고려시대부터 우리 선조들은 청자를 만들어왔다. 청자를 만드는 것은 도공 개개인의 기술과 재능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도자기의 재료가 되는 흙이다. 좋은 흙이 있어야 좋은 빛깔의 청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나도 청자재현사업추진위원회 시절부터 청자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좋은 흙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고려시대 이동수단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마터가 있었던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흙을 채취해 사용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강진에서 물빠짐이 좋지 않고 기름진 땅에 청자의 재료가 되는 찰흙이 있을 것이라고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