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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이 세상의 구원자요 해방자로 오신 예수를 소개하고 한국의 선각자적인 인물을 소개한 세례요한 같은 사람황장로는 항상 까리따스회 수녀원장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시간을 정해 놓고 성경공부를 하러 다녔다. 황장로는 강진약국 뒷 칸에 긴 책상과 의자를 배열하여 ‘다락방’을 만들었다. 이 다락방은 기독교서회가 출간하는 세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매일성경 묵상집이었다. 지금도 나온다. 그는 ‘다락방’ 영어성경공부반을 만들어서 가르쳤다. 공동번역성경과 굳 뉴스 바이블(Good News Bible), ‘영한대조 다락방’(The upper room)이 주 교재였다. 성경을 영어로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참여했다. 필자를 비롯한 다락방 회원들은 1972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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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5.12.31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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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많이 읽기 권장, 영어 성경으로 주변에 영어교육1979년 4월‘부활과 혁명’이라는 제하의 신학논문 기고강진경찰서 정보과는 항상 황호신 선생과 강진약국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주시했다. 민초들은 1970년대 초 김대중 선생이 일본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한국에 끌려왔을 때라든지, 청주교도소에 수감이 되었을 때, 신문에 나지 않은 궁금증을 황선생에게 문의해서 해답을 받아내곤 했다. 황선생은 강진에서 유일하게 언론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양심과 뱃장으로 공안당국의 귀에 들어가면 당시 실정법에 저촉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무척 위험한 수준의 말도 거침없이 토해 내었다. 그의 식견과 판단은 거의 적중했다. 그는 사실과 판단력은 사실과 진실에 바탕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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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5.12.24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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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서 조용히 민주주의의 바람 일으켰던 사람약학대 졸업, 학창시절에 독립운동‘강진약국’70년대 민주인사들의 아지트돈독한 신앙생활, 주변사람들에게 큰 영향끼쳐내고향 강진평야 한복판을 탐진강이 흐른다. 이 강은 영암군 금정면 세류리 궁성산 계곡에서 발원하여 장흥들을 굽이굽이 돌아 나오고, 다른 한 가닥은 작천 방매들 청구를 지나 장흥에서 합수되어, 강진 군동 평야를 가로질러, 이골 저골 아홉 골 물이 모여 구강포라 불리운다. 이 탐진강은 56km를 흘러 강진만을 지나 남해로 나아간다. 그 옛날 탐라국과 인적, 물적 교역이 있었던 곳이 강진이었다. 그 이름을 탐진(耽津), 즉 오늘날 강진읍은 이름도 정겨운 북산, 우두봉, 피파산, 관모봉, 만덕산, 신학산, 서기산에 옹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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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5.12.0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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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구선생 사후 20년만의 첫 시집 발간현구를 살리고 강진의 시 역사를 다시 일으킨 역사정문석, 주전이, 김옥애, 정복상씨 등 편집위원 참여양장 표지에 금박 제목, 당시로서는 최고급 형식500여부 발간, 전국의 대학도서관에 발송현구시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 불러일으켜1970년대 초 강진은 문학의 전성기였다. 사람들은 ‘영랑다방’과 ‘다산다방’에 모이면 담배를 피우며 시를 읖조렸다. 자칭 시인들은 등사지에 인쇄한 펜글씨로된 시를 돌려 읽으며 인생을 이야기하고 청춘을 노래했다. 다방에는 왜 그리 동양화가 많이 걸렸던지 어느 다방에 가나 고급 동양화가 걸리지 않은 집이 없었다. 70년 어느날 이였다. 성요셉여고에서 국어선생님을 하고 있던 임상호 선생에게 6.25때 작고한 현구선생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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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11.26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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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무덤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마라고 당부한 시인1970년 사후 20년만에 첫 시집, 82편 시 실어1992년에는 군립도서관 앞에 시비 건립아담했던 한평생, 그 체취는 지금도 시속에 흐른다 세 차례의 시집 출판 기회를 놓친 현구선생은 강진군청 공무원으로 일하던 1950년, 6.25를 맞았고 그해 10월 3일 오후 지금의 강진고등학교 자리 공동묘지 부근에서 좌익에 의해 46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고 만다. 현구선생은 자신의 죽음을 마치 예상이나 했다는듯이 말년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내 무덤에 오려거든/ 조용히 혼자 오소서// 날새면 찾아와서/ 나와두리 노는 산새// 여러사람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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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11.19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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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했던 현구, 첫 시집 비매품으로 출간 계획생전에 모두 세차례 출판기회결국 책내지 못하고 6.25 맞아 현구선생은 생전에 시집을 낼 기회가 세 번 정도 있었다. 한번은 1936년 시문학사에서 영랑시집에 이어 현구시집을 내기로 하고 영랑이 원고를 가져갔으나 다음해 용아 선생의 죽음으로 출판되지 못했다. 시문학사는 1935년 10월 정지용 시집을 발간한데 이어 1935년 11월 영랑시집을 발간했다. 그 다음 순서가 현구시집이였다. 그러나 그의 시집 발간을 준비했던 기간 중 용아 선생이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현구는 자신의 시집을 1930년도 중반에 발간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고 그의 시를 세상에 알리는데도 실패하고 말았다. 현구로서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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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11.1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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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분가, 강진읍사무소 취직해 직장생활경제적 어려움 큰 짐… 전업작가 되지 못해경제력 바탕 왕성한 활동한 영랑과 큰 대비 그럼 현구는 강진에서 살면서 어떻게 서울에서 발행되는 ‘시문학2호’에 4편의 시를 발표하게 됐을까. 두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현구선생이 시문학 1호를 보고서 자발적인 투고를 해서 게재됐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시문학 창간을 주도했던 영랑선생의 추천으로 이뤄졌다는 시각이 있다. 시문학 2호의 편집후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원고를 보내주신 분들은 많지만 시라는 형식이 가장 쓰기 쉬운 것이니 써 본다는 태도에 가까운 것은 서운일 일이었습니다. 이번에 현구씨의 작품을 처음 실게된 것은 대단한 깃븜으로 녁입니다’시문학 2호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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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11.05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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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선생 “제발 그 쥐어 뜯는 버리장머리 좀 버리랑께”차부진 선생 “영랑과 현구는 나뉘어 질 수 없는 연분”1927년 25세때 결혼 슬하에 3남6녀 둬내성적 성격이였지만 가족사랑 애틋현구선생은 막걸리를 좋아 했다고 한다. 평소에 말이 없고 조용한 그였지만 먹걸리를 몇잔 들이키면 예외없는 행동을 하곤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그냥 멋쩍게 웃어넘기는 그였지만 막걸리 주전자를 놔두고 친구 몇사람과 마주 앉기만 하면 저절로 말이 흘러 나왔다.술이 취하거나 취흥이 오르면 언제나 “나는 바다에 뜬 갈매기 외로운 갈매기”란 말을 입버릇 처럼 중얼거리곤 했다. 그쯤 되면 현구선생 옆에 앉아 있던 친구들은 하나 둘 자리를 옮기기 일쑤였다. 그 이유는 ‘나는 바다에 뜬 갈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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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10.30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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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강진은 문예중흥기, 각종 강연회 풍성조용한 시인 현구는 여전히‘고독을 즐기는 남자’현구선생, 영랑·효암선생들과 문예지‘청구’발간친구근무하는 강진읍사무소에서 등사해 작품 돌려봐 현구 선생은 1923년 일본 유학길에 오르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그리 길지 않은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당시 강진에서는 일본에 유학을 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만큼 향학열이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재정능력이 좋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현구 선생처럼 어려운 처지에 일본에 건너가서 학업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1920년 7월 9일 강진에서는 강진군청년회 주관으로 의미있는 음악회 하나가 열린다. 일본 동경에서 어렵게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강진출신 학생들을 돕기 위해 ‘재동경강진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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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10.22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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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학교 2년 휴학, 배재학당 갈 때도 2년 쉬어영랑선생과 한 살 차이, 학업은 4년이나 늦어져 현구선생은 1918년 강진동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생활기록부에 따르면 초등학교 시절 저학년때 보다는 고학년으로 갈수록 성적이 좋아졌으며, 교과목 중에서도 수신과 국어, 체육, 창가 과목의 성적이 우수했다고 한다. 국어와 창가과목을 좋아한 것은 우연의 일치였는지 모르지만, 그의 시적 서정을 일찍이 보여준 대목으로 보인다.현구선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2년 후인 1920년 서울의 배재학당에 입학한다. 영랑 김윤식 선생이 서울로 올라가 휘문의숙에 입학한지 3년 후였다. 여기서 우리는 현구와 영랑의 인생의 대비를 조금씩 볼 수 있다. 현구와 영랑은 나이가 한 살 차이이지만 초등학교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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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10.15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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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공립보통학교 지금의 중앙초등 전신. 우리나라 사람들 학교 ● 강진동공립보통학교 읍교회 인근 위치, 주로 일본인들이 다녀동공립보통학교 1949년 2월‘강진중앙초등학교’에 통합지금의 강진동초등은 1972년 개교현구 선생의 초등학교 학력과 관련해서 강진보통학교와 강진동초등학교가 등장한다. 이번 기회에 강진읍의 초등학교 역사를 정리해 보자. 강진보통학교는 지금의 강진중앙초등학교를 말한다. 중앙초등학교는 1907년 4월 학교설립 인가를 받고 1911년 6월 공립 강진보통학교로 공식 개교했다. 현구 선생은 강진보통학교의 첫 입학생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강진보통학교는 1941년 강진남공립학교로 이름이 바뀐다.현구선생이 졸업했다는 동초등학교는 지금의 강진읍 동초등학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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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5.10.0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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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11월, 5남 4녀중 셋째 아들로 출생형제들, 의협심 강하고 예술적 재능 뛰어나현구시인에 대한 기록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 사후 20년만인 1970년에야 그의 유고시집인 ‘현구시집’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가 얼마나 역사적으로 어두운 터널속에 있었는지 짐작할 따름이다. ‘현구시집’은 임상호 전 강진신협이사장등이 주도해서 어렵게 내놓은 책이였다. 그러다가 현구시인이 집중 조명된 것은 1995년 김선태 현재 목포대학교 국문학과 교수가 ‘김현구 시 연구’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부터였고, 이후 2000년대 들어서는 지역내에서 현구시인을 알기 위한 다양한 행사(2003년 ‘30년대 시문학사의 샛별 김현구시인의 발자취전’등)가 마련돼 그가 다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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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10.08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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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르던 주민들 우연한 일로 죽임당하기 일쑤한이 한을 낳아 엉뚱한 사람들 피해… 그 위에 현구가 있었다.돌아가신 분들의 인물사를 정리하다 보면 그 사람의 죽음을 다루는게 불가피한 일이지만 현구 선생의 경우 그 글이 길어질 것 같다. 6.25 당시 인민군이 강진을 점령할 당시 벌어진 현구의 죽음은 당시 강진사회에서 전개된 좌익과 우익의 허망하고 슬픈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기 때문이다.현구선생의 인물사 1편이 나간 후 그의 죽음에 대한 의견들을 많이 주셨다. 현구선생이 죽음을 당한지 올해로 65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강진읍에서 80대 이상의 어르신들은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현구가 죽음 직전의 상황을 현장에서 지켜 본 사람들은 극소수일 것이기 때문에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5.09.10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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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중 인민재판 받고 사형당해영랑 김윤식 사망 후 나흘만의‘참변’영랑 김윤식 선생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9월 29일 밤 서울의 내과병원에서 절명한다. 며칠전 피난처에서 맞은 포탄 파편이 사망원인이였다. 그때 강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강진은 이미 8월 1일 인민군들이 점령하고 들어와 강진인민위원회가 활동중에 있었다. 8월 4일 그 유명한 강진읍 장날 인민재판이 열려 우익인사였던 차래진 국민회장과 부회장이였던 배영석 강진읍교회 목사, 황호윤 칠량청년단장등 10명이 현장에서 사형에 처해 졌다. 영랑이 서울에서 죽은지 4일 후인 10월 3일 오후 4시. 40대 후반의 사내가 강진읍 서성리 속칭 낙하정이란 곳에서 주민들 앞에 섰다. 인민재판이 열렸다. 한 사내가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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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9.03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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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게 각인된 어릴적 고향의 추억“그래 정치인이 되어 이런 일을 없게 해보자” 김기삼 전 총장은 자신이 정치에 관심을 가진 이유에 대해 ‘옴천 지명의 신비성과 비밀’이란 글에 다음과 같은 사연을 적었다. 1994년 그가 조선대학교 사회과학대학장을 하던 시절이다. 정치학 교수가 현실정치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광주사범대학과 조선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원광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고 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된 사람이였다.그가 정치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중학교 1학년때인 1950년 9.28 수복 직후였다. 전쟁이 마무리단계에 들어가면서 등교 통지를 받고 학교에 갔는데 성전중학교 뒷산과 운동장 주위에 양민들이 학살되어 수많은 시신들이 여기저기 방치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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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03.10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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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을 발의하고 주도했던 금오스님오늘날 한국불교가 있게 했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후 대처스님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던 불교정화운동 국면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군사구테타를 일으킨 후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당시 비구스님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던 대처스님들의 소송을 이유를 불문하고 취소하게 했다. 대처스님들이 이승만 대통령시절 빼앗겼던 절을 다시 되찾기 위해 4.19혁명 후 여러 가지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를 강제로 취소하게 한 것이다. 당시 법원에 계류중인 소송이 8년 동안 80여건이나 됐다.국가재건최고회의는 불교정화운동의 업적을 인정하고 비구스님들이 중심이 된 통합종단을 출범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대처스님들이 함부로 절 재산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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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6.03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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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체절명의 기로에 선 대처승과 비구승이승만 정권 무너진 후 대처승 유리한 구도사찰 주도권을 놓고 1954년 5월부터 벌어진 비구스님과 대처스님들의 첨예한 갈등은 55년 7월 법원의 한 판결로 중대한 분수령을 맞게 된다. 54년 11월 8일 태고사(지금의 조계사)에 진입해 강제로 간판을 내리고 조계종 중앙종무원 간판을 내건 것에 대해 대처스님들이 불법행위라며 소송을 제기했는데 8개여월의 긴 재판 끝에 법원이 비구스님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법원의 이같은 판결은 조계사를 관리해야 할 주체가 바로 비구스님이라는 것을 최초로 인정하는 것이였다. 비구스님들의 조계사 관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전국의 사찰 관리를 인정한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했다. 반면에 대처승들은 조계사에 대한 기득권을 상실함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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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5.27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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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대통령‘왜색승은 절 떠나라’유시 4차례 발표양측 물러설 수 없는 대립… 한국불교의 큰 전환점 이뤄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5월 21일부터 같은해 12월 17일까지 4차례에 걸쳐 ‘불교정화유시’라는 것을 발표한다. 대통령이 특정 종교에 대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 핵심은 결혼한 스님들은 사찰을 수도승들에게 돌려주고 절을 떠나라는 것이였다.전형적인 종교간섭이었지만, 당시 한국불교는 일본불교에 찌들어 있었고, 자체적으로 이를 정화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200명도 안된 비구승들이 7,000명이 넘는 대처승들을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웠기 때문에 정치적인 힘을 끌어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지금의 서울 인사동 조계
강진인물사
주희춘 기자
2014.05.2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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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색에 찌든 한국불교 바로 세우기 주도전국 비구·비구니 대회 개최, 정화불사 본격화이승만 대통령 ‘정화유시’ 발표비구승 - 대처승 대립각 첨예화 1953년 6월 한국불교 선승들의 본부나 마찬가지였던 선학원의 조실로 추대된 금오선사는 큰 역사적 책임을 맡게 된다. 법정스님등이 거쳐갔던 선학원은 젊은 선승들의 집합체였다. 그들에게 금오선사는 청정수행자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이였다. 조선총독부가 선승들에게 창씨개명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심심산곡으로 들어가 참선수행만을 해 온 금오선사를 젊은 스님들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금오선사는 조선불교의 전통인 간화선의 수행법을 만공선사로부터 전승한 수행자라는 점에서 비구승의 유일한 모범이였다.한편으로 선학원 스님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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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4.22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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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창씨개명 끝까지 거부, 오직 참선 수행에 열중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제의 조선불교 탄압은 매우 심해졌다. 참선을 하는 스님들에게 창씨 개명을 압박했고 선승들에게 조차 ‘황군위문금’을 거두기 시작했다. 일제의 만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국의 주요사찰이 모두 결혼을 한 대처승들이 주지를 맡게 했다. 금오선사에게는 이것이 눈뜨고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였다. 그렇다고 일제에 항거할 힘이 있는 것도 아니였다. 그는 1940년 2월 조실로 있던 직지사를 나와 심산유곡으로 들어가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세상을 등지고 싶었던 것일까.그는 달랑 바랑하나를 들처메고 길을 나섰다. 그가 가는 곳은 강진에서 처음으로 출가했던 금강산 마하연선원이였다. 그러나 경북 김천에서 금강산까지 찾아가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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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4.04.15 1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