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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강진읍이 읍으로 승격된지 88주년이다. 강진읍은 1937년 7월 1일 승격됐다. 그 전에는 강진면이었다. 강진읍 승격은 굉장히 빠른 것이다. 규모면에서나 모든게 강진의 두배라는 해남. 지금도 해남읍의 규모는 강진읍 보다 훨씬 크지만 해남면이 해남읍으로 승격된 게 1957년이다. 강진읍 보다 20년이나 늦다.영암면은 1973년에야 읍이 됐다. 강진읍 보다 장장 36년이나 늦은 시기다. 그나마 장흥읍이 1942년, 완도읍이 1943년으로 조금 일찍 했지만 그래도 강진읍을 따라오지 못한다.일제강점기에 읍 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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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4.04.26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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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준석 선장을 만난 것은 2007년 8월 7일이다. 세월호 사건이 2014년 4월 18일 일이니까 참사 7년 전이다.강진과 제주 사이 고대뱃길을 한창 취재할 때였다. 그날 아침 완도항에서 추자도행 배를 탔다. 완도를 출발해 추자도를 거쳐 제주도로 가는 600톤급 온누비호였다.배가 출발한 후 승무원을 통해 선장과의 인터뷰를 요청했다. 강진과 제주 고대 뱃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추자도 뱃길을 알아야 한다. 선장의 경험담이 필요했다.잠시 후 키가 크고 마른편인 한 남자가 나왔다. 선장이었다. 이름은 이준석. 당시 나이 63세.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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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4.04.19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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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읍 송정마을은 일명 자래부리라 부른다. 자라의 부리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국회의원이 두명이나 배출됐다. 강진에서 국회의원이 두명이나 나온 곳은 자래부리 마을이 유일하다. 2024년 4월 10일, 너무나도 조용한 국회의원 선거날, 옛 기록을 들춰 보며 흥미를 돋워본다. 최근 도암 용문사 요사체 수리과정에서 건축비 기부 기록이 발견된 김성호 민의원이 자래부리 출신이다. 대수로 치면 3대 국회의원이다. 3대 국회는 강진군선거구(제18선거구)에서 5명이 출마했다. 변호사 출신이면서 자유당 공천을 받은 김성호 후보가 당선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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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4.04.11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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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만개한 까치내재를 올라가면 전남생명과학고 목장이 있다. 옛 강진농고 목장이다. 이 목장은 1983년에 만들어 졌다. 필자가 강진농고 3학년때다.그해 여름방학이 끝나자 마자 1천여명의 강진농고 학생들이 이곳으로 등교하며 목장 조성 작업을 했다. 그때 강진에 딱 하나 있던 우주관광의 버스가 학생들을 실어 날랐다.작업 도구라야 톱과 낫이 전부였다. 작업을 독려하기 위해 곳곳에 대형스피커를 달아 라디오를 틀어 주었다. 그러던 9월 어느날이었다. 오후 라디오 오락프로 가요가 들려 오던 마이크에서 갑자기 긴급속보라며 뉴스가 나왔다.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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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4.04.06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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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개막되는 전라병영성 축제는 역사축제다. 전라병영성이란 역사적 유물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가 전해진다. 병영성 축제가 풍성할 수 있는 이유다.병영의 풍부한 문화유산이 전해지기까지 송은 김흥연(1918~2008)선생이 있었다. 그가 남긴 기록들이 전라병영성과 그 주변의 문화를 번창하게 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선생은 1908년 병영면 백양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전후사, 6. 25전쟁, 4.19혁명, 5ㆍ16쿠테타, 유신정권, 군부독재, 5.18, 6.29등 격변의 현대사를 겼었다.45년 동안 교직에 몸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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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4.03.28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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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시작되는 전라병영성 축제때는 꼭 적벽천에 가 볼 것을 권하고 싶다. 한골목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박동마을 회관이 있고, 동쪽으로 난 좁은 골목을 따라가면 적벽천이다. 이곳에 전라병영성에 근무하던 병사들이 만든 인공수로가 있다. 적벽천은 병영의 동쪽을 흐르는 병영천의 일부 구간이다. 길이가 대략 200m 정도 된다. 이곳을 적벽천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적벽밑을 지나는 하천이기 때문이다. 바위에 ‘赤壁淸流(적벽청류)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사람이 앉아 놀기 좋은 바닥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적벽천의 흐르는 물을 바라 보며 시문을 읊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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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4.03.22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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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그러니까 해방직후 지역유지들이 기금을 모아 강진읍에 금릉중학교를 설립했다. 금릉중학교는 1953년 3월 금릉여자중으로 변경해 여성 교육의 중심지가 됐다.하지만 1960년대들어 재정난이 왔다. 금릉여자중학교는 1962년 3월 사랑의 씨튼수녀회가 만든 성요셉금릉학원 재단으로 인수됐다. 미국에 본부를 둔 사랑의 씨튼수녀회가 한국에 수녀를 처음 파견한 것은 1960년이었다. 한국 선교활동의 초창기였다. 그래서 강진 학교의 직원은 모두 미국 현지에서 바로 들어 온 수녀님들이었다. 미국 수녀님들이 강진에 오려는 경쟁은 치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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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4.03.14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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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향교가 있는 강진읍 교촌리 샛골은 이맘때 미나리 수확이 한창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부터’ 샛골에서 미나리가 재배됐다. 강진향교 앞에 미니리가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 춘추시대 이야기다. 송나라의 한 농부가 미나리를 먹어보니 맛있었다. 농부는 미나리를 깨끗이 씻어 곱게 다듬은 다음 임금에게 정성들여 바쳤다. 이렇게 해서 나온 말이 ‘헌근(獻芹· 미나리 근)’이다.정성을 들인 미나리라는 뜻이다. 소박하고 볼품 없지만 마음을 가득 담아 바치는 선물을 의미한다. 헌근지성(獻芹之誠)’이란 말은 임금에 대한 충성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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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4.03.07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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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박물관 윤성일관장 방에 아주 정갈한 글씨가 있다. ‘陶瓷中興’. 도자중흥이란 말이다. 옆의 작은 글씨는 무오년에 정채균 군수가 적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를 풀어쓰면 1978년에 강진군수 정채균이 강진청자의 중흥을 바라는 염원으로 적었다는 뜻이다.정갈하면서도 깔끔하고, 단순하지만 함축적이다. 45년전 강진청자의 발전을 염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 이 네글자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씨는 아크릴에 크게 복제를 해서 사무실 현관에도 걸려 있다.강진군이 고려청자재현사업을 특수시책사업으로 정하고 추진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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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4.03.02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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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반 청자가마 발굴이 본격화 될 때 지금의 청자박물관 주변은 흙먼지만 날리는 삭막한 들판이었다. 지금은 상록수인 녹나무가 박물관 주변을 애워싸고 있다. 겨울 청자축제가되면서 푸르른 녹나무들이 어느때 보다 빛난다.이곳에 처음 녹나무가 심어진 게 1975년이다. 그 사연이 깊다. 장흥 대덕읍에 위행량(80년 초반 작고)선생이살았다. 우연한 일로 일본을 가게 됐다. 녹나무는 일본에서 아주 중요한 나무로 취급 받고 있었다.천왕이 사는 황궁 주변에 녹나무가 둘러 쌓여져 있고, 주요 관광지에는 예외없이 거대한 녹나무들이 자라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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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4.02.23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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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강진읍 기룡리 춘곡마을에 육군 8539부대 3대대가 들어서면서 조용하던 농촌마을이 들썩였다. 3대대는 방위병과 예비군들의 사령부였다. 방위병 제도가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존재하면서 70년대에는 각 읍면에 50여명에 달하는 소대병력이 배치됐다.80년대로 들어서며 규모가 다소 줄어들기는 했으나 면단위 중대본부에 30~40여명이 근무를 했다. 읍면에서 근무하는 방위병이 500여명에 달했다. 이 방위병들이 정기적으로 춘곡마을 3대대에 와서 훈련을 받았다.부대내에는 기동대라고 해서 160여명 규모의 중대병력이 현역 기동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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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4.02.1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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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사태로 기소돼 재판을 받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2019년 2월 47개의 혐의로 기소된 뒤 꼬박 5년 동안 290번에 이르는 재판을 거친 결과라고 한다. 법원의 자체 조사가 2017년부터 시작됐기 때문에 무죄판결을 받기까지 7년이 걸렸다고 봐야 한다. 판결 소식을 듣고 지난해 92세로 작고한 고광철 전 재부산강진군향우회장을 생각했다. 강진읍 보전마을 출신으로 고려대를 나와 부산에서 관광업에 뛰어 들었다. 50여년간 부산시관광협회 일을 하며 협회장을 두차례나 했다.한일간 민간교류에 없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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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4.02.01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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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에 연재되고 있는 김옥애 동화작가의 작품 ‘경무대로 간 해수’에 김재용이란 아이가 등장한다. 1월 4일자 6회분에 나오는 이름이다. 재용이는 거북이 갖혀 있는 기눅굴까지 와서 주인공인 상원과 만난다.붉은 바다거북을 보고 싶어 20리 길을 걸어서 온 소년이었다. 이 소년이 바로 동원그룹 창업자인 김재철 회장의 실제 인물이다. 김재철 회장은 2016년 펴낸 자서전 ‘김재철 평전’에 ‘호기심 많은 소년, 바다를 만나다’란 글에 자신이 어릴적 바다거북을 보았던 일을 적고 있다. 1949년 8월 그러니까 김 회장이 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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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4.01.25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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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갈수록 어디론가 숨어 들고 싶다는 생각이 깊어 진다. 어릴적 다락방 같은 곳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어딘가 숨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 졌다. 그런 곳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경북 상주에 우복동(牛腹洞)이라는 곳이 있다. 소의 배처럼 편안한 지역이라는 곳이다. 먹을 것이 풍부하고,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어디론가 숨고 싶은 사람들은 우복동을 간절히 그리워 했다고 한다.강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상주는 의외로 강진과 연관지어 설명을 듣는 곳이다. 강진사람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외지 사람들은 일제강점기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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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4.01.1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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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탕이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국회가 최근 식용 목적으로 개를 사육하거나 증식 및 도살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 시켰다. 개를 도살하면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이 법안은 공포 후 3년이 지난 날부터 시행된다.개고기 문화의 종말을 알리는 법이 만들어 지면서 새삼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개고기 예찬론이 떠 오른다. 1811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정약용은 흑산도에서 유배중인 형님 약전으로부터 ‘몸이 쇠약해 짐승의 고기를 전혀 먹지 못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는다. 다산은 형님의 건강을 염려한 나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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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4.01.11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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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희망과 성취의 상징이다. 사람들은 큰 꿈을 담아 마을 이름에 용(龍)자를 달았다. 자료를 보니 강진군에 용(龍)자가 붙은 마을이 11개나 된다. 용 자를 넣으려면 최소한 마을 주변의 산이 용을 닮아야 한다. 앞산이 그렇기도 하고 뒷산일 때도 있다. 우물이 있으면 금상첨화다. 사람들은 용솟음 치는 물을 최고로 친다. 우선 올해가 청룡(靑龍)의 해다. 강진에 청룡이란 이름을 가진 마을이 두 곳이다. 도암 덕서리 청룡마을과 대구 청룡마을이 있다. 덕서리 청룡은 마을 앞산이 용을 닮았는데 항상 푸른숲이 무성해서 청룡이라 했다.청룡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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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4.01.0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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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되면 신문을 만드는 사람들은 신년 기획기사를 준비하느라 이런저런 자료를 뒤적인다. 예전 자료에서 새로운 기획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옛 자료를 뒤적이다 눈에 띠는 기사를 봤다. 2019년 그러니까 4년전 마량 하분마을에서 만난 백형배 선생 인터뷰 내용이였다. 그때 필자는 ‘신 강진군계를 따라서’를 연재하기 위해 정확히 20년만에 하분마을을 찾았었다.같은 강진에 사는 마을이지만 안가면 그렇게 세월이 금방 흘러 버린다. 하분마을은 강진군의 동쪽 첫 마을이기 때문에 그곳이 첫 방문지였다. 추운 날이었다. 추운 겨울에 갑자기 가정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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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3.12.28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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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 발행 30주년이 되면서 갖가지 뒷 얘기들이 쏟아진다. 재미있는 것은 것은 당시 강진사람들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란 책을 접하게 된 계기들이다. 두 가지 사례가 있다. 서예가 성산 윤봉전 선생의 경우다. 1993년 가을 어느날이었다. 차를 타고 우연히 강진읍 영랑생가 부근을 지나는데 영랑생가 부근에 관광버스와 차량들이 유난히 많았다. 당시만 해도 지역내 관광지에 사람이 많지 않을 때다. 관광객들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란 책을 가지고 있었다. 윤봉전 선생은 그길로 서점에 가서 책을 구입해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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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3.12.2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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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남호마을의 다른 이름은 성머리마을이다. 만리장성, 마유성등으로 불리우는 석성(石城)이 남호마을 서편 바닷가에서 시작한다.이 성은 건너편 구곡마을의 앞산을 지나 산너머 계치마을을 거친 다음 장흥 대덕을 관통해 회진까지 20㎞ 넘게 이어진다. 성의 끝마을은 장흥 회진의 성갯마을이다. 성과 갯벌이 만나는 지점이라는 뜻이다.성의 흔적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큰 돌덩이들은 바다에 굴 양식장을 만드느라 많이 사용됐다. 다른 구간의 성터도 새마을운동 때 각종 축대를 쌓느라 많이 사라졌다.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은 것은 이 성의 기능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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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3.12.14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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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원로분이 최근 겪은 경험담이다. 여수에 가서 현지 지인들과 식당에 갔다. 삼겸살을 먹다가 채소가 떨어졌다. 그래서 종업원에게 겸손한 목소리로 그랬다. “여기요 지까슴 좀 주세요”그랬더니 이 종업원의 얼굴이 변하고 눈빛이 이상해 졌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냐”며 금방 항의가 들어왔다. 지까슴을 가슴으로 알아 들었던 것이다. 이 원로도 머쓱했다. 그냥 채소 좀 더 달라고 한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분위기를 알아 차린 주변 사람들이 “아 강진에서는 채소를 지까슴이라 한다”고 분위기를 풀어줬다. 종업원도 설명을 대충 듣고는 그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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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23.12.07 1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