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향교가 있는 강진읍 교촌리 샛골은 이맘때 미나리 수확이 한창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부터’ 샛골에서 미나리가 재배됐다. 강진향교 앞에 미니리가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 춘추시대 이야기다. 송나라의 한 농부가 미나리를 먹어보니 맛있었다. 농부는 미나리를 깨끗이 씻어 곱게 다듬은 다음 임금에게 정성들여 바쳤다. 이렇게 해서 나온 말이 ‘헌근(獻芹· 미나리 근)’이다.

정성을 들인 미나리라는 뜻이다. 소박하고 볼품 없지만 마음을 가득 담아 바치는 선물을 의미한다. 헌근지성(獻芹之誠)’이란 말은 임금에 대한 충성으로 통한다.

‘시경(詩經)‘에 ’즐거워라. 반궁(泮宮)의 물가에서 미나리를 캐노라‘는 구절이 있다. 반궁이란 고대 중국의 최상위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의미한다. 반궁은 반수(泮水)에 둘러 싸였다.

반수는 미나리를 키우는 물웅덩이다. 성 주변에 해자를 두르는 것과 흡사하다. 이곳에 미나리를 심어 젊은 유생들이 직접 재배했다. 천자에 대한 충성심을 되새기게 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에도 주변에 반수를 만들어 미나리를 심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성균관에서 공부했던 선비들은 훗날 ‘내가 반궁에서 미나리 캐던 시절에는~’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성균관에서 공부 했던 시절, 가장 젊고 왕성했던 시절을 회고할 때 그런말을 했다. 요즘말로 ‘내가 군대에 있을 때’라든가 조금 올라가서 ‘내가 만주에서 말타고 개장수 할 때’라는 말과 흡사하다고 할까. 

원래 샛골 미나리꽝은 지금의 마을 동쪽에만 있는게 아니라 향교의 남쪽과 서쪽에도 있었다고 한다. 향교를 중심으로 미나리 밭이 둥글게 배치됐던 것이다. 한양 성균관의 형태를 그대로 본 뜬 반궁과 반수의 전형이다. 

다산선생은 미나리를 경제작물로 선호했다. ‘경세유표’에서 ‘미나리를 심었을 경우 그 이익을 벼와 비교하면 두어 갑절 된다’고 평했다. 또 스스로 미나리를 길렀다.

‘다산시문집 제5권’에 ‘금년에 처음 미나리 심는 법을 배워/성 안에서 채소 사는 돈이 들지 않는다네’라고 노래했다. 다산초당 주변은 물이 풍부해서 미나리 재배에 제격이었다.

샛골미나리도 재배하는 주민들이 많이 줄어 갈수록 양이 감소하고 있다. 향교와 연계해 미나리꽝의 원형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았으면 한다.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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