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갈수록 어디론가 숨어 들고 싶다는 생각이 깊어 진다. 어릴적 다락방 같은 곳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어딘가 숨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 졌다. 그런 곳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경북 상주에 우복동(牛腹洞)이라는 곳이 있다. 소의 배처럼 편안한 지역이라는 곳이다. 먹을 것이 풍부하고,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어디론가 숨고 싶은 사람들은 우복동을 간절히 그리워 했다고 한다.

강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상주는 의외로 강진과 연관지어 설명을 듣는 곳이다. 강진사람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외지 사람들은 일제강점기때 민족상권을 지킨 곳은 강진과 상주뿐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무슨 뜻인가. 

조선시대부터 상업이 발달한 강진은 개화후 중국인이 짜장집을 내지 못한 전국 유일한 곳으로 통한다. 화교가 없다. 세계시장을 평정했다는 중국상인들이다. 그들은 강진시장만은 뚫지 못했다. 그만큼 강진 사람들이 향토 시장을 지키는데 철저했다.  

상주는 일본인이라면 이를 가는 곳이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이 승세를 확실히 굳힌게 1592년 4월 상주전투였다. 이곳에서 조선주력군 800명이 완패했다. 일본군은 1만5천명이 넘었다.

상주전투의 패배로 경상도 지역이 완전히 적의 수중에 떨어졌고, 곧바로 충주가 뚫렸다. 이런 역사를 가진 상주 사람들은 일본인들을 대대로 미워했다.

여기에 상주도 강진처럼 일찍이 상업이 성했다. 상주상인들은 쌀과 누에고치, 곶감 등 이른바 삼백(三白) 특산품으로 전국을 누볐다. 일제때 일본 상인들이 침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상주가 강진과 함께 민족상권을 지켰다는 말을 듣는다.

엊그제 상주의 우복동에 갔다. 우복동으로 가는 길은 소의 내장을 따라가는 것 만큼이나 복잡하고 험했다. 길이 끝나는 곳에 우복동이 있었다. 

강진도 우복동이 있을 법 하다. 강진읍의 주산이 우두봉이다. 소 머리가 있다면 소 배가 있을 것이다. 군동 내동마을에 대대로 내려오는 소형국이 있다. 마을 서쪽에 눈에 해당하는 우목샘이 있고, 소가 풀을 먹는다는 목동이 있다.

송아지를 키웠다는 독곡이재도 있다. 소의 배에 해당되는 몸채가 내동마을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이 태어나 자랐으니 그만하면 우복동이라 할 수 있을까. 몸을 숨길수 있는 우복동이 그립다.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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