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 도움으로 80평 2층규모 건물로 증축했다

우연한 계기로 와보랑께박물관을 만들고 점차 입소문이 나면서 여기저기에서 물건을 가져다 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바로 인근 마을의 주민들에서부터 멀리는 해남, 서울 등에서 기증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당연히 수집물품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는데 문제는 40평 창고가 물건을 진열할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아졌던 것이다. 나 자신도 창고에 들어가 구경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사람들도 박물관을 찾았다가 구경하고 밖으로 나서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더 큰 문제는 좁은 것까지는 좋은데 창고 건물이 재사용 건물이다보니 비만 오면 천장에서 누수가 되는 것이었다. 비가 올때면 물이 떨어져 바닥에 고이는 문제가 발생했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비만 오면 걱정이 많았다.

지붕누수를 막기 위하여 내가 직접 지붕에 올라가 콕킹으로 막는 작업을 하여 보았으나 누수를 잡을 수 없었다. 철판 판넬로 만들어진 창고건물이다보니 땜질한 부위가 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물이 새는 곳이 한두곳이 아니다보니 결국 수리를 하지 못하고 세월만 보내야 했다.

어느 날은 비가 내리는 상황에서 서울에서 온 손님들을 맞게 됐다. 당시 청자문화제를 앞두고 강진군에서 서울의 초등학교 교장선생님들을 초대한 것이었다. 교장 선생님들은 방송에서 본 적있다면서 와보랑께박물관을 가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고 군에서는 방문단과 함께 박물관을 찾아왔던 것이다.

당시 상황은 민망할 정도였다. 비가 오는 바람에 창고건물에는 비가 새서 바닥에는 물이 고여있었고 전시품은 제대로 정리가 되지 못하고 복잡한 모습이었다. 악조건속에서 박물관을 둘러보고 방문단을 돌아갔다.

이때 일을 계기로 박물관의 열악한 상황이 지역사회에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어렵게 만들어진 박물관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는 내용이 지역신문에도 보도가 됐고 나도 당시 강진군수에게 박물관의 사정을 이야기로 적어 편지를 보냈다.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강진군에서는 열악한 재정에도 불구하고 재정지원을 해주었고 덕분에 현재 운영중인 2층 규모의 건물을 무사히 지을 수 있게 됐다.

군의 도움으로 박물관다운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됐기 때문에 나 자신도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박물관다운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사투리와 예전 민속품들에 대한 자료를 최대한 확보했고 관광객들이 찾아오면 친절하게 안내하고 설명까지 직접 해주기도 했다. 

방문객들은 꾸준히 이어졌지만 아무런 소득없이 박물관을 운영하기란 너무 힘들었다. 이에 새로운 소득원을 발굴해야겠다는 생각해 그동안 수집해놓았던 사투리를 잘 정리해 책으로 엮어 판매를 하기도 했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는 고민 끝에 해남 땅끝에서 해양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 관장님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게 됐다. 그분은 나에게 박물관은 몇 년하고 싫다고 그만두는 사업이 아니고 내가 죽더라도 누군가 계속되어야 하는 사업이라는 의미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셨다.

박물관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지역사회에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운영비정도 비용을 받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이때부터 성인 1천원 어린이 500원, 청소년 800원이라는 최소한의 입장요금을 받기 시작했다.<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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