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풍경과 어머니의 추억 시로 적어 등단했다

나는 와보랑께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우연한 기회에 사투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투리와 한글로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는 주로 지역을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풍경이 있으면 그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내는 풍경화를 그리곤 했다.

주로 병영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렸고 어머니를 비롯한 어린 시절 추억이 생각나는 곳들을 찾아다니며 그림으로 남기곤 했다.

이렇게 내가 그린 그림과 스케치북에 소묘로 남겨놓은 작품들을 모아 책으로 펴낼 기회가 생겼다. 화집을 발행했던 것인데 1991년으로 기억한다.

화집의 제목은 ‘마음의 옷을 벗고’였으며 내가 어린시절부터 모아놓은 소묘와 그림 등을 모아 책으로 엮어낸 것이었다. 이 작품은 한글과 사투리 그림은 없었고 단순 풍경 등이 주를 이뤘다.

이때 화집에 넣을 작품은 대부분 그냥 그림 자체만을 수록했으나 마지막 3편정도 그림은 공간이 남아있어 글을 작성해 적었다. 이때 3개 작품은 ‘농부의 하루’ ‘우리 엄니’ ‘다 떠나고’ 였다.

나는 그림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글로 표현해 적었고 이는 그대로 화집에 담겨져 책으로 만들어졌다.

이때 화집을 만들었던 출판사에서는 내가 그림과 함께 수록할 글을 보고 시적으로 작가의 마음이 잘 담겨있다고 칭찬을 하며 시를 본격적으로 써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이때 내가 학교에서 근무할 당시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한 교사가 어느 날 시인으로 등단을 했다. 등단했던 곳이 바로 ‘동양문학’이라는 잡지였다.

이 시기에 나는 내가 직접 출판한 화집 몇권을 들고 학교 교직원들에게 나눠주었는데 그 곳에 적은 나의 글을 보고 시인으로 등단한 동료가 시인으로 등단해보아라고 재차 권유를 하는 것이었다. 

새롭게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그림에 이어 시에도 도전해보기로 마음을 먹고 화집에 수록했던 시를 조금 더 다듬고 몇편 더 시를 작성해 약 3~4편정도를 ‘동양문학’이라는 잡지사에 보냈다.

운이 좋았는지 나는 작품이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할 수 있게 됐다. 이후 나는 강진에서도 문학회 활동도 하기 시작했다.

작천출신 수필가였던 장생주 작가와 함께 누리문학회에 가입해 문학회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에는 강진문인협회에 가입해 이 곳에서 현재까지도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다. 

풍경화를 그리다가 사투리와 한글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시보다는 그림에 조금 더 치중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약 10편정도는 새로운 시를 쓰고 있으며 그중 일부는 강진문인협회 문집에 수록해 매년 회원들의 작품과 묶어서 작품집도 펴내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시인으로 등단한 이후인 지난 2003년 나는 책 한권을 펴냈는데 ‘와보랑께’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사투리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사투리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는 책이 있다면 박물관 관람객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사투리를 모아 설명해놓은 책을 만들게 됐다.

이 책에는 전라도 사투리를 적고 그 의미를 적어놓은 사투리 사전과 같은 형태의 책자였는데 이 책 뒤편에 바로 내가 쓴 시를 함께 수록했다. 

‘와보랑께’라는 책은 지역 주민들에게도 나눠주고 박물관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판매를 하기도 했다. 책을 받아본 지역 주민들도 의외로 시에 대한 반응이 좋아 자신감을 갖게 됐던 기억이 난다.

이 책 발간을 계기로 나는 약 5년전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가입해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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