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보다 큰 키에 학교 선배들이 배구부로 스카웃했다

8살의 나이에 대구국민학교에 입학했고 6.25전쟁 직후였지만 큰 불편함없이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마을에서 뛰어돌던 것처럼 다양한 놀이를 하며 친구들과 뛰어놀곤 했다.

내가 특히 좋아했던 것은 운동회였는데 운동회를 할때면 가장 신이났던 기억이 난다. 여러 가지 종목이 있었지만 내가 특히 좋아했고 잘했던 것은 달리기와 던지기였다. 달리기는 거의 경기를 할때마다 1등을 놓치지 않았을 정도로 잘했고 던지기도 나를 따라올 친구들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어렸을때부터 운동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외가쪽 피를 많이 물려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초등학교 시절은 운동도 잘했고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구국민학교에서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다.

6년내내 학업 성적도 좋았고 달리기나 던지기 등 운동회에서도 1등을 놓치지 않을 만큼 훌륭하게 학교 생활을 했다.

이렇게 초등학교 6년 생활을 마치고 14살이 되던해애 중학교에 진학을 하게 됐는데 학교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광주에 살고 있던 사촌형제들을 따라 광주서중학교에 입학시험을 보게 됐다.

사촌형제들은 광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에 당시 명문중학교였던 광주서중학교에 입학시험을 봤던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대구국민학교에서는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보기좋게 시험에 불합격하고 말았다. 이때 나보다 더 뛰어난 애들이 많구나를 절실히 깨달았다. 이때 사촌형제들은 모두 시험에 합격했다.

광주서중 입학시험에 실패한 나는 강진중학교에 입학해 학교를 다니게 됐다. 이때 강진중학교는 현재 중학교 건물이 있던 자리에 강진농고 건물이 있었고 그 뒤에 가건물형태로 중학교 건물이 붙어있어 중고등학교가 같은 부지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때 학교에 교장 선생님도 한분이셨고 교감 선생님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각각 한분씩 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등학교는 그래도 건물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중학교는 가건물형태로 바닥도 흙으로 되어 있을 정도로 열악했던 시설이 기억에 남는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고등학교 선배 한명이 찾아왔다. 박주동이라는 선배로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이때 이 선배도 180㎝이상의 키에 덩치도 좋았는데 배구부활동을 하고 있었다. 중학교 입학 당시 나도 174~5㎝정도로 키가 큰편이었다. 1학년에서 가장 컸던 것 같다.

신체조건이 좋았던 탓인지 배구부 선배가 나에게 같이 배구부 활동을 해보자고 제안을 해온 것. 이때만 하더라도 전남도내 학교에서는 배구부가 많았다. 각 지역마다 학교에서 대부분 배구부를 운영할 정도였다. 

중학교때 나는 집이 멀었기 때문에 강진읍에 살고 계셨던 숙부님 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됐다. 이때 숙부님 집은 현재 강진읍교회 뒤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지금도 그 집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숙부님은 자식들이 많았는데 나에게는 사촌형제들이다. 이들은 모두들 공부를 잘했다. 서울대, 이화여대, 전남대 등 당시 명문대학에 다닐 정도였다.

내가 숙부님게 배구부를 하고 싶다고 말하자 숙부님은 당연히 공부를 해야한다며 걱정을 하셨지만 집의 가족들은 크게 반대는 하지 않으셨고 큰 어려움없이 운동을 할 수 있었다. 

이때는 중고등학교 배구부가 함께 훈련을 했다. 훈련장소는 강진농고 정구장 중앙초등학교에서 연습을 하기도 했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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