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한창이던 51년 대구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움을 모르고 바다와 들로 뛰어다니며 철없이 놀았던 나는 집안에서 농사일을 도와주던 일꾼들과 자주 들에 나가곤 했다. 당시에 적게는 5명에서 많을때는 7명정도 일꾼들이 있었는데 그분들과 들에서 나는 주로 논의 새를 쫓는 일을 했다. 이때는 새가 벼를 쪼아먹는 경우가 많아서 이를 쫓기 위함이었다.

이 시기가 6.25 전쟁 직후였기 때문에 이때 들에서는 새를 쫓고 있는 나는 날카로운 죽창을 든 여러명의 청년들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이들은 동네 주변을 돌아다니며 치안활동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사람들은 들에서 새를 쫓고 있는 나에게도 위험하니 빨리 집으로 들어가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또 바닷가에는 많은 경찰들이 배를 타고 내려와 모여있는 모습도 자주 목격했던 기억도 난다.

이렇게 전쟁속에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다행스럽게 나의 집은 가족들이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전쟁속이었지만 나는 8살이 되던해에 대구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이때 1학년이 2개반이 운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반에 대략 50여명정도였으니 100명이상의 친구들이 입학했었다.

나는 대구국민학교에 입학햇지만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의 아버지는 고금국민학교를 다녔다고 집안 어르신들에게 전해들었다. 아버지가 학교다닐 무렵에는 대구와 마량면에 초등학교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초등학교가 대구초등학교보다 약 13년정도 먼저 세워진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버지가 고금초등학교에 다녔다는 사실을 보면 중앙초등학교보다 먼저 고금에 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찌됐든 나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당시 대구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집안에서 막둥이 손자로 응석받이로 자랐던 나는 전쟁이 한창이었지만 학교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즐겁게 놀았던 기억이 난다. 

학기초에 담임 선생님이 급장을 선출하게 됐는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어 내가 손을 들고 자진해서 맡겠다고 해서 급장을 하게 됐다. 이때 시작된 급장은 학교를 졸업할때까지 이어졌다.

이때 학교 건물은 일제강점기 시절 지었던 나무건물이었다. 현재 대구초등학교 본관 건물이 있었던 자리에 일제강점기 시절 지은 판자를 이어붙여 만든 목조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건물에 교실은 대략 4~5칸정도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주로 고학년들이 수업을 했고 교실이 부족했기 때문에 운동장 남쪽 부근에 간이형태로 목조건물을 세웠고 그곳에서 나를 비롯한 저학년들이 공부를 했다. 밖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지만 나는 그런 상황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편하게 학교를 다녔다. 운동장에서 주로 친구들과 뛰어놀았는데 땅치기와 딱지치기 등을 하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특히 나는 어려서부터 바닷가와 들을 뛰어다녔던 탓인지 운동에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운동회를 할때면 달리기와 던지기 등에서는 거의 매번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였다. 초등학교때부터 시작된 운동의 재능은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이어졌고 역도 선수 생활까지 이어지게 된 계기가 됐던 것 같다.

나의 운동재능은 어머니쪽에서 물려받은 것 같다. 나의 외삼촌이 이때 도암 신기마을에 거주하셨는데 그분은 당시에 키가 180㎝가 넘으셨다고 한다. 특히 운동을 잘하셨는데 도암면에서 축구를 잘하기로 유명하셨고 육상종목중 하나인 투장 실력도 좋았다고 전해들었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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