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심이 후하셨던 할아버지덕에 집에는 손님이 많았다

나는 어린시절을 대구면 백사마을에서 보냈다. 내가 돌도 지나지 않았을 때 아버지는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대부분의 추억은 할아버지와 함께 보낸 것들이 대부분이다.

우리 집안은 주변에서 대농이라고 부를정도로 농토가 많았기 때문에 어린시절 집안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다. 할아버지도 지역사회에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며 지내곤 하셨는데 손자인 나를 대리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할아버지는 장날이면 주로 강진읍시장을 다니곤 하셨는데 그럴때마다 나도 함께 따라다니곤 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비포장 도로에 버스는 하루에 1~2번 겨우 다닐까말까 했던 시절이었기에 대부분은 걸어서 강진읍까지 다니곤 했다.

걸어서 다니면 약 3시간정도 시간이 걸렸는데 이때만 하더라도 힘든 줄도 모르고 시장에서 즐겁게 놀 생각에 할아버지를 따라다녔다.

또 한번은 강진읍 장날에 나가면서 목탄차를 타고 나가는데 차가 재를 넘어가지 못해 버스에서 내려서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밀어서 재를 넘어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지만 그시절에는 그런 차도 귀했던 시절이었다.

어렸을 때 나의 집안에는 소도 7~8 마리를 키웠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주로 강진읍장이 열리면 우시장을 찾아가곤 하셨다. 할아버지가 우시장에서 소가격을 살펴보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나도 옆에서 따라다니며 소를 구경하기도 했고 주변에서 놀러다니곤 했다.

이때 할아버지는 강진에서 부자였던 차종채, 김충식 선생과 친분이 두터웠다. 읍내에 나올때면 이들 어르신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함께 놀이를 즐기기도 하셨다. 특히 기억에 남는 곳은 바로 김충식 선생의 별장에서 놀았던 기억이다.

현재 강진미술관이 들어선 곳이 예전 김충식 별장이 있었던 곳인데 그 집 가장 뒤편 건물에서 자주 놀곤 했다. 할아버지와 김충식 선생은 그곳에서 골패라는 놀이도구를 이용해 게임을 즐겨하셨다. 

여기서 골패는 뼈로 만든 것으로 마작패처럼 생겼는데 마작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였다. 이 놀이도구를 이용해 할아버지는 친구들과 게임을 즐기셨고 나는 옆에서 구경하거나 심심하면 마당에 나가 뛰어다니며 놀곤 했다.

할아버지는 부자셨지만 인색하지 않고 마을주민들에게도 베풀며 살아가셨던 분이셨다. 삼촌들이 바다에서 투망을 던지면 그물속에 고기들이 한가득 잡혀올라왔다. 

이렇게 고기를 많이 잡은 날에는 지게로 지어나르곤 했는데 큰 것 몇 마리는 집안에서 요리를 해먹기 위해 놔두고 나머지는 모두 마을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마을 넓은 공터에 잡은 물고기를 놓으면 마을 주민들이 자유롭게 가져가기도 했고 이를 이용해 요리를 해서 이웃들과 함께 나눠먹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집안에서 닭과 돼지도 키웠는데 이것도 마을주민들에게 자주 나눠주곤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바다가 풍요로웠고 그만큼 사람들의 인심도 넉넉했던 시절이었다. 요즘은 강진만 바다가 예전만큼 풍요롭지 않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의 할아버지는 어린시절 아버지 대신이었고 참 너그럽고 인자한 어른이셨던 것 같다. 

많이 베풀면서 살아가셨기 때문에 집안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나도 어르신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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