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청자촌 토지매입 시작, 청자축제 개최 근간

제52회 강진청자축제가 10일동안 청자촌 일원에서 열렸다. 나도 여러명의 지인들과 축제기간동안 여러차례 행사장을 찾았다. 축제 첫날과 개막식날 많은 비가 내리면서 관광객들이 찾아올까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우려에 불과했다.

많은 강진군민들과 출향인, 관광객들이 찾아오면서 성황을 이뤘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강진청자축제의 옛 모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내가 어린시절 백사마을과 가까웠던 당전마을과 미산마을 주변은 나의 주된 놀이터이기도 했다. 그곳에 할아버지가 농사를 짓던 논과 밭이 있었고 현재 고려청자박물관이 있는 뒤편 야산도 집안 소유 땅이 많았기 때문에 집안 어른들이나 일하는 사람들을 자주 따라다녔다.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청자를 볼 수 있었다. 일단 60년대 무렵만 하더라도 현재 청자촌 일대는 건물은 없고 논과 밭만 있는 허허벌판에 불과했다. 물이 부족했던 곳이었기에 논보다는 밭이 많았다.

당연히 현재 박물관이나 다양한 개인요 건물들도 없었다. 황무지라고 볼 수 있었던 이 곳이 바뀌게 된 것은 청자재현 사업이 이뤄지면서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때 청자재현사업이 시작된 이후 강진군에서는 청자사업화를 위해 밭들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이때 내 기억속에 군청 신입 직원들이 땅을 구입하기 위해 돌아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때 평당 약 1천원에서 1천500원정도에 밭들을 군에서 매입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60년 중후반 무렵이었던 것 같다. 이때도 많은 땅을 한번에 구입하지는 못했던 것 같고 시기별로 조금씩 구입해 넓혀나갔다.

이때 밭뿐만 아니라 예전 이용희 선생의 집터 부근 뒤편으로는 당시에 야산이었다. 이 곳 일대도 집안소유 땅이었기에 집안 일꾼들과 나무를 하러 자주 놀러다녔다.

어른들은 나무를 자르거나 모았고 나는 주변을 뛰어다니며 여러 가지들을 모았다. 이때 땅에서 주웠던 것들중에서는 청자파편들이 많았다. 그만큼 지천에 널려있었다.

이때 이 일대에는 무덤들도 많았는데 70년대 이후부터 일부 무덤들이 도굴당하기도 했다고 전해들었다.

아마도 강진군에서 청자재현에 성공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청자에 대한 값어치가 어느 정도 인식되기 시작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도굴꾼들이 가마터가 있었던 이 일대 개인 무덤들도 도굴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청자재현에 성공하고 청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던 1973년 무렵 금릉문화제라는 이름의 오늘날 축제가 시작됐다. 이때 강진읍내에서 행사가 치러졌다. 이때만 하더라도 청자에 대한 군민들의 자부심이 커질때였다.

인구가 많았기에 행사가 열릴때면 축제장은 사람들로 발디딜틈이 없을 정도였다. 나도 어린시절 어른들을 따라 축제장을 즐겁게 구경다녔던 기억이 난다.

이후 금릉문화제는 청자산업의 육성을 위해 축제 명칭이 청자문화제로 바뀌었다가 오늘날 청자축제로 자리를 잡았다.

나도 축제추진위원장을 맡아 강진청자축제 발전을 위해 힘을 보탠 사람으로써 오늘날 점차 성장해가는 청자축제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프로그램도 점차 다양해져가고 있고 이제는 겨울철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 전국을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많은 군민들의 참여속에 강진청자의 위상을 높이는 청자축제가 더욱 더 성장하길 기원해본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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