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마을 돌담은 날마다 날마다 속삭인다

돌멩이를 하나하나 쌓아 담장을 만들었다
40~50년 전의 10%만 남아 있지만 장관 

 

오래된 향나무와 돌담이 어우러지는 집이다. 돌담은 집을 고풍스럽게 하고 나무를 수려하게 한다. 월남마을은 원래 돌이 많아서 돌을 처리할 방법으로 돌담을 쌓았다고 한다. 
오래된 향나무와 돌담이 어우러지는 집이다. 돌담은 집을 고풍스럽게 하고 나무를 수려하게 한다. 월남마을은 원래 돌이 많아서 돌을 처리할 방법으로 돌담을 쌓았다고 한다. 

 

월남마을에 가면 돌담에 눈길이 간다. 마을입구에서부터 왠만한 축대는 돌담으로 쌓았던 흔적이 많고, 조금 마을 깊숙이 들어가면 굽이굽이 돌담으로 이뤄진 골목길이 이어진다.

골목길을 만드느라 돌담을 만든게 아니고, 집의 담장을 돌담으로 만들었는데 이런것들이 이어지면서 돌골목길이 됐다. 다른 마을에서는 구경하기 어려운 오래된 돌담이다. 마을 회관을 지나 다리를 건너 산쪽으로 올라가면 아가자기한 돌담이 펼쳐진다.
 
원래 월남마을에는 작은 돌이 많은 곳이였다고 한다. 집을 짓거나 밭을 만들기 위해 땅을 고르면 돌이 수두룩하게 나왔다. 깊이 파도 돌이 많이 나왔다. 그 돌을 주변에 모아 두었다가 담을 쌓았다. 아마도 월남마을이 서기산 계곡 끝자락에 위치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아주 오래전부터, 산에서 계곡물을 따라 떠 내려온 퇴적물들이 이곳 월남마을 일대에서 쌓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돌들이 하나하나 층을 이루었고, 이곳에 마을이 들어서면서 그것들이 건축자재로 사용됐던 것이다. 100년이 넘은 건축물인 월남마을 서산교회 건물도 외형을 보면 작은 돌멩이들과 시멘트를 반죽해 벽을 쌓은 것을 볼 수 있다.

예전에 비해 많이 사라졌지만 지금도 곳곳에 돌담 흔적들이 많다.
예전에 비해 많이 사라졌지만 지금도 곳곳에 돌담 흔적들이 많다.

 

월남마을 하천을 건너 마을 뒤편으로 조금 올라가면 집단으로 살아 있는 돌담을 만날 수 있다. 돌이 매끄럽고 흰색이여서 돌담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예술작품이란 느낌을 갖게 한다. 

어떤 돌담은 2m에 가까운 것도 있어 집을 완전히 감추고 있는 것도 있다. 이 돌담들은 마치 줄을 잇듯 이리저리 이어지다가 폐가 터를 만나면 집과 함께 쓰러진 담장의 모습이 세월의 허무함을 느끼게 하기도 하고, 다시 사람이 사는 집으로 이어지면 아직 건재한 그 담장의 모습이 시간은 영속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현재 월남마을에 남아 있는 돌담의 규모가 40~50년 전의 10% 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하니까 그 옛날에는 가히 돌담의 마을이라고 했을만 하다. 아마도 70년대 들어 새마을운동이 본격화되면서 현대식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돌담이 많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보통 다른 마을에는 담장을 작은 돌과 흙을 배합해서 쌓아 올렸다. 그런 담장 건축 방식은 부족한 돌을 흙으로 보충하는 방식이었다. 수명도 영구스럽지 못하다. 흙이 빗물에 씻겨 내리기 때문이다.
 

마을 골목길이 돌담으로 이뤄져 있다.
마을 골목길이 돌담으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월남마을은 돌이 많았기 때문에 흙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돌의 표면이 아주 매끄럽고, 모양도 가지 각색이여서 층층이 올려 고정시키는데 제격이었다. 그 옛날 월남마을의 돌담이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면 대단한 자랑거리가 됐을 것이라 짐작된다.

강진에서는 병영의 한골목의 담장이 유명하지만, 그곳은 흙과 돌을 섞어 쌓아 올린 담장이다. 순수한 돌담이 아니다. 돌담은 월남마을의 돌담이 그 역사를 가장 깊게 간직한 곳이라 할만하다.

비록 월남마을 돌담이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이곳을 찾는 외지 사람들은 돌담을 가장 인상깊게 바라보곤 한다. 다른 곳에서 쉽게 구경할 수 없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돌담을 잘 보존해 나가고, 앞으로 단계적으로 복원해 나가면 월남마을의 보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만석 개발위원장은 월남마을을 자랑하는데 있어 돌담을 빼놓아서도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 개발위원장은 “외지사람들이 우리 마을의 아담한 돌담길을 참 좋아하더라.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아쉬운 감정도 많다. 곳곳의 돌담을 잘 보존해왔으면 병영의 한골목 못지않은 큰 관광자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이곳은 집을 짓기 위해 땅을 고르면 돌이 수두룩했다. 그만큼 돌이 많았다. 사람들은 그 돌들로 담을 쌓았다. 그 역사가 수백 년은 이어져 왔을 것이고 역사적 의미도 매우 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주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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