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도, 비래도, 복도, 사후도를 지나 가리포

완도군 신지면 상산에서 찍은 한라산의 모습이다. 2004년에 찍은 사진이다. 멀리 구름위에 떠있는 듯이 살짝 보이는 것이 한라산 정상이다. 옛날에는 눈으로 살피는 목측항해를 했기 때문에  요즘처럼 날씨가 화창할때 강진~제주사이에 항해가 많았다.
완도군 신지면 상산에서 찍은 한라산의 모습이다. 2004년에 찍은 사진이다. 멀리 구름위에 떠있는 듯이 살짝 보이는 것이 한라산 정상이다. 옛날에는 눈으로 살피는 목측항해를 했기 때문에 요즘처럼 날씨가 화창할때 강진~제주사이에 항해가 많았다.

 

10월은 바다의 시야가 가장 좋을 때다. 쌀쌀한 기운이 유입되면서 미세먼지를 밀어 낸다.

이때쯤에 제주도 한라산을 보려면 마량의 봉대산이나 대구의 만경대에 올라가면 된다. 좋은 날씨에 말이다. 예전 사람들은 나침반이 없었기 때문에 목측항해를 했다.

눈으로 주변의 지형지물을 보면서 돛배를 몰았던 것이다. 10월, 11월, 12월은 목측항해에 가장 좋은 시기였다. 그래서 옛 강진~ 제주 항해 기록을 보면 유독 이 시기 항해가 많이 보인다.

이번 인문기행은 조선시대 강진에서 제주도로 가던 항로를 따라 가보자. 조선시대 강진에서 제주도로 가는 일관된 관문은 강진읍 남당포(남포)였다.

몇가지 기록을 소개해 보면 1679년 10월 제주로 들어간 이증(李增)은 남사일록(南槎日錄)이란 책에 남당포를 통해 제주로 들어간 뱃길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증은 조선시대 형조판서를 지냈던 사람이다.

1679년(숙종 5) 10월 불법으로 재물을 탐했다는 전 제주 목사 윤창형과 정의 현감 상인첨의 일을 조사하기 위해 안핵겸순무어사(按覈兼巡撫御史)로 제주에 파견되었다.

안핵사는 조선 후기 지방에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에 이의 처리를 위하여 파견한 임시관직이고 순무어사는 지방에서 변란이나 재해가 일어났을 때 두루 돌아다니며 사건을 진정하던 임금의 특사다. 두 개의 직책을 받아 제주도로 항했던 것이다.

이증은 이때 제주로 가는 과정과 제주의 풍물들을 소상하게 기록한 남사일록을 남겼다. 남사일록의 기록은 조선시대 강진~제주 뱃길을 표기한 기록 중에 가장 구체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 내용을 보자.

‘배가 떠나 10리에 가우도(駕玗島) 지나 5리 가서 비래도(飛老島)를 지나고 또 10리를 가서 복도(伏島)를 지나고 또 10리를 가서 사후도(伺侯島)를 지나고 5리를 가서 완도의 가리포(加里浦)진을 지나 40리를 가서 밤에 백도(白島) 동쪽 기슭에 정박하였다. 오늘은 80리에서 100여 리를 간 셈이다. 이날 밤 달이 밝아 산 아래 외딴 촌에 연기가 피어나고 개짖는 소리가 나는데 경치가 너무 좋았다. 이 지경은 흰모래와 푸른 소나무로 가득하다.’

배가 강진만을 지나는 과정을 마치 영화필름이 재현되듯 그리고 있다. 가우도와 비래도, 복도는 지금의 강진 행정구역이고 사후도 부터는 완도다. 사후도는 완도군 군외면 영풍리에 속하는 섬이고 가리포진은 지금의 완도항 일대다.
 

신전 사초리 앞바다에 있는 복도. 조선시대 배를 타고 제주도에 들어가며 이곳을 지난 선비들이 복도를 기록으로 남겼다.
신전 사초리 앞바다에 있는 복도. 조선시대 배를 타고 제주도에 들어가며 이곳을 지난 선비들이 복도를 기록으로 남겼다.

 

백도에서 1박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정확한 지역은 알수 없다. 완도에 백일도란 섬이 있는데 그곳은 해남 땅끝과 가까운 곳이여서 지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증의 항해는 계속된다.

‘오후에 눈이 내리고 큰 바람 일고 아침에 동쪽으로는 청산도, 서쪽으로는 소안도, 진도, 추자도가 까마득히 보인다. 두 개의 돛을 달고 있다. 낮에 사서도를 지났는데 여기가 바로 제주의 큰 바다이다. 여기서부터 바다는 더욱 넓고 물결도 더욱 높아, 솟았다 가라앉았다 하는 풍파 속에 기둥의 새끼줄을 잡은 사람들이 모두 울타리를 두드려 짐승을 모는 듯한 외치는 소리를 질렀다. 아마도 이곳이 소위 물마루(水宗)일 듯 했다. 바다를 넘으면서 뱃사람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었는데, 뱃사람 전부가 배를 출발해서부터 곳곳에서 기도를 하는데 하루에도 서너 차례 이상 하였다.

동쪽에는 동여서도가 있고, 서쪽에는 대소화탈도(大小火脫島)가 있다. 검은 구름이 서쪽바다에 일어나더니 눈을 날리는 바람이 어지러워지자 뱃속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멀미를 하며 정신없이 쓰러졌다. 그런데도 뱃사람들은 “오늘은 바다를 건너기가 비교적 쉬운 것이다”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제주 큰 바다를 건너기가 어렵다는 것은 헛말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화북 방호소 포구에 정박하였다.’

이증의 항로는 가우도~비래도~복도~사후도~가리포~백일도~사서도~제주도 화북 방호소 포구이다. 좁은 강진만을 지나며 보았던 무인도를 빠지지 않고 거론한 게 인상적이다. 이증의 항로는 남당포에서 제주로, 제주에서 남당포로 오가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진~ 제주항로는 이증의 기록과 함께 백호집(白湖集)의 저자 임제가 갔던 남당포~제주의 뱃길도 소상한 편이다. ‘청초 우거진 골에’란 시조로 유명한 임제는 1577년 과거에 급제하고 제주목사로 있던 부친 임진을 만나러 가기 위해 고향 나주에서 길을 떠난다.

그는 백호집에 나주에서부터 강진에 도착하는 과정, 강진에서 제주에 도착하는 과정을 적고 있다. 임제는 1577년 5월 3일 무안에서 잠을 자고, 이틀후인 5월 5일 영암군 영암읍 구림마을에서 1박을 한다.

이어 5일 아침 구림마을을 나서 강진의 율리란 곳에서 하룻밤을 묶었다. 백호는 다행히 제주로 가는 배에 빨리 오른다. 율리에서 하루를 묵은 후 다음날 강진읍의 청조루에 올라 구경을 하고, 오후에 남당포에서 제주행 배에 올랐다.

'해가 질 무렵 완도를 거쳐 이진(利津)으로 갔으며 이날(7일) 저녁 백도에 들어가 닻을 내렸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날씨가 좋아 백도를 출발했는데 배가 백리 정도를 갔을 때 배가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갔다하기 시작했다. 하늘에 해가 떠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마치 그네를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옆에서 강진사람인 뱃사공이 예전에 일본으로 표류해서 7년 동안 산 적이 있는데 고향이 무척 그리웠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주에서 서풍이 불면 4일 정도면 일본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배는 점점 흔들려 하늘에 떴다 다시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날밤 저녁 간신히 제주도의 조천관이란 곳에 도착했는데, 함께 출발했던 여섯 척의 배 중에 한 척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백호집을 볼 때 임제의 항로는 강진 남당포~이진~백도~조천관이었다. 여섯 척의 배 중 하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어디에서 침몰했든가 표류해서 생명을 잃었을 가능성이 큰 경우다. 그런 경우 역사에는 누가 언제 어떻게 실종됐는지 아무런 기록도 없다.

제주시에 있는 연북정이란 건물은 조선시대 육지에서 들어가는 사람들이 첫 발을 디딘 곳이다. 귀향온 사람들이 북쪽의 임금을 생각하며 큰 절을 하는 곳이여서 연북정이란 이름이 붙었다.
제주시에 있는 연북정이란 건물은 조선시대 육지에서 들어가는 사람들이 첫 발을 디딘 곳이다. 귀향온 사람들이 북쪽의 임금을 생각하며 큰 절을 하는 곳이여서 연북정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렇게 목숨을 잃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조선 21대 영조 46년(1770년) 제주에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기 위해 남당포로 건너오다가 일본으로 표류한 장영철의 ‘표해록’에는 조선 중기 남당포의 역할이 묘사돼 있다.

장영철은 12월 25일 28명의 일행과 함께 제주에서 남당포를 향해 출발했으나 신지도 앞바다~흑산도~일본 유구열도의 “호산도(虎山島)”라는 무인도를 거쳐 완도 청산도에 표류하기까지 장장 12일 동안 망망대해를 헤맸다.

파도에 밀려 청산도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장영철을 포함해 단 8명. 나머지 21명은 표류 중 사망하거나 섬에 표착하면서 수장된 대참사였다. 청산도에서 몸을 추스린 장영철 일행은 주민들에게 남당포로 가는 방법을 묻는다.

아마도 장영철 일행의 목적지가 남당포였을 것이고, 둘째는 제주도로 가는 배를 남당포에서 정확하게 탈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장영철 일행은 1월 14일 고금도와 마량, 칠량을 거쳐 다음날 남당포에 도착했다.

장영철이 남당포의 객점에서 쉬고 있을 때 옆방에서 “바람만 좋으면 소안도에 배를 댈 것 없이 곧장 제주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게 된다. 제주사람들이었다.

잠시 후 서로 제주사람들인 것을 알게 된 이들은 장영철 일행에게 장삿일로 육지에 나왔다가 물건을 모두 팔고 제주로 돌아가려고 순풍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장영철 일행과 상인들의 대화는 당시의 남당포 역할을 몇 가지 전해준다.

 당시에 제주도에서 배를 직접 가지고 남당포로 나와 상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남당포에서 출발하는 배는 중간의 소안도에서 후풍(候風)을 했다는 것이다. 후풍이란 갑자기 바다 날씨가 악화되면 바람을 피항하는 곳이다.

장영철은 남당포에서 김창현이란 사람과 함께 한양으로 과거를 보기 위해 올라가고, 나머지 6명은 다음날 남당포에서 상인들의 배를 얻어타고 제주도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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