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역사 작천양조장 문닫을지도

6월부터 막걸리 생산 법규 대폭강화
박병준 사장“먹걸리는 막걸리일 뿐인데...”

박병준 사장이 한산한 주조장 앞마당에서 옛날을 회고하고 있다. 박사장은 부친으로부터 이어받은 기술 그대로 방식으로 막걸리를 소량 만들고 있다.
70, 80년대 강진에서 가장 유명한 막걸리를 생산했던 60년 역사의 작천주조장이 존폐의 기로에 섰다. 오는 6월이면 양조장 시설조건이 굉장히 까다로워져 이에 맞는 설비를 갖춰야 한다. 각종 위생시설과 저장시설을 갖추는데 약 5천만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작천주조장 박병준 사장은 최근까지 설비보완 공사를 하지 않고 있다. 다음달 말에 있을 식약청광주지사의 정기검사에서 자격미달 판정을 받게 되면 더 이상 막걸리를 생산하지 못하게 된다.

박사장은 “5천만원을 투자해서 그만큼 막걸리가 잘 팔린다면 얼마든지 그 일을 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헛돈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 돈을 투자하기 어렵다”며 “식약청 검사에서 자격이 되면 이대로 하고 불합격 판정을 받으면 그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23년전 부친으로부터 작천양조장을 물려 받았을때 박병준 사장도 작천막걸리도 아주 잘나가고 있었다. 박사장은 그 어렵다는 광주 서중 일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기계공학과를 거뜬히 합격한 수재였다. 졸업후에는 화순군의 명문 동복오씨 집안에서 색시를 맞아드려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박병준 사장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50세 되던 해에 작천주조장을 물려받았다. 그때만 해도 지역사회에서는 서중 일고 출신 장남이 사회경험을 쌓다가 작천양조장을 물려받은 것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강진에서 작천막걸리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작천양조장의 역사는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작천의 부호였던 박병준 사장의 부친세대들이 주조장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때다. 박병준 사장의 큰아버지인 박희권씨가 작천주조장을 처음 설립해 곧바로 큰 형님인 박영권씨에게 주조장을 인계하고 자신은 영암으로 진출했다.

박병준 사장의 부친 영권씨가 작천에서 주조장을 할 때가 막걸리 전성시대였다. 작천막걸리는 물맛이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강진에서 가장 인기있는 막걸리중의 하나가 됐다. 60년대에는 직원이 12명이나 됐다.

그때는 강진세무서에서 관할 지역 주조장들을 대상으로 매년 먹걸리 경진대회라는 것을 열었다. 일종의 품평대회였다. 주조장은 세무서의 가장 큰 소득원이였고, 한편으로 세무서는 주조장의 가장 큰 ‘갑’이였기 때문에 매년 떠들썩한 경진대회가 열렸다.

강진에는 양조장이 각 읍면에 모두 있었다. 강진읍과 성전, 작천, 병영, 도암, 칠량, 대구등 7개 지역은 물론 아직 분면이 되기전이었던 시절에 마량에도 독립 양조장이 있었다. 8개 주조장이 모여서 벌이는 품평회에서 작천주조장이 1등을 휩쓸다시피했다. 그만큼 작천주조장의 막걸리는 강진에서 단연 최고였다.

그러다가 90년대 중반들어 큰 어려움이 닥쳐왔다. 박병준 사장이 본격적으로 작천주조장의 경영을 맡고 나서 10여년쯤 지나고 나서부터다. 9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강진의 주조장들이 줄줄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막걸리 소비가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2000년대 후반들어 먹걸리 소비가 되살아나면서 병영과 도암은 신상품을 개발하는등 소비자의 입맛을 따라기기 위해 여러가지 시도를 했지만 박병준 사장은 전통 막걸리 맛만을 고집했다. 4년전 필자와 인터뷰에서도 박병준 사장은 “젊은층의 입맛에 맞게 여러가지 상품을 개발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물음에 “막걸리는 막걸리인것 뿐이여”라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직원들도 모두 나갔고 최근 10여년 동안 거의 혼자서 주조장을 운영해 왔다. 그 많던 전답도 아이들 교육을 위해 대부분 팔았다. 요즘에는 지병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다. 작천주조장은 다시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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