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일본으로 떠났던 사람들 대거 귀향 행렬

지금의 강진법원 자리에 대규모 귀환인촌
생활환경 열악, 그래도 꿈에 부풀어 귀향

우익중심 강진건국준비위원회, 좌익‘광주화랑단’침탈
1948년 9월 강진건준 좌익인사 중심 재편

윗쪽 사진은 해방전 만주로 이민을 떠나던 조선 사람들의 행렬 모습이다. 아래 사진은 해방 후 일본에서 생활하던 조선사람들이 귀국선에 타고 환호하던 모습이다. 두 사진 모두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사용했다.
해방 직후 일본과 중국등에서 귀국한 사람들을 집단으로 거주시키기 위한 ‘귀환동포’의 집이 지금의 강진중학교 앞 강진법원 자리에 줄줄이 들어섰다. 방한칸과 부엌이 전부였고, 그나마 외장은 헌 판자나 두꺼운 포장을 씌운 집이였다.

이곳에 입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였다. 일제강점기 먹고 살것을 찾아 떠날때도 그랬지만 고향에 돌아왔으나 농사지을 땅 한평이 없는 것은 이들의 여전한 현실이였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사람들이 떠난 고향에서 뭔가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일제강점기때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일제때 일본인들이 대거 밀려 들어오고 수탈정책이 자행되면서 고향에서 먹고 살거리가 없어져 불가피하게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조선을 점령한 후 동양척식주식회사란 회사를 앞세워 일본인 농업 이민자들을 한국 각지에 정착시키는 사업을 추진했다. 이렇게 해서 1917년까지 전국적으로 매년 1천호, 1926년까지는 매년 360호정도의 이민을 받아 1926년까지 9천96호 2만여명의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정착했다. ‘북간도 간다’라는 말도 이때 나왔다. 일본인들에게 토지를 잃은 사람들이 살 곳을 찾아 북간도로 대거 이동했다.  

강진에도 농업이민자들이 꽤 많아서 일본인 이민촌이 만들어졌다. 전남지역에는 26개의 이민촌이 있었고 강진에는 작천과 군동에 일본인 농업마을(이민촌)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동양척식회사 이주민으로 이민을 온 사람들이었다. 군동에는 8호, 작천에는 18호가 살았다. 강진읍에는 상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

이들은 강진에서 살아가며 동양척식회사의 지원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해 50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가 4명이나 됐다. 이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지원으로 지주가 되어 조선민중을 착취 압박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강진주민은 극도의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1922년 5월에는 땅을 잃은 도암 주민 100여명이 일자리를 찾아 한꺼번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기록도 있다.

동아일보 1926년 7월 9일자에는 중국관헌이 조사발표한 자료를 이용해 일본이민에게 밀려서 북만주로 넘어간 조선사람이 6만명에 이른다고 보도하고 있다. 1927년 11월 16일자 동아일보는 북만주 이주민이 연내에 100만명을 돌파할 것이라고 적었다. 만주 이주민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 후반들어 강진에도 북만주 이민열풍이 불어왔다. 강진에도 일본인들이 대거 들어와 농토를 확보하면서 강진의 농민들도 점점 살길을 잃어가고 있었다. 동아일보 1938년 3월 4일자에는 ‘강진에서도 이민을 간다’는 기사가 나온다. 북만주로 이민을 가는 사람이 30호에 달한다고 했다.

지역별로는 강진읍이 3호, 군동면이 10호, 병영면이 11호, 작천면이 6호로 3월 20일경에 떠났다는 보도였다. 또 군동 출신 박기환 선생의 회고록에는 ‘(일제강점기때) 강진땅은 일본으로 보내어지는 곡물의 집결지로서 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주민들은 대개 굶주리는 것이 다반사였고, 일본인들 앞에서 굽신거리며 못난 삶들을 하루하루 이어나갔다’고 적혀 있다.

그런 형편을 뒤로하고 멀리 떠났던 사람들이 조국의 해방소식과 함께 귀환 행렬에 오른 것이다. 그것도 모두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니였고 그나마 고향에 올 여비 정도는 있는 사람들이 일본에서 부산으로 오는 배를 탈수 있었고, 만주에서 평양을 거쳐 개성까지 오는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렵게 고향을 떠나서 어렵게 살다가, 간신히 귀국한 사람들이 지금의 법원 자리 주변에 가건물로 지은 귀환동포의 집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6.25 이후까지 있으면서 외지에서 밀려오는 사람들을 수용했다. 전쟁후에는 북한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그곳을 차지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법원주변은 생활시설이 그렇게 잘 갖춰진 곳이 아니였다. 왜 그곳에 귀환동포들의 집이 지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해방 직후 그곳은 강진읍에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중의 하나였다.

하마보를 통해 강진읍내 하수가 모두 모아져 내려왔는데 그 물이 모두 귀환동포의 거주지가 있는 곳을 거쳐 지나갔다. 공중변소에서 나온 분뇨는 그대로 하마보에서 내려오는 물로 들어갔다.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었기 때문에 오염물질이 오랫동안 흐르지는 않았지만 특별한 정화시설이 없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지은 귀환동포들의 거주지는 위생적으로 불결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강진의 정세도 이것저것 급변하고 있었다. 앞서 기술했듯이 해방 다음날 구성돼 8월 17일부터 가동중이던 ‘강진건국준비위원회’는 대부분 우익들이였다. 이 구조가 며칠만에 심각한 도전에 맞부딪쳤다.

1945년 9월 23일 광주화랑단이란 단체 단원 100여명이 일본도와 엽총등으로 무장하고 강진에 내려와 건준지부를 위협하면서 건준지부를 인민위원회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이과정에서 건준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안식이 강제적으로 광주로 끌려갔고, 치안대장 차부진이 김안식을 데려오기 위해 광주까지 갔지만 봉변만 당하고 돌아왔다.

이런 사태를 겪으면서 강진건준위에서 활동하던 보수적 인사들이 거의 빠져나갔고, 건준지부내에는 좌익인사들만 남아 그해 10월초 차성모를 위원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이렇듯 강진의 인민위원회는 광주화랑단이라는 외압에 의해 좌익인사 중심으로 강제적으로 개편되는 성향을 띄었다.

반면에 다른 지역은 건준에서 인민위원회로의 전환이 좌우익 인사들이 모두 참여하는 공동조직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후세 사가들은 강진의 광주화랑단 사건이 훗날 좌우익의 피나는 투쟁의 시작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강진인민위원회는 지주계급이 아닌 소작농 출신이나 노동운동 출신 등 민중들 가운데서 지도력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됐다.

인민위원장 차성모, 부위원장 최상철, 보안대장 이선웅 외에도, 담당부서는 알 수 없는 김병옥, 윤주웅, 김무삼, 김병규, 김재선, 김종식, 김광우, 서효성, 김덕남, 남주익, 윤길관 등이 활약했다.

차성모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소작농이었다. 그는 강진읍교회 장로로서 해방 후 한독당에 소속돼 있었다. 최상철은 서울에서 고보를 졸업한 이론가였고 김병옥은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하면서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투옥 경험이 있으며, 해방후 입산하여 활동하였다고 한다.  김재선 역시 일본에서 노동운동에 뛰어든 활동가로서 미군정 때 사망했다.

김병균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인민위원회는 무력했다. 인민위원회에 참여했던 사람중에 행정을 접수할만한 인원도 부족했고 인민위원들이 행정실무 경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당시 보수세력의 힘이 완강했던 데다가 인민위원 중 인민위원회를 지도할 만한 인사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초기 인민위원장을 맡았던 차성모가 2개월만에 하차한 것이나 그의 후임자였던 남주일이 1주일 이상을 버티지 못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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