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1월 영등포공장에서 대형화재

정미기 48대, 정맥기 18대 전소 피해

1962년 정부의 조준 사정을 어렵게 피해간 대선제분은 정확히 10년 후인 1972년 또 한차례의 어려움에 봉착한다. 그해 1972년은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메가톤급 핫뉴스가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 5월에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판문점을 경유하여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했고, 7월에는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어 반공방첩밖에 모르던 국민들을 최면상태로 몰고 갔다.

그리고 10월에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며 국회를 해산하고,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서슬 퍼런 ‘10월 유신’의 전주곡이 울려퍼졌다. 이후락 남측 조절위원회 위원장의 두 번째 평양 방문 소식으로 조간신문이 온통 들떠 있던 11월 3일 밤은 날씨도 흐린데다가 음력으로 그믐을 앞두고 있어 서늘한 밤공기는 몹시 차가웠다. 35년 전의 이날 밤에 대해서 대선제분에 몸담았던 임직원들의 기억에 ‘추운 겨울밤’이었다고 일치하는 것은 이런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1972년 11월 영등포 공장 정미공장이 화염에 휩쌓인 모습이다. <사진= 대선제분 50년사>
화재가 난 공장을 다시 지은 새 건물이다. <사진= 대선제분 50년사>
이날 새벽 5시경, 정미공장에서는 정부의 도입 양곡 긴급 가공 시책에 따라 밤새워 야간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압맥기계가 있는 쪽의 천장에서 치솟았다. 정미공장은 제분공장처럼 미세먼지에 취약한 관계로 화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고, 회사에서는 자나 깨나 불조심을 강조하고 있었는데 공장 내부가 순식간에 화마에 휩싸인 것이다.

그동안 군소 정미공장에서는 끊이질 않고 화재가 발생하곤 했으나 서울 시내의 정부 양곡 가공공장 중에서 불이 났다는 연락을 받은 박세정 회장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부리나케 장충동 자택에서 영등포공장으로 밤길을 달려간다. 그가 탄 코티나 승용차는 차남인 박관회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미국의 펜실베이니아대학교 타운대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고려대 기계공학과 및 숙명여대 경영학과에 강사로 나가던 아들은 정미공장의 화재가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분진폭발(Dust Explosion)이라고 해서, 곡물 가루의 미세먼지에 불이 붙으면 대형 폭발사고로 이어진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밀가루와 공기와의 접촉 면적은 매우 넓어서 숟가락 1개에 담긴 밀가루의 전체 표면적이 축구장의 3.7배 정도나 된다고 알려져 있다. 제분공장의 화재는 화학공장에서 불이 난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폭발력이 강한 대형사고의 소지가 있었다.

박 회장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미공장의 함석 지붕에까지 불길이 치솟은 뒤였다. 정미공장의 불길을 잡는 것도 급했지만, 불길이 인근의 소맥분제품창고에 옮겨 붙지 않도록 확산을 막아야 했다.
박 회장은 소맥분 창고 지붕으로 올라가 화재 진압의 진두지휘에 나섰는데, 평소에 목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던 사람으로서는 의외의 행동이었다. 부친의 이런 모습을 난생 처음 목격한 아들은 박 회장에게서 마치 나폴레옹 같은 면모가 느껴졌다고 한다. 다행이 불길이 다른 건물로 번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벽돌조의 정미공장은 외벽만 남긴 채 기계설비(정미기48대, 정맥기 18대 등)까지 남김없이 타버려 건질 게 하나도 없었다. 공장에 붙어 있던 휴게실과 기관실도 전소되었다.

정부 양곡 가공공장에서 화재사고가 발생했을 때, 화재로 인하여 정부 관리 양곡의 소실이 있으면 행정당국으로부터 허가 취소 등의 행정조치를 당할 수도 있지만 화재로 소실된 양곡이 230가마, 화재로부터 구출한 양곡이 150가마여서 서울시 측의 피해는 경미한 편이었다. 정부 관리 양곡 가공의 경우 제분공장처럼 원맥을 미리 확보하여 저장해 놓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서울시에서 보내오는 현미를 백미로 정미하여 다시 서울시에서 지정한 차량편으로 실어나가는 방식이라서 서울시 소유의 저장 양곡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정부 양곡 가공공장에서의 화재사건이라 경찰 감식반까지 나와서 조사를 벌였지만 화재의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 내지 못했다. 변전소를 체크하였을 때 변압기는 이상이 없었고 퓨즈도 나가지 않았으므로 전기 부분에서는 전혀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뒤늦게 의외의 한 곳에서 발화 지점이 발견되었다. 정미공장을 새로 짓기로 결정하고 불에 탄 기계들의 잔해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엘리베이터 승강기의 베어링이 열을 받아서 불이 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국내 제분회사 중에는 유일하게 대형 정미공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원맥 수급 사정으로 제분기가 멈출 때 정미기라도 돌려서 캐시 플라우를 확보하자는 뜻에서 시작한 사업이었다.
서울시로부터 임가공료를 받는 정미공장의 매출은 제분공장에 비해 보잘것 없었지만 정미공장의 존재는 그 이상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박 회장은 우리나라 최고의 정미공장을 새로 짓기로 결정한다. 신축 정미공장은 기존의 242평에서 344평으로 건평 수를 대폭 늘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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