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밴 현장경영… 35년 동안 토요일 공장방문

세상 떠나기 전날까지 병상에 누워
전화보고 챙기며 현장 관리

1973년의 희망찬 새해 아침이 밝아 왔다. 유신정부의 출범으로 인해 나라 안은 서릿발처럼 차갑게 꽁꽁 얼어 붙어 있었지만, 전년도 12월부터 재가동에 들어간 정미공장이 본궤도에 올랐으니 이제 걱정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제분과 정미, 양쪽 공장 모두 탈없이 잘 돌아가고, 국가에 세금 정확하게 내고, 종업원 월급 제 날짜에 지급하고, 그렇게만 하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밝힌 새해 설계였다.

그리고 회사가 생긴 이래 직원들에게 변함없이 강조하는 한 가지가 더 있었으니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말 조심, 행동 조심’이었다. 특히 한 가지 일에 매달리기 시작하면 유달리 집념이 강했던 박세정 회장은 책임경영의 자세를 몸소 실천에 옮겨 직원들에게 솔선수범을 보여주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 4시의 규칙적인 공장 방문이 그것이다.

그가 1964년 2월 29일 전무로 취임하면서부터 시작된 토요일 오후의 공장 순시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 번도 어김없이 계속되었다. 1987년 5월에는 공장 순시 중에 과로로 쓰러져 한 달여 동안 서울대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으나 퇴원하자마자 공장 방문은 다시 속개되었으며, 말년의 건강 악화로 거동이 불편해질 때까지 무려 35년간이나 지속 되었다.

박세정 회장이 60년대 후반 공장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이다. 박회장은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공장현장을 둘러보는 일을 35년 동안 계속했다.
그는 공장에 도착하면 먼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업무·관리·생산·품질 파트의 각 부서장을 수행하여 공장의 안팎을 돌아보았다. 기억력이 비상했던 박회장은 지난 주의 지적 사항이 있었으면 꼭 그 자리에 가서 “그건 어떻게 되었소?”하고 지적 사항의 이행 유무를 확인했다. 밀가루 포대의 위치조차 다른 자리로 옮겨져 있으면 “이번에는 왜 여기 있지?”라며 짚고 넘어갔다. 직원들의 잘잘못이 체크되어도 현장에서 언성을 높이거나 질책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간부들에게 늘 질문을 던졌다.

한 번은 현장에 있어야 할 종업원 한 사람이 제 자리에 없었다. 무심하게 지나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박 회장의 눈은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다음 주 월요일에 공장장으로부터 공장 현황을 유선보고 받을 때 “그 사람 어디 보냈소?”하고 넌지시 묻는다. 그것은 시시콜콜 이유를 알고 싶어서 캐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다음부터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놓는 박 회장의 특유의 화법이었다.

4시부터 시작된 박 회장의 공장 방문은 정해진 코스를 따라 차근차근 공장을 한 바퀴 돌면 6시쯤 끝이 났다. 관리직에 있는 직원들은 이 시각이 되면 전원 대기 자세로 들어가야 했기에, 오랫동안 공장에 근무하다가 퇴직한 직원들은 토요일 오후가 되면 습관처럼 긴장이 된다고 한다.

간부들 사이에서는 토요일이 다가오는 것이 무섭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집안에 결혼식이 있어도 얼른 예식장을 갔다가 박 회장의 타이밍에 맞추어 공장으로 돌아와 있는 것이 마음 편했다는 것이다.

박세정 회장이 60년대 후반 공장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이다. 박회장은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공장현장을 둘러보는 일을 35년 동안 계속했다.
박 회장이 전무로서(1964~975), 또한 사장으로서(1976~1986), 회장으로서(1987~2001),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기 전날까지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전화보고를 챙기며 현장 관리에 집착했던 까닭은 창업동지 한 사람의 남다른 ‘열정’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대선제분의 회장 직제는 1976년 제2대 대표이사 홍종문 사장이 물러나고, 박세정 전무가 제3대 대표이사에 취임하면서 신설되었다. 이때부터는 사장 1명(박세정)에 회장 2명(함형준, 홍종문)이 있는 셈이 되었는데, 편의상 회사 직원들은 이 3명의 호칭을 모두 ‘회장님’이라고 불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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