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94년 대선제분 대표이사 맡아 경영

2001년 2월 5일 84세 일기로 삶 마감
‘신용제일주의’흔들리지 않은 경영이념 확립

박세정 회장은 1976년 2월 1일 대선제분 대표이사에 올라 1994년 1월 31일까지 장장 28년 동안 회사를 이끌었다. 대선제분의 소유구조와 경영형태를 다시한번 되짚어 보면 강진과 장흥에서 행상을 하면서 돈을 모은 박세정 회장은 장흥에 삼성상회라는 수산물 유통업체를 운영했고, 6.25 발발후 부산으로 건너가 김을 수출해 큰 돈을 벌었다.

이를 기반으로 계동산업을 만들고 이후 이득춘, 함성준, 이기종, 홍종문등 4명이 계동산업에 합류하면서 5인 공동 운영체계의 주식회사가 탄생했던 것이다. 병영상인 출신의 박세정 회장과 개성상인 출신의 홍종문 사장이 만나 계동산업이라는 이상적인 동업체계를 이루었다는 특이한 인연도 있었다. 

대선제분 역시 철저한 동업체계였다. 대선제분의 초기 발행주식은 총 10만주였는데 이 주식을 창업동지 5명이 계동산업에서와 똑같은 비율로 나누었다. 박세정과 함형준, 홍종문이 각각 8천주씩을 가졌고, 이득춘과 이기종이 각각 4천450주를 받았다. 이 황금분할은 회사가 존속하는 한 절대 깨져서는 안되고 이들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유지되어야 하는 철칙이였다.

이들은 나이순으로 대표이사를 맡아가며 협동체계를 과시했고 이 과정에서 그 흔한 경영 마찰 한번 없을 정도로 혼연일체가 되어 기업을 경영했다. 창업동지들 중에 제일 나이가 어렸던 박세정 회장은 상무와 전무를 거쳐 제일 창업동지들 중 제일 마지막으로 대표이사를 맡아 가장 오랫동안 대선제분을 이끌었던 것이다.

1976년 12월 10일 박세정 회장이 대선제분의 대표이사가 된 후 큰 변화는 없었다. 박세정 회장은 대선제분 창업 당시 1958년부터 상무를 맡고, 64년부터 대표이사 취임전까지 전무직을 맡으며 사실상 대선제분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박세정 회장 취임후 대선제분의 경영스타일이 바뀌거나 타업종에 관심을 갖는다거나 하는 급격한 변화같은 것은 없었다.

작천면 구상마을 건너편 야산에 있는 박세정 회장의 묘소이다.
조선제분의 몰락, 4.19민주혁명, 5.16군사정변, 1962년 혹독한 세무사찰등을 겪으며 5인의 창업동지들이 가졌던 다짐은 ‘우리는 절대 모험이 따르는 성장정책을 쓰지 말고 안정정책을 쓰자’고 합의한 터였다.(대선제분 50년. 83페이지 참조) 이같은 다짐은 박세정 회장 취임후에도 계속돼 기존의 대선제분을 내실을 다지는데 모든 경영방침이 향하고 있었다.

박세정 회장 시절 눈에 띠는 업적중의 하나는 밀가루 탁주제조법을 개발한 것이였다. 막걸리는 원래 찹쌀이나 쌀을 원료로 한 누룩을 사용하여 제조하던 것을 1964년 1월부터 절미운동이 시작되면서 쌀사용이 금지됐다. 양조장에서는 쌀 대신 밀가루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양조장들은 밀가루 80%, 옥수수 20%를 혼합해 막걸리를 만들어 한때 우리나라 밀가루 생산량의 18%까지 양조장에서 소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1990년부터 막걸리 제조에 쌀 사용이 허용되면서 밀가루를 이용한 막걸리가 급격히 줄어들자 이를 활성화하기 위해 밀가루 탁주제조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대선제분은 1989년 이 기술을 특허출원해서 91년 등록하는등 밀가루 탁주제조법을 만드는데 상당한 공을 보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쌀 막걸리가 대세를 이루면서 대선의 밀가루 막걸리 제조법은 큰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히고 말았다.

또 한가지 눈여겨 볼만한 것은 1995년 5월 남북교역 사상 최초로 대선제분의 밀가루가 북한에 갔다는 것이다. 1988년 7월 ‘7.7 특별선언’으로 남북교역이 허용된 이후 수 많은 종류의 품목이 남북을 오갔지만 사실상 식량으로 분류되는 밀가루가 북한으로 간 것은 처음이였다.

북한으로 보내기 위해 선적하고 있는 대선제분의 밀가루 모습이다.
1994년 2월 박세정 회장이 퇴임한 후 곧바로 박관회 대표이사가 취임한다. 관회씨는 박세정 회장의 차남이다. 이후 대선제분은 성장을 거듭해 영등포공장과 함께 함평군, 충남 아산등에 공장을 두고 있다.

박세정 회장은 2001년 2월 5일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어릴때 어머니를 여의고 부친과 보부상을 하면서 장사를 시작, 오직 신용 하나로 대선제분이라는 중견기업을 일군 병영상인은 그렇게 한평생을 마감했다. 그의 묘는 작천면 용상리 구상마을 건너편 야산에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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