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침몰 조운선 최초 확인

공식적인 침몰 기록만 400여건, 한 건도 발견 안 돼
강진 해창에서도 매년 봄 조운선 출발

조선 초기인 15세기 태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조운선‘마도 4호선’에서 발굴된 분청사기들이 26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됐다
조선시대 가을에 세금으로 걷워들인 곡식은 도암 해창의 창고에 저장해 두었다. 그러다가 봄이되면 본격적으로 한양으로 운송이 시작됐다. 꽃피는 봄날 벼를 가득실은 조운선이 한양을 향해 출발했다. 도암 해창 건너편 칠량 구로마을 뒷산의 이름은 국사봉이다. 국가의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조운선이 떠날 때 안전을 비는 제사를 국사봉에서 올렸다고 한다.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다산 정약용선생은 18세기 후반 강진농민들의 처지를 탐진촌요란 한시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새로 짜낸 무명이 눈결같이 고왔는데/방 줄 돈이라고 황두가 뺏어가네/누전 세금 독촉이 성화같이 급하구나/삼월 중순 세곡선(稅穀船)이 서울로 떠난다고]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눈물겨운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 한시속에 3월 중순 세곡선이 떠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조운선은 30척을 단위로 선단을 형성했다. 조운시기는 주로 3월 중순에 출발하여 보름정도 지나 한양에 도착했다. 조운선에는 해운판관 1명이 책임자로 동승했고, 해당 읍의 감관과 색리 등이 승선하여 선내 제반사를 감독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뱃길이 간단한 뱃길이 아니다. 태안에서 800년전 침몰한 청자선이 발견됐듯이 조선시대 역시 수많은 조운선이 서해안 뱃길에서 침몰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조 태조 4년(1395)에서 제7대 세조1년(1456)에 이르기까지 60년간에 충남 태안의 안흥량에서 일어난 파선 및 침몰사고가 무려 200척에 인명피해 1천200명, 미곡 손실이 1만5천800석에 달한 것으로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헌종 원년(1835)에서 고종 19년(1882)간 65년 동안 충청도 해안에서 총 190건의 조난사고가 발생했고, 이중에 1/3이 태안반도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 모든 사고가 3~4월에 집중돼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동안 조선시대 조운선이 발견된 적이 없었다. 청자를 실은 고려시대 배가 종종 발견됐던 것과는 크게 대조되는 일이였다. 이상한 일이였다.

그런데 이번에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소장 소재구)가 지난해 충남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역에서 목선을 발견했다. 지난 2007년 10월 쭈꾸미에 걸려 나온 고려청자 접시 한점을 근거로 3만여점을 인양했던 강진청자배가 발견된 곳과 아주 가까운 곳이다.

‘나주광흥창’이라고 적힌 목간. 선박의 발신처와 수신처를 알 수 있다.
해양문화재연구소가 지난 4월부터 최근까지 이 배에 대한 발굴을 진행했는데 조선 15세기 조운선(漕運船·세금으로 낸 곡물을 운반하던 선박)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국내 해역에서 발견된 최초의 조선시대 선박이며 문헌으로만 전하던 조운선의 실물이 확인된 것도 처음이다.

이전까지 국내 바닷속에서 확인된 고선박은 모두 13척. 이 중 10척은 고려, 2척은 13~14세기 중국, 1척은 통일신라 배였다. 조선시대에 마도 해역에서 수많은 배가 침몰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실물로 나온 건 처음이다.

이배는 강진에서 출발한 배는 아니였다. 이 배에서도 목간이 61점 나왔는데 이중 52점에 출발지인 나주와 종착지인 한양 광흥창을 뜻하는 ̒나주광흥창(羅州廣興倉)'이 적혀 있었다. 일부 목간에는 곡물의 양과 종류를 뜻하는 ̒두(斗)'와 ̒보리(麥)'등이 표기됐다.

연구소는 “나주의 영산창(榮山倉)에서 거둬들인 세곡과 공납품을 경창(京倉)인 한양 광흥창으로 옮기던 정황이 확실히 드러난 것”이라고 했다. 선박을 정밀 발굴한 결과 분청사기 143점, 목간(木簡·나뭇조각에 먹글씨를 쓴 것) 61점 등 유물 300여점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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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선은 왜 침몰했을까

연안에서 암초와 충돌… 고의로 전복한 경우도 많아

조선시대 조운선은 왜 침몰했을까. 이유는 연안을 항해하다 암초에 부딪치거나 급류에 휩싸인 경우도 있었지만 고의적으로 일으킨 경우도 많았다. 조선왕조실록 효종 4년(1653) 4월 9일에 보면 호조에서 임금에게 전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조전법(漕轉法)은 매우 엄절한 것인데 인심이 간교하여 온갖 사기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과거 병술년과 정해년에 강진(康津)의 세선(稅船)에 실었던 9백여 석이 모두 전복되었는데, 그때 도신(道臣)이 배에 타고 있던 34인이 모두 죽었다고 치계했기 때문에 조정에서 특별히 탕척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듣건대 본현(本縣)에 세선이 복패된 것이 허위라는 말이 있기에 서울에 올라온 그 고을의 아전을 불러서 힐문하여 보았더니, 그때의 감관(監官)들 5인이 모두 생존해 있다고 했습니다. ”

또 조선왕조실록 현종 7년(1666년) 1월 29일자에는 이런 장계가 올라왔다.
“신이 일찍이 양남 감사가 되었으므로 이 일에 대하여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전부터 강진(康津)·해남(海南) 양읍에서는 배가 뒤집히는 우려가 없는 해가 없었으므로 배를 뒤집히게 한 자를 참수한 뒤부터 이런 걱정이 없었습니다.

이 일로 본다면 배를 뒤집히게 한 자는 대부분 고의적으로 뒤집히게 하여 도적질을 한 자들이니 결단코 용서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고 했다. 정밀조사가 불가능한 조운선의 침몰사고를 고의적으로 만들고는 물자를 빼돌린 사례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산 정약용선생은 “파선되는 배가 해마다 10여척이 되는데 그 원인은 첫째, 배를 만드는 제도가 좋지 못하고, 둘째, 수령들이 가외의 것을 보태어 싣기 때문이며, 셋째, 뱃사람들이 일부러 파선시키기 때문이다. 매년 파선되는 10여척 가운데 고패가 7~8척이 된다.”고 했다. 고패란 고의적으로 배를 파손한 일을 말한다. 아래 사진은 조운선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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