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강진군립도서관 개관, 공부하는 분위기 만들다

 

옛 문화원 자리에 있던 강진군립도서관은 도립병원 건물을 리모델링해 지어졌다. 원내는 당시 군립도서관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김재호 군수다.
경기도 파주, 경북 경주와 함께 전국 시범지역으로 선정
주민들 도서관건립추진위원회 설립‘십시일반’기금모아
‘문화의 불빛을 밝혀줄 떳떳한 공공도서관’ 위용 드러내

올해 강진군립도서관 개관 50주년, 설립 반세기 
국내 최고 소프라노 이경숙씨 초청 자선음악회도

 

60년에 강진성요셉여고의 개교와 함께 강진교육 가장 큰 변화중의 하나는 강진군립도서관이 개관한 것이였다. 1965년 1월이다. 올해가 50주년이다. 군단위에 이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서관은 경기도 파주와 강진뿐이다. 그만큼 강진은 도서관을 빨리 세웠다.

당시 강진도서관은 어떻게 지어졌을까. 1960년대 중반들어 정부는 마을문고 육성에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농촌의 근대화 없이 한국의 근대화를 바랄 수 없다’는 모토를 세웠다. 농민들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시범지역 운영이 필요했다. 그렇게해서 1964년말 시범지역으로 선정된 곳이 강진과 경기도 파주, 경상북도 경주였다. 그러나 정부가 돈이 없을 때라 시범지역만 선정해 놓고 도서관을 알아서 좀 지으라는게 정책방침이였다. 그래서 강진에서 자체적으로 움직임이 일어났다.

1965년 발간된 ‘도서관문화’ 1월호에는 당시 김재호 강진군수가 도서관을 건립하기까지 과정을 투고한 글이 있다. 내용을 보면 군립도서관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정성을 모았는지 알 수 있다. 지금 읽어도 가슴이 찡하는 내용들이다. 김재호 군수는 광양출신으로 1964년 4월부터 1년 8개월 동안 13대 강진군수를 역임했다. 김 전 군수의 글을 요약해 보면, 강진군립도서관은 1964년 9월 8일 34명으로 꾸려진 강진군립도서관설치운영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인 걸음을 시작한다. 도서관 설립의 동기는 분명했다. 설치운영위원회는 출범 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전남 남부지구 5개군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농산물 교역이 활발하고 교통의 중심지인 강진에 주민들의 교육열의를 반영할 도서관이 없다. 특히 강진은 고려청자의 발생지이자 조선시대 실학의 태두였던 다산정약용 선생이 목민심서를 비롯한 300여권의 저서를 남긴 곳이다. 이러한 좋은 조건을 가진 강진에 지식의 샘터가 되고 진리와 문화의 불빛을 밝혀줄 수 있는 떳떳한 공공도서관이 없다는 것은 자못 아쉽다. 농어촌민들에게 책을 읽게 할 수 있는 이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고자 도서관을 건립하자’

‘문화의 불빛을 밝혀줄 떳떳한 공공도서관’이란 표현은 자못 예술적이기까지 하다. 이렇듯 강진군립도서관은 지역에 대한 자부심과 주민들에 대한 교육열에서 그 역사가 시작됐다. 곧바로 주민들의 열화와 같은 참여가 이뤄졌다.

강진군립도서관설치운영위원회의 위원장은 군수가 맡았다. 그리고 2명의 부위원장을 두었는데 김기홍씨와 박풍환씨가 그 직책을 맡았고, 차부진씨등 5명이 재정위원으로 선임됐다.

위원회는 가장 먼저 도서관을 세울 장소를 물색했다. 도립강진병원의 구청사를 개축해 사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 다음으로 필요한게 예산이였다. 기본적인 재원은 군비 119만원과 도비보조 20만원, 아세아재단한국지부의 50만원이였다. 아세아재단 몫은 현금이 아니라 도서지원이였다. 그러니까 건축비용은 139만원 정도 였던 것이다. 그러나 필요한 건축비와 기타 시설비는 260만원 이상이였다.

지역내에서 자발적인 기부금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추진위원들과 재정위원들이 목돈을 내주었고, 일반 지역 주민 134명이 적게는 200원에서부터 많게는 20만원까지 도서관 설립성금을 냈다. 여기에 지역내 각 기관 직원들이 ‘가난한 호주머니를 아낌없이 털어 모아’ 10만4천원을 모아주었다. 또 강진군 관내 각급학교 학생들이 폐품을 수집해서 모은 돈 16만원이 보태지면서 거의 모든 건축비와 비품비등이 모아질 수 있었다. 이렇게 마련된 설치기금이 총 261만4천원에 달해 건축을 서두를 수 있었다.

64년 11월 4일 입찰을 한 결과 대동건설(대표이사 박헌동)이란 회사에 172만원에 낙찰돼 공사가 시작됐다. 11월 7일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됐다. 매우 추운 시기였다. 김재호 군수는 공사가 시작된 날부터 매일같이 현장에 나가 인부들을 격려했다. 술과 담배를 사준적도 많았다. 김군수는 글을 통해 “그렇게 간섭아닌 성의를 표시한 것은 오로지 한정된 기금으로 튼튼하고 쓸모 있는 도서관건물을 세워보자는 안타까운 심경에서 그렇게 친절을 베풀고 감독을 해야만 했다”고 적었다.

건축이 50%를 넘어서자 아세아재단한국지부 대표인 스타인버그씨가 50만원 상당의 신간서적 2,325권을 보내왔다. 전문직인 사서직 공무원을 채용하기 위해 예산까지 책정했을 때 한국도서관협회에서 안호순씨라는 전문사서를 파견해 주어 초창기 전문적인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학생들을 위한 참고서적이 필요했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볼 책을 아세아재단에 다시 지원을 건의했다. 요청은 즉각적으로 받아드려져 참고서와 대백과사전, 대영어사전등 수백권의 참고도서를 보내주었다.

다음은 도서관에 비치할 비품이 문제였다. 서가도 필요했고 열람용테이블과 사서용 비품, 아동실의 비품, 베란다 휴게소에 놓을 비품도 필요했지만 자금이 없었다. 그래서 비품을 지원해 달라고 인연이 있던 서울의 세풍양행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 요청 역시 즉각적으로 받아드려져 국제표준규격으로 제작된 50만원 상당의 도서관전용비품이 도착했다. 이것을 조립해서 도서관 내부를 조촐하게 꾸몄다.

도서관의 모습이 어느정도 갖추어 졌다. 1964년 12월 15일로 군조례 제91호 강진군립도서관 설립조례를 제정 공포했다.

이렇게 해서 강진군립도서관은 완벽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2층에는 일반열람실과 참고열람실이 들어섰고, 1층에는 아동열람실과 우리나라 최초로 마련한 고려청자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전시실, 문화센터가 들어섰다.

문화센터에는 영사실과 무대를 겸비한 강당이 들어서는 등 총 172평의 현대식 2층도서관이 착공한지 2개월만인  1965년 1월 8일 준공됐다. 준공식겸 개관식이 열린 1월 8일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서울의 유명인사들이 대거 강진에 내려왔다. 아세아재단 한국대표 스타인버그씨 부부와 함께 전 내무부장관 엄민영씨 부부, 서울법대 서규옥교수와 한국법학원 김치선교수, 한국일보 김용구 논설위원, 전국마을금고진흥회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

개관식 직후인 12일에는 성요셉금릉여고 강당에서 뜻깊은 행사가 하나더 열렸다. 당시 우리나라 최고 소프라노였던 이경숙씨와 이명숙씨가 도서관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자선음악회를 연것이다. 당시 음악회는 호화찬란했다고 전해져 온다. 이때 모인 수입이 총 6만원이 였는데 이 돈은 모두 도서관에 희사됐다. 지방에서, 그것도 도서관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이런 행사가 열린것은 전국적으로 처음이였다. 개관하자 마자 주민들이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한달 후인 2월 10일까지 도서관 열람자 총 인원이 3,725명에 달해 하루 평균 17 0여명의 주민들이 ‘기쁨과 희망에 넘치는 마음̓을 간직하고 진리를 밝혀주는 보금자리를 찾았다.    

 

도서관 건립 후 강진은 독서열풍

각 마을에는‘마을문고’60개 마을 열공 전국 최다
주민들 가마니짜고 마을 울력해서 책 구입
66년 전국마을문고 대표자회의서 대통령상 영광
66년에 각 마을에 장서 5만3천권 확보
 

마을문고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책을 읽는 것은 일반적인 풍경이였다. <사진= 경향신문>

1965년 군립도서관이 세워진 후 강진은 읍면별로 독서열풍이 불었다. 주민들의 책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것이다. 당시에 강진군과 함께 경기도 파주군, 경북 경주시등에 도서관이 세워졌는데 세 지역은 마을문고를 설치하며 선의의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65년 5월 세 지역의 마을문고를 비교해 보면 경주시가 86개로 가장 많지만 시단위 마을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같고, 군단위인 파주와 강진을 비교해 보면 파주는 41개, 강진이 60개 마을에 마을문고가 들어섰다. 강진의 독서열풍이 훨씬 강했던 것이다.

강진은 67년 3월까지 285개 자연마을에 마을문고가 설치됐다. 거의 모든 마을에 문고가 설치된 것이다. 마을주민들은 가마니를 짜서 팔아 책을 사고, 마을 울력을 해서 돈을 모아 책을 구입하는 열성을 보였다. 강진은 전국의 모범지역으로 떠올랐다. 1966년 11월 10일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강진군이 제2회전국마을문고대표자 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는 영광을 차지한다. 또 대구 수동마을 마을문고가 농림부장관상을 수상하는 등 강진이 주요상을 휩쓸다시피 했다.

또 1968년 대회때에는 강진의 청몽마을문고가 대통령상인 본상을 수상해 2년 연속 대통령상을 차지했고, 대구면의 계치마을문고가 장려상을 수상했다. 1964년 마을단위로 마을문고를 조직한 강진군은 불과 2년만에 많은 책과 8천140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강진군의 사례를 배우기 위해 전국에서 견학단이 몰려들기도 했다.

1969년 어느날 대구 수동마을 마을문고에서 주민들과 학생들이 열심히 책을 읽고 있다. <사진= 동아일보>
경향신문 1967년 3월 22일자에는 전국에 퍼진 마을문고 문화를 특집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에 강진사람의 멘트를 싣고 있다. “14세부터 50세 전후의 회원들이 농한기와 일이 끝난 밤에 책을 돌려보지요. 재미를 붙인 마을사람들이 푼돈을 모아 저축해서 더 많은 책을 사들이자고 매우 의욕적입니다. 그리고 이웃 마을문고와 서로 책을 바꾸어 읽는 방법도 쓴답니다” 담당 기자는 강진군내 농촌 어디에서나 듣는 이야기라고 덧붙였다. 주민들의 독서열기는 농가소득증대와도 연결되고 있다고 신문은 설명했다. 일례로 칠량면 동백리의 경우 70여가구의 연간소득이 마을문고 설치 이전보다 배가 넘은 100여만원이나 된다고 소개했다.

농민들이 영농기술분야 책을 읽어 소득을 높였다고 했다. 강진군은 1970년 11월 26일 전국독서연맹이란 단체가 주최한 국민독서경진 대회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을 받아 강진의 독서력을 다시 한번 과시했다.

그러다가 70년대 후반, 80년대로 들어 농촌인구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마을문고에 대한 관심이 낮아졌고 책과 관련해서 강진에 대한 관심도 떨어졌다. 그후로 강진군립도서관의 분위기를 확바꾼 일이 있었다.

91년부터 벌어진 범 군민 7만장서 확보운동이 그것이였다. 군은 1차로 군민들의 설문조사를 통해 필요한 책이 무엇인지 파악해서 2만6천권을 사들였다. 또 출향인들이나 관내 유력 인사들에게 안내문을 보내 장서확보운동에 적극 참여해 주도록 호소했다. 성금 모금을 위한 계좌를 개설하고 안내했다. 기증받은 책에 대해서는 기증자의 출신지와 성명, 생년월일, 하는일 등을 기록한 각인을 제작해 각 책마다 표시해 군민들이 책을 읽을때 마다 고마움을 갖도록 했다.

그 결과 1,813명으로부터 1억 7천125만원의 성금이 모아졌고 54명으로부터 1만5천462권책이 답지했다. 강진군은 1992년 12월에 발행된 ‘강진군정 50년사’에 성금을 낸 사람들과 책을 희사한 사람들의 명단을 잘 정리해서 그들의 정성을 기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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