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타일도 수두룩…‘고려시대에 청자타일을 사용했다니’

사당리 발굴 ‘고려의 대 발견’성과
건물의 벽에 청자타일을 사용한 증거
고려시대 높은 문화수준 반영

1964년 국립박물관 발굴도자팀이 대구 사당리에서 최초로 발굴한 청자가마터이다. 뒷쪽으로 보이는 초가집은 지금의 청자박물관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사진= 이용희청자장 제공>
1964년 7월 대구 사당리 이용희씨의 앞마당을 파들어 갈수록 암키와, 암·수 막새기와 등 각종 청자기와가 쏟아졌다. 거의 완형에 가까운 것도 있고 서·누·남면등 지붕의 위치를 가리키는 글자가 음각된 것도 있었다.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정해(丁亥), 임신(壬申), 갑신(甲申), 기사(己巳)등 간지(干支)가 새겨진 조각도 나왔다.

이 정도면 이곳이 개성 만월대 부근에 있었다는 양이정을 덮은 청자기와를 만든 터였고, 청자기와가 지붕의 어느쪽에 위치할 것까지 계산해 구워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였다. 1차 조사는 1964년 9월 22일부터 10월 3일까지 진행됐다. 그동안 청자기와가 발견된 것은 일체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발굴이 끝나기 전에 기자들이 몰려오면 발굴도 제대로 못하고 도굴꾼들의 표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사당리 청자기와 발굴이 상당히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고학계가 두고두고 후회한다는 공주 무녕왕릉 발굴과정을 잠시 살펴보자.

1971년 7월8일 배수구를 정비하던 인부가 우연히 삽질을 하다가 내부 벽실에 묻혀있던 ‘벽돌’을 발견한다. 이 소식이 서울로 보고돼 부랴부랴 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동네 사람들이 눈치채고 몰려들었고 이 소식이 기자들에게까지 들어갔다.

발견 다음날 군중들이 마치 서커스구경꾼처럼 발굴현장을 빙 둘러쌌다. 기자들은 발굴팀을 밀치고 무덤 속 유물들을 짓밟으며 연신 사진플래시를 터뜨렸다. 심지어 경찰조차 무덤을 먼저 보겠다고 고개를 돌려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무덤 내부의 원형이 상당히 파괴됐다.

이 때문에 훗날 이렇다할 연구논문도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무녕왕릉 발굴은 전 세계 고고학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날림 발굴이라는 비아냥을 지금도 듣고 있다. 이에반해 6년 앞서 진행됐던 사당리 발굴은 1964년 5월 사전조사 후 4개월 정도 나름대로 준비기간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또 발굴을 시작하면서 일체 외부에 알리지  않음으로서 외부세력의 개입을 잘 차단했다.

발굴대장이었던 최순우 국립박물관 과장은 10월 3일 1차 발굴이 완료된 후 대구면 우체국으로 갔다. 김재원 당시 국립박물관장에게 전화로 발굴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비가 내렸다고 한다. 최과장은 우비를 쓰고 우체국으로 가 전화로 발굴성과를 보고한 후 각 언론사에 연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정양모 전 국립박물관장이다. 당시에는 30대 초반의 나이로 오직 청자가마터를 찾겠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쳐있을 때다. <사진=이용희청자장 제공>
다음날 즉각적으로 기자들이 내려왔다. 10월 5일부터 각 일간지에 대서특필한 제목들이 쏟아졌다. ‘햇빛 보게된 불멸의 문화재’ ‘청자의 갖가지 수수께끼와 속모습을 해결’ ‘밝혀진 청자의 진실’ ‘청기와 900년만에 베일 벗어’... 아마도 최순우 과장이 가장 흡족했던 신문제목은 ‘청자기와 900년만에 베일 벗어’라는 제목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우리나라 불교미술계 최고 전문가인 황수영 전 동국대 총장은 “고유섭이 ‘개성 박물관의 자랑’이라는 글에서 일제강점기에 개성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청기와를 예찬하셨는데, 이번에 이렇게 많은 청기와를 발굴한 것은 다시없는 기쁨이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동아일보는 당시 발굴기사를 사회면 톱기사로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강진만의 남단 탐진강 하류에 위치한 대구 사당리는 해로를 통해 중국 월주요 문화가 맨 처음 옮겨진 곳이다.

이곳은 고려시대 도자기시험소나 전시장 같은 느낌을 준다. 이번 발굴은 그동안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거나 단편적으로 전해진 청자 제작장소와 제작연대를 정확히 밝혀내는데 훌륭한 뒷받침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마술같은 사당리 발굴은 계속됐다. 1966년 11월에 계속된 2차발굴에서 귀면(鬼面: 귀신의 얼굴을 그린 장식 기와. 잡귀나 재앙을 막기 위하여 사래 끝에 붙인다)으로 보이는 2개의 파편과 용마루 끝에 붙이는 치미(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조각을 발견한 것이다.

그전에 나오지 않았던 연꽃잎 문양의 깨끗한 수막새(직경 9.5㎝)도 캐냈다. 당시 치미와 귀면조각을 발견한 것은 양이정 외에도 청자기와를 올렸던 건물이 또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고 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으나 지금까지 다른 건물이 청자기와를 올렸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사당리 기적은 1968년에도 계속됐다. 그해 진행된 4차 발굴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청자타일이 대량으로 쏟아졌다. 청자타일은 청자기와 만큼이나 대단한 유물이었다. 타일은 지금도 그렇듯이 건물의 외벽을 꾸미거나 목욕탕 같은 실내장식을 위해 사용하는 고급스런 장식재이다.

고려시대에 이미 청자로 된 타일이 사용됐던 것이다. 당시 발견은 청자기와 발견에 이은 두 번째 대 발견이었다. 발굴단은 청자타일의 이름을 청자전(靑磁塼)이라고 이름 지었다. 청자전은 퇴적층의 첫 층이 끝나는 지하 1m 정도의 깊이에서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타일의 무늬는 불교 문화를 상징하는 연화가 많이 새겨져 있어 고려시대 불교문화의 전성기때 청자타일을 많이 사용했다는 것을 전하고 있었다. 타일은 사찰을 비롯한 고려건축물의 바닥을 장식할 때 쓰인 물건으로 확인됐다.

당시 학계에서는 청자타일 발견에 대해 고려시대에 건물의 바닥에 까지 그토록 섬세한 청자를 사용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려사회의 높은 문화수준을 나타내고 있는 유물이었다. 또 타일이 굽기쉬운 백자가 아니라 청자기와 만큼이나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청자라는 점에서 당시 도자기술의 높은 수준을 다시한번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청자타일에 당초무늬와 모란무늬등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 것은 모두 신라시대의 유약을 한층 발전시켜서 이루어진 세련된 작품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청자타일은 그후 고려사찰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발견됐다. 최씨 무신정권이 세운 강화도 선원사와 고려왕실의 직속 사찰이었던 경기도 파주시 해음원이란 사찰 발굴과정에서 청자타일이 나왔다.

또 성전 월남사지를 발굴할 때도 청자타일이 나와 관심을 끌었다. 월남사 또한 고려 왕실과 가까운 사찰이었다. 강진 대구에서 생산된 청자타일이 고려시대 상당량이 유통됐던 것이다. 사당리 일대에서 대규모 청자가마가 발굴되면서 전국의 이목이 강진으로 집중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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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청자 건져 올린 어부 강모씨 그물에 따라 올라 온 ‘수양버들 무늬 상감청자’

학교교장 ‘별 것 아니다’ 뺏어가
국립박물관, 어부에게 보상금 주고 회수

왼쪽 사진은 1968년 사당리 4차 발굴에서 쏟아져 나온 청자타일들이다. 정교한 연꽃무늬가 많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 사진은 1970년대 초 사당리에서 가마터를 발굴하는 도중 비가 내리자 발굴단이 양수기를 동원해 물을 퍼내고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대구 사당리 일대에 대한 발굴이 본격화되면서 주민들의 청자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다. 무덤에서 나온 재수없는 물건 정도로 취급되던 청자나 청자파편들이 천하의 귀물로 대접받으면서 주민들의 시각도 크게 바뀐 것이다.

이에 덩달아 강진에는 대구 미산앞바다에 고려청자가 수장돼 있다는 소문이 많았다. 배로 청자를 운반하던 중 사고나 파선등으로 물속에 잠긴 청자가 여럿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았던 것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갯뻘이 많지 않은 뱃길이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추정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였다. 청자를 주워 올린 주민들도 몇몇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자를 건져 올려도 쉬쉬했거나 가치를 몰라 집안 어딘가에 나뒹군 청자도 있을 것이다.

이같은 소문은 1968년 대구 사당리 발굴을 위해 내려온 국립박물관 발굴단의 귀에도 들어갔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청자가 여러점 있고 누가 얼마를 받고 누구에게 팔았다는 구체적인 소문들이 떠 돌았다.

그중에서 가장 구체적인 소문이 있었다. 일년전, 그러니까 1967년 5월 어부 강모씨가 대구면 마량리(마량은 당시 대구면 소속이었다) 앞바다 소양바위 근처에서 그물로 고려청자 대접 2개와 접시 1개를 끌어 올린 일이 있다는 것이였다. 대접에는 수양버들과 물오리무늬가 상감돼 있었다는 구체적인 묘사까지 나왔다.

발굴단은 어부를 만나고 청자의 소재 파악에 나섰다. 청자는 대구초등학교 교장이 소장하고 있었다. 해당교장은 강모씨가 청자를 건져 올렸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대수롭지 않은 물건이니 학교에 보관하겠다”고 뺏어 간 것으로 파악됐다.

국립박물관측은 교장으로부터 청자를 회수한 다음 어부 강모씨에게는 ‘응분의 보상금’을 주고 박물관으로 가져갔다고 당시 발굴단장이던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은 회고했다.<경향신문 1975년 5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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