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강진에 오는 수녀들은 가방에 헐렁한 장화를 준비했다

신발벗고 방에 들어가야 하는 한국의 풍습 따르기 위해 준비
1962년 개교 성요셉여고, 강진의 여성교육 새장 열어

60년대 초반 강진에 처음 왔을 때 강진의 풍경과 작고한 양노린 수녀의 모습이다. 전체적인 구도로 봐서 남포마을 쪽에서 보은산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보은산이 민둥산이다.<사진= 강진일보 자료사진>
1960년대는 지역사회가 전쟁의 아픔을 씻어내고 우리도 한번 해내 보자며 본격적인 웅비의 용트림을 하던 시기였다. 전쟁의 상흔과 만성적인 식량부족이 가시지 않은 정말 어려운 시기였지만 강진 주민들은 미래에 대한 꿈만은 어느 지역 못지 않았다.

60년대 초반 강진의 가장 큰 변화중의 하나였다면 여자전문 고등학교가 들어선 것이였다. 성요셉여고가 그것이다. 성요셉여고의 설립은 강진 여성교육의 일대 혁명을 예고하는 것이였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1961년 10월 초. 미국 캘리포니아 항구에는 한국으로 가는 4명의 수녀가 화물선을 탔다. 캘리포니아 항구는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었다. 화물선에 오른 사람은 사랑의 씨튼수녀회 소속 메리에그너스(토마스아퀴나스.1993년 작고)수녀와 양노린(2009년 작고)수녀를 비롯한 4명의 수녀였다.

이들은 28일의 긴 항해 끝에 인천항에 도착했다. 양노린 수녀는 생전에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어느 해역을 지나며 큰 태풍을 만나 큰 위험을 겪은 적이 있다. 배가 심하게 흔들려 탑승자들이 극도의 배멀미를 하면서 이제는 하느님 곁으로 가는구나하는 생각도 했었다”고 당시를 회고한 적이 있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강진이었다.

네 사람은 목포를 거쳐 강진으로 오며 죽을 때까지 강진에서 봉사를 하자고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을 했다고 한다. 수녀들은 지금의 강진성당앞에 있던 초라한 기와집에 거처를 마련했다. 이때 강진에는 금릉중학교가 있었다. 1947년 지역 유지들이 기금을 걷어서 만든 학교였다.

이후 1953년 3월 10일에는 금릉여자중학교로 정관을 변경해 여성의 교육의 중심지가 됐다. 금릉중학교는 1960년대부터 재정난에 시달렸다. 형편이 어려워진 1961년 천주교 광주교구 교육재단의 도움으로 사랑의 씨튼수녀회에서 교육을 위탁하게 된다.

이후 금릉여자중학교는 1962년 3월 성요셉금릉학원 재단으로 이양됐고 초대교장 토마스 아퀴나스 수녀가 취임했던 것이다. 이후 11월 28일 성요셉금릉여자가정고등학교로 인가받으면서 성요셉여고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초창기에는 가정과 6학급을 운영했다.

성요셉여고는 외국인 수녀들을 지속적으로 충원했다. 경향신문 1962년 12월 12일자에는 강진과 관련해 반가운 기사가 게재돼 있다. 미국 펜실바니아주 피츠버그시에서 특파원 발로 보도한 이 기사의 제목은 ̒한국의 교단을 지원한 두 수녀-게레미 수녀와 이마뉴엘 수녀̓.

1962년 당시 신문에 게재된 M 게레미 수녀(좌측)와 이마뉴엘 수녀의 모습. <사진=경향신문 제공>
특파원이 미국 현지신문을 인용해서 보도한 형태의 이 기사의 제목은 ̒전남 강진으로 교편을 잡기위해 23일 인천항으로̓ 가는 두 수녀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토마스아퀴나스 수녀 일행이 강진에 도착한지 1년여만의 일이다.

1960년대 초반 강진에 온 미국수녀들의 초기 강진 생활은 작고한 양노린수녀등을 통해 많이 알려졌으나 미국 현지의 표정이 어떠했는지는 거의 알려진바가 없었다. 경향신문 기사는 현지 피츠버그시에서 발행되는 ̒피츠버그 포스트 가제트̓란 신문이 두 수녀의 사진과 함께 한국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크게 실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미국 현지 신문의 기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당신은 한국과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서 교육사업을 하기 위해 떠나는 수녀들은 무엇을 가지고 가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다음은 기사의 요약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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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펜실바니아 피츠버그시에서 한 50리 떨어진 그린스버그라는 조그만 마을의 한 성당에서는 지난달 하순 두 수녀를 위한 환송회가 화려하게 베풀어졌다. 많은 성직자들과 마을의 유지들이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참석한 이 파티는 한국으로 떠나는 ̒M. 게레미̓ 수녀와 ̒이마뉴엘̓수녀를 위해 그린스버그 교구의 카톨릭성당에서 마련한 잔치였다.
두 수녀는 홀을 가득히 메운 손님들에게 일일이 “즐겁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한국말 인사를 나누며 파란눈에 가득히 넘치는 기쁨을 가눌 줄 몰랐다.
한때 피츠버그시에서 대학교수를 역임했던 ̒M 게레미̓ 수녀와 ̒이마뉴엘̓수녀는 오는 23일 인천항에 도착할 것이다. 그들은 전남 강진에서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대학교수직도 훌훌버리고 자원한 것이다. 대개의 경우 미국의 수녀들은 지원해서 한국에 가기를 원하는데 이번에는 유난히 많은 지원자들이 몰려 그린스버그교구는 꼼꼼한 심사끝에 대학교수급 수녀를 한국에 보내기로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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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뉴엘 수녀와 게레미 수녀가 한국에 가기 위해 무엇을 준비했는지에 대한 소개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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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뉴엘 수녀와 게레미 수녀는 미국을 떠나기에 앞서 떠듬떠듬 한국말을 배웠다. 그들은 한국의 지리와 풍속도 면밀하게 알아 생활에 익히도록 힘썼다. 이 수녀들이 한국에 관해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는 그들의 짐짝을 들춰보아도 얼른 헤아릴 수 있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고무장화, 한국노래가 녹음된 ̒테이프̓, 두툼한 양말 둘... 장화는 벗었다 신었다 하기에 좋은 헐렁한 것을 특별히 준비했다. 집을 드나들 때마다 신을 자주 벗어야 한다는 한국 풍속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양(羊)치는 일에도 능숙해서 한국에 가면 그 일도 추진할 셈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마뉴엘, M 게레미 수녀는 다같이 한국말이 서툴러 무척 안타까워 하고 있다. 그들은 한국에 닿으면 우선 연세대학교에서 한국말을 좀 배워야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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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수녀가 한국은 집을 드나들 때마다 신을 자주 벗어야 한다는 풍속을 듣고 헐렁한 장화를 준비했다는 말이 정겹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미국 가정은 대부분 신발을 싣고 들어가는 구조였다. 남의 집을 방문하면 반드시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한국문화는 대단히 낯설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자는 기사 말미에 ̒'극동(極東)에 자리잡은 조그만 나라 정도로 밖엔 알고 있지 못한 한국을 위해서 그들이 마음쓰고 있는 성의와 정열은 참말 놀라운 것이었다.'고 적었다. 두 수녀는 예정대로 1962년 11월 말에 성요셉에 부임해 근무를 했다.

그럼 당시 강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양노린 수녀님이 생전에 필자와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낡은 트럭에 화물을 잔뜩 싣고 외국인 수녀일행이 강진에 도착하자 요셋말로 난리가 났다. 움직이는 곳마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줄을 지어 따라 다녔다.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피아노를 구경하기 위해 수녀님들의 거처를 떠나지 않았다.

수녀들은 지금의 강진성당앞에 있던 초라한 기와집에 거처를 마련했다. 처음에는 한 주민이 수녀들의 일을 도왔으나 나중에는 수녀들이 김치 담그는 법을 배워 직접 반찬을 만들어 먹었다. 푸른눈의 수녀들은 몇 달 후 학교의 교실로 숙소를 옮겨야 했다. 학교 교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일이 매우 불편했으나 그렇게 생활한게 5년이다.

양노린 수녀는 “주민들이 야채를 많이 가져다 주셨죠. 모두 가난한 학부모들이었는데 정성스럽게 쌀을 건네주던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옛날을 회상하는 양노린 수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한국에 자원에서 온 수녀들은 열성이 대단했다. 수녀들은 주로 음악과 무용, 영어를 가르쳤다. 당시 강진에 여성교육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수녀들은 큰 환영을 받았다. 한국인 영어교사가 있었으나 이들은 거의 일본식 영어발음을 사용해 양노린 수녀가 이를 많이 교정해 주었다. 학생들은 노래와 무용을 잘 따라했고 피아노 소리 듣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 피아노는 지금도 학내 수녀원에 보관돼 있다.

수녀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가정 방문이었다. 당시 함께 온 모든 수녀들이 가정방문을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양노린 수녀의 열성은 대단했다. 자동차는 물론 자전거도 없는 형편이었지만 새학기가 시작되면 담임을 맡은 반의 거의 모든 학생 집을 찾아 나서곤 했다. 당시 한 반의 수는 70명 정도였다.

한번은 학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집을 찾아 갔는데 너무 멀어 한밤중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아이는 잠을 자다 벌떡 일어났는데, 부모는 선생님이 온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삶은 닭이 올라간 푸짐한 밥상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성요셉여고는 개교 50주년을 맞은 지난 2012년까지 졸업생 1만249명을 배출했다. 올초 53회 졸업생까지 1만667명을 배출했다. 명실공히 강진 여성교육의 산실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성요셉여고도 농촌인구 감소와 이에따른 학생수 감소로 학교 문을 닫기로 했다. 성요셉여고는 2014년부터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해 2, 3학년만 다녔고, 올해는 3학년만 다니고 있다. 올해 다니고 있는 3학년이 졸업하면 내년에 완전히 학교가 폐교된다. 덧없는 세월의 흐름속에 한시대 강진 여성교육의 산실이었던 학교가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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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1년 동안 강진고생 500명 성요셉여고로 통째로 옮겨간다
거점고 시설보강, 기숙사도 빌려쓰기로

1962년 미국에서 온 수녀들에 의해 개교한 성요셉여고는 찬란했던 세월을 뒤로하고 내년에 폐교된다. 학교는 문을 닫지만 머나먼 이국땅에 와서 젊음을 불사른 수녀들의 정신은 영원할 것으로 보인다.
올해 재학생이 내년 2월 졸업하고 나가면 완전히 폐교되는 성요셉여고는 어떻게 변화될까. 우선 내년 1년 동안 강진고 학생 1, 2, 3학년 학생 500여명 모두 성요셉 건물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강진고가 거점고로 지정돼 대대적인 시설보강을 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학생들이 학교를 옮기는 것이다. 이런 일도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강진고는 당초 현재의 강진고 시설을 보강하는 과정에서 한쪽을 막고 한쪽 공사를 한 다음 학생들을 이동시켜 다른쪽 공사를 하려고 했지만 시일이 많이 걸리고 소음도 많을 것으로 예상돼 도교육청의 주선으로 아예 학생들을 통째로 성요셉여고로 학교 이동시키는 묘안을 짜냈다. 물론 기숙사도 1년 동안 성요셉여고의 기숙사를 사용하게 된다.

이를위해 강진고측은 성요셉여고와 협의해 일부 화장실 시설을 바꾸는등 시설보강을 할 예정이다. 한편으로 성요셉재단측은 장기적으로 현재의 부지에 청소년 수련시설을 유치하기 위해 관계기관과 오래전부터 협의하고 있는 상태다. 아직까지 윤곽은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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