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징한 놈의‘육팔한해’… 죽을 고비 많이 넘겼제

65년부터 68년까지 잇따라 가뭄, 68년 가장 극심
주민들 고향 떠나고, 학생들 학교 자퇴하고… 이농 본격화
보은산에서 기우제 올리고, 주민들 물싸움에 파묘까지

60년대들어 여기저기서 잘살아 보겠다고 밤잠 자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럴때면 늘 주민들을 괴롭힌게 천재지변이었다. 전쟁보다 무서운게 천재지변이였다. 그중에서도 60년대 중반부터 계속된 그 칠흑같은 가뭄은 60년대 주민들의 가장 큰 시련중의 하나였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가뭄을 살펴보면 67~68년 한해, 77~78년 한해를 꼽을 수 있다. 지금도 주민들 사이에는 ‘육팔한해’, ‘칠팔한해’ 하면 몸을 움찔거린다. 그정도로 심각한 한해였다. 당시에 집중적인 탈 농촌이 이뤄졌다. 한해때 농촌에서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이 대거 대도시로 몰려갔다. 제주도로 들어간 사람들도 상당수다. 징그러운 가뭄이었다.   

우리나라는 67년부터 78년까지 12년 동안 1967년, 1968년, 1976년, 1977년, 1978년등 다섯차례의 큰 한해를 입었다. 1967년 8,9월 동안에는 호남지역에서, 1968년 6, 7월에는 호남과 영남에서 예년 강우량의 20~30% 정도밖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이는 60년만에 겪는 가뭄이었다.

68년 가뭄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전남지역은 전국에서도 한해 피해가 가장 심각했다. 당시 전남일보에 보도된 상황을 시기별로 분류해 보면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알 수 있다.

△1968년 5월 8일-전남등 전국에 가뭄, 못자리 설치도 못하고 도시에서도 급수난 △5월 15일-담양에서 우물 마르자 부녀자들이 파묘소동 △6월 25일-영산강상류 고갈로 전남도내 각지 식수난 △7월 12일-호남지방 가뭄으로 곳곳에서 물싸움. 고흥군에서는 농민들이 면사무소 계장살해. 호남비료 조업중단 △7월 25일-가뭄으로 벼농사 전멸에 직면. 호미모도 완전실패, 300만섬 감소 예상. 광주시내 1만여 남고생들 들샘파기에 동원 △7월 27일-강진군 대부분 농사포기 △7월 29일-호남가뭄 극심. 대전과 이리에서 열차편으로 광주. 목포에 식수공수 △8월 2일-나주 문평면에서 또 부녀자들 파묘사건 발생 △8월 3일-경부고속도로 예산 60억원 깎아 한해보조.

심각한 한해가 계속되면서 8월초부터는 날품팔이라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8월 1일부터는 제주도에서 물을 실어오는 초유의 공수작전도 벌어진다. 목포~제주간을 오가는 여객선 가야호가 8월 1일부터 물을 하루 20리터(120드럼)씩 싣고와 목포시의 급수차량으로 고지대의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농자가 속출하자 결국 전남도는 강제적으로 이농을 차단하는 기상천외의 대책까지 내놓는다. 전남일보 1968년 8월 10일자에는 ‘전남도가 날로 늘어나는 이농자를 방지하기 위해 경찰을 동원하는등 강경책을 쓰기로 하고 9일 각 시군에 긴급 지시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전남도는 강진을 비롯한 각 시군에 내려보낸 ‘긴급지시’를 통해 ‘이장과 면장 및 지서장은 수시로 관내의 이농 가능성이 있는 농가를 살피고 이농할만한 농가가 발견되면 곧 구호를 해서 이농을 좌절시키고 버스정류장이나 역주변에도 경찰관을 배치해 노인을 막고 찻속까지 뒤져 이농가족이 보이면 곧 하차시켜 귀가시키도록 하라’고 했다.

68년 양곡수매상황을 보면 당시에 얼마나 수확량이 감소했는지 추정할 수 있다. 강진군의 경우 당초 추곡수매 일반매입 목표량이 3천464M/T이였으나 실적은 101M/T를 수매하는데 그쳤다. 목표량의 2.9% 수준에 그친 것이다. 강진은 강진읍 장동마을과 신전면 수양리, 옴천면 영산리, 칠량면 계치마을등이 가뭄을 가장 심하게 타는 곳이었다. 이 일대는 80년대 초까지 저수지가 거의 없었다.

당시 농촌에는 ‘한해로 입은 얼은 3년간 계속된다’는 속담이 있었다. 해갈은 됐지만 당시 전남지역이 얼마나 피폐화됐는지를 보여주는 기사가 몇일 후 뒤따른다. 9월 4일자 전남일보 기사에는 전남지방의 한해 결석생이 전체학생의 30%를 넘고, 자퇴학생이 계속증가하고 있으며 전남도민 65%가 결핵에 감염된 것으로 집계됐다는 보도가 있다. 전남도교육위원회가 도내 초중등, 전문학교의 한해피해 학생을 집계한 결과 피해학생 수가 51만3천여명에 이르고 구호가 필요한 숫자가 44.4%라는 보도가 나왔다.

9월 15일자에는 강진군에서 장기결석 중학생이 619명이나 된다는 보도가 나왔고, 여학생 30여명이 이미 가출했다는 소식도 나온다. 전남지역의 미아와 부랑아, 걸인들이 전년도에 비해 21배나 늘었다는 소식은 참담하기 까지 하다. 다른 농촌지역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이처럼 전남지역은 ‘얼’이 치유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것이었다.

모내기철에 30여일 이상 비가 오지 않으면 농민들은 거의 공황상태가 됐다. 사람들은 예민해져 사소한 일에도 싸움을 했다. 물싸움은 다반사였다. 이런말도 있었다. 부녀자들이 물을 지키려면 치마를 입은 채 물속에 앉아 버렸다. 누가 범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면 남자들이 가까이 다가가 바지를 벗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 여자들이 질겁을 하고 도망을 갔다. 물도 빼앗기는 순간이었다.

장흥과 해남 영암에서는 여자들이 파묘를 하는 사건이 많이 발생했다. 명당에 묘를 쓰면 비가 오지 않는다는 말이 유행병처럼 퍼졌다. 부녀자들이 때를 지어 다니며 산의 묘를 파괴했다. 67년 가뭄은 5월 27일부터 6월 21일까지 26일간 비가오지 않았고, 중간에 비가 조금 내렸으나 다시 7월 28일부터 17일간 가뭄이 계속됐다.

68년 한해는 7월에 25㎜의 비가 내렸을 뿐 8월 15일까지 비한방울 내리지 않았다. 68년 가뭄은 67년에 이어 2년 연속 가뭄이 찾아와 그 피해가 전년보다 심각했다. 보은산에서 기우제가 열리고 장흥에서는 천관산에서 대대적인 불태우기 의식이 진행됐다. 천관산 정상에서 불을 피우면 비가 내린다는 전설 때문이었다.

그해 9월초 당시 정희섭 보사부장관이 신전면 수양리를 방문했다. 당시 정장관을 수행했던 강석이(농업기술센터 근무)씨는 수양마을에서 정장관이 한 주택 창문에 각목을 이용해 ‘×’로 못질을 해 놓은 것을 보고 당황하던 모습을 가까이서 보았다. 집주인은 가뭄에 벼를 모두 태워버리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전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떠났던 것이다. 당시 가뭄 때문에 이농을 한 경우는 일상적인 일이였다.  

“아마 장관도 가뭄 때문에 농촌을 등지는 농민들에 대한 사연을 보고받았겠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은 처음인 것 같았습니다. 집에 못질이 되어 있는 모습은 정말 안타까운 광경이었습니다” 나중에 농촌지도소 지도계장을 맡았던 강석이씨는 “지금도 문에 대못을 박아둔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농촌에서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이농이 시작됐다. 매년 반복되는 한해는 농촌생활이 지겨울 정도로 농민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강진지역은 지난 1967년 인구가 12만7천170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러다가 68~70년까지 3년 동안 9천353명의 인구가 감소했다. 제주도에는 이때 이주한 사람들이 제주시와 서귀포시등에 많이 살고 있다.  그러다가 75년부터는 매년 1만명 이상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75년 한해 동안 1만6천903명이 전출했고, 76년에는 1만1천781명이 다른 곳으로 이사갔다. 전출인구는 1980년에 1만3천629명으로 최고를 기록했다. 83년에는 1만3천30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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