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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박물관 건립 공사가 한창이던 1994년 6월경 대구면 당전마을에 거주하던 김남순(당시 60세)씨는 농사일을 끝마치고 귀가하던 중 사당리 41호 요지 보호각과 동편 사당리 131번지 청자박물관 공사현장을 지나게 됐다. 그곳에는 황토흙더미가 쌓여있었는데 붉은색 흙 사이로 푸른 빛을 띈 물체가 눈에 반짝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김 씨가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자 청자 잔탁과 잔이었다. 아마도 요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퍼낸 흙더미속에 청자 유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 씨는 현장에 잔은 그대로 놔둔채 잔탁만 집으로 가져왔다. 곧바로 남겨둔 잔도 가지러 갔으나 흙더미가 사라지고 난 뒤였다. 잔은 흙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4년후인 1998년 2월 청자박물관 개관에 맞춰 자신이 주은 잔탁
윤순학의 향토문화가 자산이다
오기안 기자
2019.08.0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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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이용희 청자장의 자택 발굴을 시작으로 청자촌 일대 발굴이 본격 시작됐다. 이 발굴로 청자기와 파편을 비롯한 수많은 청자편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후 1977년 강진군에서 명맥이 끊어졌던 고려청자 재현을 성공했다. 1986년에는 청자사업소가 설립되고 청자전시관도 건립됐다. 전시관은 현재 박물관 부지에 38평 규모로 건립됐다. 전시관에는 출토품인 고려청자 도편(陶片) 비교 전시와 고려청자 재현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공간이 부족해 전시관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사람들이 드나들기에도 불편했다.특히 1980년대 용운제 축조로 다른 수몰지역에서 발굴하여 임시 보관중이던 용운리 10-4호 청자가마터의 전시공간이 필요했다. 또 1991년부터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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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안 기자
2019.07.25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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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생가의 안채와 안채 문간채가 복원된 뒤 마당에도 흙으로 덧채움을 했다. 예전 농촌집의 마당은 곡식을 햇볕에 말리는 등 농산물과 관련된 공간으로 활용되고 되었기 때문에 4-5년에 걸쳐 주기적으로 흙을 덮어줬다. 이는 영랑생가도 마찬가지였다. 빗물에 흙이 씻겨내려가버린 영랑생가 마당에 흙을 보충하다보니 비가오는 날이면 마당에 비가 고이고 질퍽거려서 탐방객들의 불편이 컸다. 나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1993년 11월 일요일 쉬는 날을 골라 현 홍보팀장인 김종윤 후배와 함께 칠량 삼흥천에서 돌을 가져와 문간채와 안채를 연결하는 통로에 설치했다. 사업비가 없어 담당 공무원이 직접 설치해야 했던 시대였다.마당에 돌을 설치한 뒤 몇 개월이 지난 후 한옥에 조예가 깊다는 어떤 한 사람이 찾아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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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안 기자
2019.07.18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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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생가의 복원이 잘못됐다는 여론이 일어나자 군청 문화관광계 직원 3명이 각자 사포를 들고 1달여 동안 기둥의 페인트 벗기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페인트를 벗겨내 전문가로 하여금 오래된 나무처럼 느낄 수 있도록 다시 색칠해 본래의 색상으로 되돌렸다. 그제서야 여론이 잠잠해졌다.또 한번은 영랑생가 후면에 보강토를 했던 곳이 장마철에 토사가 흘러내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비에 씻겨내려간 토사가 영랑생가의 부엌까지 밀려내려와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이 사고로 충격을 받은 나는 옛 방식대로 생말뚝 500여개를 피해지 부근에 박아 넣고 흙을 채워 지반을 안정화시켰다. 다행스럽게도 이후에는 토사 유출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영랑생가 복원과정에서 빌라신축 문제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영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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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안 기자
2019.07.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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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과 함께 강진을 대표하는 인물인 영랑 김윤식. 현재 군청 인근에 영랑생가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강진군에서 복원하기 이전 영랑생가는 오늘날의 모습이 아니었다. 영랑 선생이 1948년 공보처출판국장으로 발령받아 서울로 이사가면서 초대 민의원이었던 양병일에게 최초 이전됐다. 그후 전매되고 나서 안채 문간채와 사랑채 문간채, 그리고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 짓는 담장과 협문이 사라지고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었다. 특히 안채는 1970년대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초가지붕을 시멘트 기와로 바뀌고 일부 구조가 변형됐다.이에 강진군에서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영랑생가를 매입했다. 1985년 12월에 군청 건설과에 근무했던 최찬명씨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전액 도비로 3천550만원을 들여 영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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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안 기자
2019.07.0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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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주변은 원래 녹차나무 자생지로 유명했던 곳이었다. 예부터 이 곳 주변을 다산(茶山)이라고 불렸다. 정약용 선생의 호도 여기에서 연유했다. 윤방현 선생에 의하면 다산초당 주변은 아름드리 적송나무가 자생하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베어졌고 그 후로는 민둥산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민둥산으로 있었던 다산초당 주변은 광복이후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때는 전국적으로 민둥산이었던 산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산림녹화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됐던 시기였다. 1960년대 정부의 주도아래 산림녹화사업의 일환으로 다산초당 주변에도 삼나무를 식재하기 시작했다. 당시 삼나무는 목선(木船)을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효용가치가 높은 경제수림이었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산에 당시로서는 돈이 됐던 삼나무를 곳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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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안 기자
2019.06.27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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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15일 강진군의회가 출범하면서 지방자치시대가 본격 시작됐다. 그해 10월에 열린 강진군의회 군정질문에서 일명 다방의 봉봉영업사건이 이슈로 등장했다. 당시 A의원은 “관내에도 미성년자를 불업 고용, 강제 접대부 노릇을 시킴으로서 한 여고생을 죽음의 구렁으로 몰아넣었던 충격과 봉봉 영업 행위로 인한 다방업소 영업정지의 교훈은 또 하나의 충격이 아닐 수 없다”며 “일련의 사고에 대한 경위와 반성과 교훈, 재발 예방 사후대책을 세우라”고 집행부에 다그쳤다.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다소 생소한 봉봉영업이라는 말이 나온다. 봉봉영업은 다방 마담이나 여성 종업원을 식당이나 유흥업소 등의 자리로 내보내어 시간적 소요의 대가로 일정금액을 받는 행위로 일명 티켓영업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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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안 기자
2019.06.20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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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군수로 잘 알려진 박재순 군수는 1993년 6월 26일 부임해 1994년 5월 5일 이임하는 날까지 ▲참봉사행정 구현 ▲지역경제 활성화 ▲UR협상에 따른 농어민 피해 최소화 ▲군민이 더불어 함께 사는 건강하고 희망찬 사회조성이라는 4대 캐치프레이즈 아래, 새벽부터 자전거를 타며 가로등을 끄는 일부터 일과를 시작하여 밤낮 종횡무진 방문행정을 펴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군수였다. 11개월이라는 짧은 재임기간임에도 많은 일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문화관광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다.박 군수는 나에게 문화관광분야에 해박하다며 탐방객들에게 문화해설을 도맡게 했다. 그만큼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나를 신임하셨던 것 같다. 군청 각실과에서 입안하는 서류에 강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내용이 있을 경우 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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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안 기자
2019.06.13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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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군의 역사를 기록한 책들을 살펴보면 1900년대 전후에 기록한 금릉읍지(연대미상)와 강진군읍지(연대미상), 강진군지(1923년)등이 있다. 이들 책에는 연혁과 방리(坊里), 산천, 유적, 선생안(현감) 등 개략적인 내용이 실려있다.반면 1978년 발행된 ‘강진향토지’는 정채균 군수 재임 때 강진의 역사, 지리, 정치, 문화, 종교, 고적, 전설 등 각 분야에 걸쳐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변천과정을 수록한 강진군의 종합 역사서로 평가받고 있다.1993년 발행된 ‘강진군정 50년사’는 역사서의 성격을 띠면서 해방이후부터 1992년까지 강진군에서 추진했던 중요한 자료들을 엮는다는 데 중점을 두고 발행된 역사서였다. 강진향토지는 강진의 전반적인 것들을 다뤘다면 군정 50년사는 군청에서 일어난
윤순학의 향토문화가 자산이다
오기안 기자
2019.06.05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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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비 부족으로 신축공사가 중단된 채 방치되고 있었던 재향군인회관을 강진군에서 매입하게 되면서 강진군 도서관은 오늘날의 모습으로 바뀌게 됐다. 이때 국비 2억원과 도비 6천500만원 등 지원금과 군비를 더해 5억여원으로 재향군인회관 건물과 토지를 매입해 도서관현대화 사업을 마무리했다. 당시 문병일 군수와 여러 공직자들의 노력으로 도서관이 확장되면서 이용 편의는 물론 고시공부방과 어린이 공부방, 전통예절실 등 공간 확보로 인재육성 및 군민의 삶의 질 행상에 기여했다. 도서관 현대화 사업 공사가 끝나고 문병일 군수는 1992년 1월 7일 강진군의회에서 도서관 현대화 사업 이후 모습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일반 열람실을 열어 보니까 한 100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문을 열고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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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9.05.3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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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군민들이 마음의 양식을 쌓는 공간인 강진군도서관. 도서관은 1965년 설립됐다. 제13대 김재호 군수가 부임한 후 군립도서관설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도서관 설립을 위해 유재의씨가 거액을 희사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며 참여했다.처음 강진군립도서관이 설립된 곳은 현재 청소년문화의집 부지였다. 약 198평 규모의 목조기와 형태의 건물이었다. 당시에 문학역사관련 2,300권, 과학관련 1,290권 등 총 5,400여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때 도서관은 열람실도 갖추고 있어 일반인과 학생들용으로 약 30평 공간에 100석이 마련돼 있었고 어린이들을 위한 10평 공간에 40석이 있었다. 이때 강진군 도서관은 전국에서 3번째로 지어졌으며 전국 군단위에서는 최초였다. 그만큼 강진군민들의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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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안 기자
2019.05.23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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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부터 1997년까지 약 70억원의 사업비가 투자돼 주경기장과 게이트볼장, 테니스장, 배드민턴장 등을 갖춘 종합운동장 시설이 들어서게 됐다. 당시에는 여수시보다 더 규모가 큰 운동장이었다. 종합운동장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체육진흥 사업은 계속됐다.요즘 보면 종합운동장의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제1실내체육관은 종합운동장이 들어선 이후인 1998년 공사가 시작됐다. 실내체육관은 건축면적 3,625㎡(1,097평), 연건축면적 7,687㎡(2,325평)으로 지하 2층과 지상 2층 규모의 다목적실내체육관이었다. 지하 2층에는 수영장 등이 들어섰고 지하1층에는 체력단련장, 그리고 지상에는 좌석을 갖췄다. 1998년 7월 사업을 시작해 2002년 3월에 완공됐고 사업비는 국민체육진흥공단
윤순학의 향토문화가 자산이다
오기안 기자
2019.05.16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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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따뜻해지면 종합운동장에서는 크고 작은 스포츠대회가 잇따라 개최되고 있다. 전국대회 규모의 많은 행사가 종합운동장에서 개최되면서 대회기간동안 선수단과 가족 등 많은 인원들이 강진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긍정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강진의 숙박시설과 식당들의 효자노릇을 하고 있는 종합운동장은 88올림픽 직후 조성됐다. 88올림픽이 끝나고 뜻있는 원로 체육인사와 군민들 사이에서 체육진흥을 위해 체육기금과 종합운동장을 조성해야 된다는 여론이 뜨거운 열기처럼 솟아올랐다. 문제는 조성을 위한 기금이었는데 강진군체육회에서 주도적으로 나서서 모금활동을 펼쳤다. 강진군체육회에서는 1989년부터 1990년까지 서울, 부산, 광주, 목포 등 출향기업인 등을 방문한 덕분에 112명이 동참해
윤순학의 향토문화가 자산이다
오기안 기자
2019.05.09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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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강진의 관광명소가 된 군동 금곡사 벚꽃길은 1990년초반 군청 공직자들의 손으로 만들고 가꾼 길이다. 강진시범가로 꽃길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으로 1992년부터 1993년까지 군동과 작천면 일대에 벚꽃을 식재했던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봄철을 맞아 마을단위로 관광을 떠나곤 했는데 주로 진해 군항제와 전주~군산을 이어지는 군산백리길, 영암읍~구림마을 벚꽃길 등 주로 외지로 꽃구경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이에 강진군에서는 봄철 관광객 유치와 군민들이 가까운 곳에서 풍광을 즐기고 심신을 회복하는 명소로 만들기 위해 군청 직원들이 직접 나무를 심고 명찰을 부착해 가꾸는데 심혈을 기울였다.이 사업은 1992년 4월 6일부터 군동면 호동마을에서 시작해 금곡사에 이르기까지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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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안 기자
2019.05.02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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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16일 대통령직선제가 실시됐고 이 선거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됐다. 그 이듬해인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정부가 출범했다. 이때는 조직 외연 확대가 가장 큰 특징이었다.이때 강진군청은 1실 9개과, 사업소 4개(농촌지도소, 보건소, 군립도서관, 청자사업소), 10개 읍면으로 행정조직이 구성돼 있었다. 노태우 정부의 조직 확대 방침에 따라 강진군청은 2실 13개과, 의회1과 1전문위원, 사업소 5개(농촌지도소, 보건소, 강진만간척사업소, 군립도서관, 청자사업소), 11개 읍면으로 크게 확대됐다. 이때 증설된 실과를 살펴보면 1실, 4개과, 1사업소, 의회 1과와 전문위원 1명, 1개면 등이었다. 과가 늘어난 만큼 고위 공직자들의 승진인사에도 숨통이 트였다. 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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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안 기자
2019.04.25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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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만간척사업소는 1989년 11월 20일 강진군 본청내 사무실에 설치됐다. 이후 1998년 9월 1일부터는 건설과 내에 간척TF팀으로 존속됐으며 2004년 10월 31일 완전히 폐지됐다.당시 사업소에는 행정5급 소장과 행정 6급 관리계장, 토목 6급 공무계장과 직원 4명이 함께 근무했다. 이들은 용지매수와 보상, 용지조성 매각 및 대금징수 업무와 조성농지의 분배 및 일시 이용농지 관리, 각종 공사 설계와 지도감독 등의 업무를 맡았다.새롭게 사업소가 신설됐지만 군청내에서 근무하겠다는 희망자가 없었다. 이에 군에서는 공모제로 바꿔봤지만 그나마도 응모자가 없어 2년 근무한 자에 한해 기획계장으로 발령내주겠다고 하고 인사를 단행했다.2년후 군수가 바뀌었지만 인사위원회의 의결사항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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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안 기자
2019.04.1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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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마량 영동제 산불 사건이 일어난 당시 군수에 얽힌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화재가 발생했던 당시 부임했던 강진군수는 재임했던 곳마다 대형 산불이 발생했다고 해서 별명이 ‘불군수’라는 닉네임이 붙여질 정도였다. 강진군으로 부임하자마자 산불을 막기 위해 산불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마량 영동제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산불이 이어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화재와 관련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 군수는 부임후 7개월만에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됐다.1988년 마량면 대형 산불이후 1995년 6월 27일 민선 1기 전국동시지방선거 일에도 산불이 발생했다. 이때 군동면 삼신에서 불이 시작돼 칠량면 모재골과 군동면 덕천마을 뒷산에 이르기까지 이틀동안 산불이 발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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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안 기자
2019.04.1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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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가 다녀간 이후 그해 9월 17일 1988년 서울올림픽이 화려하게 개막해 10월 2일날 폐막했다. 이때 강진군민들을 비롯한 전국에서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냈고 159개국중에서 종합 4위를 기록하는 등 성공적인 대회였다는 평가를 받아 대한민국의 위상이 드높아졌다.이때 올림픽을 기점으로 강진군에서도 군민의식이 향상되고 자가용 차량이 늘어났으며 핵가족 시대로 접어드는 계기가 됐으며 강진군이 문화관광지로 전국에 명성을 알리기 시작했던 때였다.강진군은 산과 농토, 바다가 있어 천혜의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고 전남도내에서도 문화유적이 가장 많이 분포돼 있는 유서깊은 고장이다. 특히 임업분야에서는 독림가로 알려진 초당약품 고 김기운 회장이 1968년부터 칠량면 명주리에 621㏊를 매입해 편백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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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안 기자
2019.04.04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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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후반 가장 이슈는 민주화운동과 함께 국제 스포츠경기대회 유치였다. 1981년 9월 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제24회 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되는 것으로 결정된지 2달 후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유치가 결정됐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엄청난 쾌거였다.이에 중앙정부에서는 당연히 국제스포츠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 기반 조성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강진으로도 이어지게 됐다. 이 업무를 담당한 군청 내무부에서는 국제대회를 앞두고 지역내 주요 도로변의 경관조성에 모든 행정력을 집중했다. 1985년 강진군에는 새마을과가 있었는데 도로변 주요 경관조성을 위해 새롭게 국토미화계를 신설했다. 이로써 새마을과에는 새마을계와 건전생활계와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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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안 기자
2019.03.28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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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후반은 전국적으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시기로 혼란스러웠다. 이때 강진에서는 강진읍교회가 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군부세력에 의해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광주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저항운동이 거세게 불었다. 강진읍 중심에 있었던 강진읍교회는 1980년대 중반에 장년부가 700여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큰 교회였다. 강진읍교회에서 수요예배와 주말예배를 통해 당시 목사님이 민주화 운동의 당위성을 신도들을 비롯한 강진의 지식인들에게 역설했다.강진읍교회는 1913년 설립됐다. 설립 직후인 1919년 4월 4일 강진읍교회 정문에 있는 종소리를 시작으로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보은산 중턱 비둘기바위에 태극기가 올라가면서 읍내장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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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안 기자
2019.03.21 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