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 선생 가족들 기억 더듬어 안채와 문간채 복원했다

영랑생가의 복원이 잘못됐다는 여론이 일어나자 군청 문화관광계 직원 3명이 각자 사포를 들고 1달여 동안 기둥의 페인트 벗기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페인트를 벗겨내 전문가로 하여금 오래된 나무처럼 느낄 수 있도록 다시 색칠해 본래의 색상으로 되돌렸다. 그제서야 여론이 잠잠해졌다.

또 한번은 영랑생가 후면에 보강토를 했던 곳이 장마철에 토사가 흘러내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비에 씻겨내려간 토사가 영랑생가의 부엌까지 밀려내려와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이 사고로 충격을 받은 나는 옛 방식대로 생말뚝 500여개를 피해지 부근에 박아 넣고 흙을 채워 지반을 안정화시켰다. 다행스럽게도 이후에는 토사 유출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영랑생가 복원과정에서 빌라신축 문제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영랑생가와 맞닿은 서편에 빌라신축이 진행됐다. 건축주는 건축허가를 위해 문화재현상 변경신청을 접수했다.

이후 강진군에서 검토했으나 불허할 명분이 없어 고민하다가 결국 박재순 군수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박 군수는 깜짝 놀라며 문화재법에 저촉은 되지않지만 영랑생가를 보호해야한다는 생각에 건축주에게 층수 조정을 부탁했다. 이때 문화재법은 문화재 경계로부터 15m 밖은 허가가 가능했던 시대였다.

박 군수는 층수 조정을 위해 대표자와 협의할 것을 지시했고 나는 건축주 K대표가 만났다. K씨는 상부층 1층을 없앨 경우 이윤이 없다며 난감을 표시하며 자리를 피했다.

나는 사람이 하는 일인데 해결이 될 것이라는 일념으로 몇 차례 더 찾아가 강진 관광산업의 1번지로 각광 받을 영랑생가를 위해 양보해 줄 것을 요청했다.
 
건축주는 강진의 관광산업 발전이라는 큰 뜻을 위해 과감히 1층을 낮춰 건물을 지어주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3년 4월 26일 개막한 제8회 영랑문학제에서 은퇴후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전석홍 시인이 시문학특별상을 수상하게 됐다.

전 시인은 전라남도지사로 재직시절 영랑생가 매입과 지방문화재 지정을 한 당사자로서 감회가 새롭다며 문화관광지로 발돋움된 영랑생가를 많은 국민이 찾아오기를 희망한다며 강진군의 발전을 기원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1993년에는 안채와 문간채 복원이 이뤄졌다. 사업기간은 1993년 6월부터 12월까지 6개월로 국비 5천만원으로 진행됐다.

영랑 선생이 서울로 이사를 가면서 대부분 건물이 철거돼 흔적도 찰아볼 수 없었다. 당시에는 골목길을 통해 안채와 사랑채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에 강진군에서 생가주변 환경정비 차원에서 ‘강진읍 탑동문화마을 조성’ 계획서를 문화부에 공모신청해 국비를 확보하게 됐다.

영랑 선생과 나이가 비슷한 강진읍 원로들을 찾아가 그분들의 기억을 더듬어 위치와 집의 구조 등을 파악했다. 하지만 사람들마다 형태와 구조를 다르게 기억하고 있어 사업 진행이 어려웠다.

영랑 선생 가족들의 고증이 절실한 순간이었다. 이에 나는 후손들을 수소문했고 그 결과 4남인 김현태씨가 단국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음을 파악했다.

편지로 강진군의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몇일 후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3남 김현철씨가 배치도면을 자세히 그려서 강진군에 보내왔다.

문간채의 형태와 구조가 강진 원로의 기억과 유족들의 기억이 달랐지만 유족의 고증에 따르기로 하고 문화재 전문위원들의 심의를 거쳐 전라남도의 승인을 받았다.

문간채 위치가 불투명해 조심스럽게 유구 조사를 실시하자 문간채 방으로 보이는 곳에서 까맣게 그을린 구들이 묻혀 있음을 발견해 쉽게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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