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생가는 많은 공무원들의 열정과 땀으로 만들어졌다

영랑생가의 안채와 안채 문간채가 복원된 뒤 마당에도 흙으로 덧채움을 했다. 예전 농촌집의 마당은 곡식을 햇볕에 말리는 등 농산물과 관련된 공간으로 활용되고 되었기 때문에 4-5년에 걸쳐 주기적으로 흙을 덮어줬다.

이는 영랑생가도 마찬가지였다. 빗물에 흙이 씻겨내려가버린 영랑생가 마당에 흙을 보충하다보니 비가오는 날이면 마당에 비가 고이고 질퍽거려서 탐방객들의 불편이 컸다.
 
나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1993년 11월 일요일 쉬는 날을 골라 현 홍보팀장인 김종윤 후배와 함께 칠량 삼흥천에서 돌을 가져와 문간채와 안채를 연결하는 통로에 설치했다. 사업비가 없어 담당 공무원이 직접 설치해야 했던 시대였다.

마당에 돌을 설치한 뒤 몇 개월이 지난 후 한옥에 조예가 깊다는 어떤 한 사람이 찾아오더니 통로를 돌로 설치해 놓은 곳은 드물다며 원래부터 있었는지 넌지시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는 두루뭉실한 말로 대신했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히 남아있다.

이렇듯 영랑생가는 30년이 훌쩍 지난 세월이지만 수많은 공무원들의 열정과 땀이 배어 있는 곳이다. 문간채 공사와 함께 안채 후정 정비와 마당앞 샘과 장독대 복원사업도 이뤄졌다. 안채 후정의 언덕배기가 70% 정도의 급경사로 이루어져 있어 해빙기 붕괴사고가 우려됐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경사지에 대해 절토와 보강토 공사를 추가로 진행했다. 마당앞 새암(샘)은 콘크리트로 변형됐던 것을 자연석으로 복원했고 장독대는 안채 부엌 옆으로 복원했다.

2012년부터 2013년까지는 사랑채 문간채와 담장, 중문을 복원했다. 사업비는 국비1억400만원, 군비4천500만원 등 총 1억4천900만원이었다.

복원하게 된 배경은 일반적으로 전통적으로 안채가 여성들의 공간이라면 사랑채는 남성들의 공간이었다.
영랑생가뿐 아니라 대부분의 가옥들도 마찬가지였다. 생가의 완전한 복원을 위해서는 사랑채에 딸린 문간채와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 짓는 담장과 중문 복원이 필수적이었다고 판단했다.

문화재 사업을 위한 국비 확보를 위해 문화재청을 방문해 유족이 생존해 있을 때 복원사업이 마무리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나는 문화관광 업무를 오랫동안 맡았기 때문에 문화체육관광부와 문화재청 직원들과의 친분이 있었다.

때마침 잘 알고 지내오던 직원이 중요민속문화재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나는 담당공무원에게 영랑생가 전체가 보이는 사진을 넣고 사용하고 있는 명함을 보이면서 상세히 설명한 뒤, 팀장, 과장에게도 자세히 부연 설명을 한 결과 내년도 사업에 반영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사랑채 문간채와 담장 복원사업 추진중 문화와 관련된 단체들의 일부 회원들이 군수와의 면담과정에서 70여년생 돈나무를 이식할 경우 고사할 우려가 있고,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짓는 장을 굳이 예산을 투입하면서 복원해야 되겠느냐면서 복원을 반대했다. 이때 회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더욱 심혈을 기울이는 계기가 됐다.

나는 영랑 김윤식 선생과는 인연이 깊은듯 하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모란이 피기까지는’ ‘마당앞 새암’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등 영랑의 시를 접했다. 공직에 들어선 후에는 영랑생가 복원 그리고 시문학파기념관 건립사업에 실무자로서 참여했다.

영랑 김윤식 선생이 살던 당시의 모습대로 생가를 복원할 수 있었고 시문학파를 아우르는 기념관을 건립해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어 나에게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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