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 보호 위해 자식 같던 삼나무 베어내야만 했다

다산초당 주변은 원래 녹차나무 자생지로 유명했던 곳이었다. 예부터 이 곳 주변을 다산(茶山)이라고 불렸다. 정약용 선생의 호도 여기에서 연유했다. 윤방현 선생에 의하면 다산초당 주변은 아름드리 적송나무가 자생하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베어졌고 그 후로는 민둥산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민둥산으로 있었던 다산초당 주변은 광복이후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때는 전국적으로 민둥산이었던 산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산림녹화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됐던 시기였다. 1960년대 정부의 주도아래 산림녹화사업의 일환으로 다산초당 주변에도 삼나무를 식재하기 시작했다.

당시 삼나무는 목선(木船)을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효용가치가 높은 경제수림이었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산에 당시로서는 돈이 됐던 삼나무를 곳곳에 식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목선이 사라지고 철선이 등장했고 FRP(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수지가 대중화되면서 삼나무의 수요는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FRP 수지는 선박의 선체나 갑판, 자동차나 요트 등을 제작하는 데 주료 사용한다.

삼나무가 세월이 흐르면서 무성하게 번성하기 시작했다. 1993년 다산초당 주변에는 이미 수백그루에 달하는 삼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나무들이 커가면서 가지들에 의해 다산초당이 파손될 우려가 높았고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있어 나무건물이었던 다산초당은 습기에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해결방법은 벌목밖에 없었다. 나는 윤방현 선생을 만나 다산초당 주변 삼나무 벌목 계획을 전하고 설득해야만 했다. 이때 나는 다산초당 보호 차원에서 삼나무 벌목은 반드시 필요함을 설명했다. 설득 덕분인지 윤 선생은 필요성에는 동의했지만 농협중앙회 간부로 퇴직한 금융인답게 삼나무 값은 반드시 주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때 나는 벌목하고 나무를 목재상에게 주변 나무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윤 선생의 답변을 들은 나는 삼나무 벌목작업을 위해 지역 목재상에게 벌목을 요청했다. 하지만 목재상들은 다산초당 주변까지 오르기도 쉽지 않고 그곳에서 나무를 베어 아래로 운반하는 일도 쉽지 않아 나무를 공짜로 준다고 해도 할 수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나무값을 받을 수 없게 돼 이런 상황을 윤 선생에게 알렸다.

윤 선생은 나에게 하는 수 없다며 벌목을 승낙해주셨다. 간신히 목재상을 설득해 먼저 1차로 다산초당 주변에 있는 삼나무 70여 그루부터 벌목하기 시작했다. 다산초당과 바로 인접해 있었던 탓에 다산초당의 파손이 우려됐다. 이후 2차로 2차로 다산초당 진입로 주변 삼나무 50여 그루와 서암(茶星閣) 앞에 지름 50~60㎝ 크기의 상수리 나무를 비롯해 80여 그루를 벌목했다.

총 200여 그루의 삼나무와 상수리 나무를 베어냈다. 나무를 벌목하기 전에는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햇빛이 들어올 수 없어 습기에 취약해 다산초당 손상 우려가 높았다. 초당 주변 일부 나무들을 벌목하면서 초당 주변으로 햇빛이 들어오게 됐고 습기 관리에 용이해져 문화재보호 관리도 체계적으로 할 수 있게 됐다.

이때 윤 선생은 나에게 “자식같은 나무를 벌목해 마음은 아프지만 대신 다산초당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선생의 이 말씀은 다산초당을 찾을때면 아직도 나의 귓가에 생생하다.

이때 과감하게 벌목을 결정한 박재순 당시 군수의 혜안과 실무자들의 노력이 있었고 특히 고(故) 윤방현 선생의 결단이 없었다면 다산초당 주변은 삼나무로 가득 차 아직도 문화재보호 관리에 어려움이 컸을 것이다.

이때 윤 선생이 결단을 내리지 못해 벌목을 하지 못했더라면 세월이 흐른 뒤에는 더더욱 나무들이 번성해 벌목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강진군민의 입장에서도 감사한 일이 아닐수 없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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