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생가 복원사업에 전석홍 도지사 역할 컸다

다산 정약용과 함께 강진을 대표하는 인물인 영랑 김윤식. 현재 군청 인근에 영랑생가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강진군에서 복원하기 이전 영랑생가는 오늘날의 모습이 아니었다. 영랑 선생이 1948년 공보처출판국장으로 발령받아 서울로 이사가면서 초대 민의원이었던 양병일에게 최초 이전됐다.

그후 전매되고 나서 안채 문간채와 사랑채 문간채, 그리고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 짓는 담장과 협문이 사라지고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었다. 특히 안채는 1970년대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초가지붕을 시멘트 기와로 바뀌고 일부 구조가 변형됐다.

이에 강진군에서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영랑생가를 매입했다. 1985년 12월에 군청 건설과에 근무했던 최찬명씨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전액 도비로 3천550만원을 들여 영랑생가를 매입했다. 공무원 봉급을 기준으로 오늘날 금액으로 환산해보면 약 3억원 정도이다.

이때 전액 도비로 영랑생가를 매입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도지사였던 전석홍 도지사 덕분이었다. 1985년경 전석홍 전라남도지사가 강진군을 방문하게 됐다.

이때 서형환 강진군수가 도지사에게 현안사업으로 영랑생가 매입비를 건의했다. 건의가 받아들여지면서 전액 도비로 매입하게 된 것인데 전석홍 도지사의 처가가 강진이었기 때문에 흔쾌히 매입비를 지원해준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매입이 끝난후 강진군에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 신청해줄 것을 요청했고 1986년 2월 7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됐다. 당시에 근현대 인물들의 생가에 대해서는 문화재로 지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시문학파의 거두라는 논리와 전석홍 도지사의 적극적인 의지로 시인의 생가로서는 최초로 문화재로 지정됐다. 강진군의 입장에서는 전석홍 도지사가 아니었다면 영랑생가 복원도 쉽지 않았고 문화재 지정도 어려웠을 것이다. 영랑생가 문화재 지정 이후 근현대 시인의 생가가 문화재로 지정돼 효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강진군에서는 영랑생가를 옛 모습으로 복원하는 사업이 대대적으로 시작됐다. 사업은 1991년 12월부터 1992년 2월말까지 약 3개월간 진행됐다. 당시 사업비는 국비 2천만, 도비 1천만, 군비 1천만 등 총 4천만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현재 금액으로 환산해보면 3억원에 조금 못 미치는 금액이다.

사업은 새마을사업으로 바뀐 시멘트 기와를 예전 모습인 초가 지붕으로 바꾸고 부식된 기둥과 서까래를 교체했다. 변형된 건물 구조를 원래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 중마루를 설치하고 부엌을 교체했으며 벽장도 설치했다. 시멘트로 된 기단 부분은 자연석 기단으로 바꿨다.

복원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안채 사량문 묵서에 적힌 기록을 토대로 이뤄졌다. 이 곳에는 대한광무십년병오삼월초십일립주(大韓光武十年丙午三月初十日立柱)라는 기록이 적혀 있다.

이는 상량문이 1906년 3월 10일 건립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록을 보면 기존의 집을 중건할 때 대들보를 새 부재로 교체했는지 아니면 신축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기때문에 앞으로 이를  알아내는 것이 숙제이다.

이에 대해 복원과정에서 영랑 선생의 3남인 김현철 전 시문학파관장에 의하면 영랑 선생이 출생한 집이라고 고증했으나 영랑 선생은 음력 1902년 12월 18일에 출생한 것으로 보아 중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영랑생가 복원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화가 있었다. 복원이 끝나고 기존 기둥과 새로 끼운 기둥, 서까래의 색상이 현저하게 다르게 나타났다. 특히 기둥은 페인트로 덧칠돼 있어 보기에 흉할 정도로 질감이 좋지 않아 복원이 잘못했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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