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어 있던 보물 1683호 다산사경첩 세상의 빛을 보다

윤방현 선생이 갖고 있는 보물1683호로 지정돼 있는 다산사경첩의 복사본. <사진제공=윤순학>
자전거 군수로 잘 알려진 박재순 군수는 1993년 6월 26일 부임해 1994년 5월 5일 이임하는 날까지 ▲참봉사행정 구현 ▲지역경제 활성화 ▲UR협상에 따른 농어민 피해 최소화 ▲군민이 더불어 함께 사는 건강하고 희망찬 사회조성이라는 4대 캐치프레이즈 아래, 새벽부터 자전거를 타며 가로등을 끄는 일부터 일과를 시작하여 밤낮 종횡무진 방문행정을 펴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군수였다. 11개월이라는 짧은 재임기간임에도 많은 일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문화관광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박 군수는 나에게 문화관광분야에 해박하다며 탐방객들에게 문화해설을 도맡게 했다. 그만큼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나를 신임하셨던 것 같다. 군청 각실과에서 입안하는 서류에 강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내용이 있을 경우 나의 싸인이 없으면 결재를 안 해줄 정도였다.

박 군수는 취임 후 첫 문화관광 업무보고에서 정다산유적지, 무위사, 고려청자요지, 영랑 김윤식 생가 등 수많은 문화유적지가 많음에도 홍보가 미흡하다며 종합대책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일례로 정다산유적지중 다산초당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음에도 강진에 온 탐방객들이 선생의 유묵(遺墨)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소장자와 협의해 기필코 세상 밖으로 나와 빛을 보게 할 것과 다산초당 주변에 식생하고 있는 삼나무로 인해 항상 습도가 높아 건물보호는 물론 탐방객들의 불편이 크므로 나무를 문화관광계장인 필자에게 제거할 것을 지시하면서 영랑시집도 함께 발간하도록 주문했다.

다산 선생은 도암 귤동마을 다산초당 입구에 산생의 18명 제자 중 한 분인 성균진사 윤종진의 집터를 잡아주고 귤송당(橘頌堂)이라 이름을 지어줬다. 윤종진 진사의 5대손인 윤방현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고 농협중앙회 간부로 퇴직하기까지 잠시 고향을 떠난 것 외에는 줄곧 귤송당에 거처하며 다산의 많은 유물을 보관 중이었다.

윤 선생의 장남인 윤영상 다산금속 회장은 자서전에서 “아버지는 광주농고를 졸업하신 뒤로 평생 농협에서 근무하셨다. 탁월한 업무능력, 결단력, 성실성, 언변, 판단력 때문에 주위에 칭찬이 자자했다. 7남매 모두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직장생활과 별도로 양조장까지 경영하였던 그분의 책임감, 성실성, 유능함, 추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아버지의 성품에 대해 설명했다. 이를 보더라도 윤 선생을 쉽게 접근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군수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다산사경첩 복사본 제작을 반드시 관철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윤방현 선생을 찾아갔다. 군청 문화관광계장이라고 인사를 드리고 해남윤씨 28대손이라고 말씀드렸더니 같은 일가라는 이유 때문이었는지 생각보다 의외로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정다산유적지 보호관리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가 다산사경첩 제작에 대해 강진군의 입장을 설명하고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잠시 생각을 하시더니 유물 몇 점을 보여주겠다면서 거처하는 방의 유물보관 문갑을 열고 다산사경첩 등을 꺼내어 보여주셨다.

앞표지의 두꺼운 창호지에 다산사경첩이라고 씌어있었다. 책장을 넘기자 다산 선생의 친필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나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하지만 친견한 뒤 다산사경첩의 복사본 제작은 할 수 없다며 승낙해주지 않았다.

특히 지금까지 원본을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았고, 1960년대말 다산사경첩 일부에 대해서만 사진으로 밖에 공개하지 않았다며 거절이유를 설명해주시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포기하지 않고 복사본 제작 승낙을 받기위해 수개월동안 계속 설득했다.

그러던 중 1993년 가을 내가 귤송당을 방문했을 때 선생께서 녹차 한 잔 건네면서 “내일 아침 나와함께 광주인쇄소로 가서 다산사경첩 진본 사진을 찍도록 하세”라며 넌지시 웃으면서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하늘을 날 것처럼 기분이 기뻤다. 요즘에도 당시를 회상하면 엄청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날 아침 문화공보실 차량으로 귤송당을 방문해 선생을 모시고 광주로 향하는 도중 강진읍 도원마을에 이르러 “나를 강진공용터미널에 내려주소. 자네는 해남윤씨 일가이기 때문에 다산사경첩을 믿고 줄테니 일을 보고 곧바로 돌려주시게”라며 뜻하지 않게 진본을 나에게 건내주셨다.

그러면서 “사실은 내가 별도로 다산사경첩을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에 한학의 최고 권위자에게 다산사경(茶山四景), 순암호기(淳菴號記, 윤종진의 아명), 다산제생문답증언문(茶山諸生問答證言文)을 번역해 놓았다”며 번역원고지도 함께 주셨다.

나는 그길로 광주 전일출판국을 방문 일대일 배율로 사진을 촬영한 뒤 곧바로 귤동 자택을 찾아가 반납했다. 진본은 무늬가 있는 화선지 바탕위에 붓으로 쓴 까닭에 글씨를 또렷이 볼 수 없어 꼬박 이틀 동안 무늬를 지운다음 복사본을 제작했다.

윤방현 선생의 뜻에 따라 한 권에 인쇄비용 1,000원만 받기로 결정하고 1,000권을 제작해 탐방객들에게 판매했다. 이로써 다산 선생의 친필 복사본이 시중에 유통되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다산사경첩과 병행해서 영랑시집도 창간호 원본을 토대로 제작해 1,500원에 판매하여 호응을 얻기도 했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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