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의원의 날카로운 질문에 다방 배달 문화 바뀌었다

1991년 4월 15일 강진군의회가 출범하면서 지방자치시대가 본격 시작됐다. 그해 10월에 열린 강진군의회 군정질문에서 일명 다방의 봉봉영업사건이 이슈로 등장했다.

당시 A의원은 “관내에도 미성년자를 불업 고용, 강제 접대부 노릇을 시킴으로서 한 여고생을 죽음의 구렁으로 몰아넣었던 충격과 봉봉 영업 행위로 인한 다방업소 영업정지의 교훈은 또 하나의 충격이 아닐 수 없다”며 “일련의 사고에 대한 경위와 반성과 교훈, 재발 예방 사후대책을 세우라”고 집행부에 다그쳤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다소 생소한 봉봉영업이라는 말이 나온다. 봉봉영업은 다방 마담이나 여성 종업원을 식당이나 유흥업소 등의 자리로 내보내어 시간적 소요의 대가로 일정금액을 받는 행위로 일명 티켓영업을 뜻한다. 다시 말해 커피 등을 대신해 봉봉 캔음료를 제공하는 의미에서 봉봉영업이라 불렀다.

당시 관내 유흥업소는 24개였고 종업원은 17명이었다. 종업원이 없는 곳도 많았다. 그중에서 다방 업소는 55개소였고 총 51명의 종업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1991년은 노태우 대통령 취임 후 사회기강을 바로 세운다는 명목아래 ‘새질서, 새생활 실천 운동’을 강력히 전개하던 때였다.

도에서 매주 1회 정례적 시장 군수회의를 개최하고 추진상황을 점검하는 등 시‧군정의 최우선시책으로 시행할 정도였다. 전라남도와 도내 시군은 이 운동의 일환으로 사회 각분야의 불법 탈법행위를 대대적으로 단속활동을 펼쳤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서 전라남도에서도 시군합동단속반을 가동하고 주야간 단속활동했다. 이 때 강진군에서 10개 다방에서 봉봉영업이 이뤄진 것을 확인하고 1개월 영업정지를 처분을 내림으로써 사회적 이슈가 됐던 것이다.

군의원의 군정질문에 당시 군수는 답변을 통해 국가 사회적으로 새질서, 새생활 실천 운동‘이 한창 전개되고 있는데 1991년 7월 유흥업소에서 불법 고용된 미성년자의 불상사와 다방업소의 봉봉영업행위가 있음에 군민들에게 사과하고 앞으로 불법 탈법행위가 근절되도록 지도 감독을 철저히 하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강진군에서만큼은 앞으로는 식사를 하기 전이나 식사 후에라도 다방 종업원들을 식당이나 술 먹는 자리로 부르지 않도록 강력히 하겠다고 의지를 표명했다.

이때 직장인과 민간인 구분없이 앉았다하면 육백, 삼봉, 고도리 화투를 즐겼다. 또 식사를 마치면 당연하게 다방에서 차를 배달시켜 먹었다.
 
이때 사람들 사이에서는 “밥사고 차 안사면 대접무효”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차 배달문화는 사회에 깊숙하게 뿌리내려져 있었다. 이는 군청을 비롯한 대부분의 직장 사무실, 작업장, 논밭을 가리지 않고 차 배달을 시켜 먹는 일이 다반사였던 것이다.

승용차 보급률이 낮았던 시절이었기에 다방업주는 오토바이 운전자를 고용해 종업원을 태우고 목적지까지 차 배달을 하는 시대였다. 당시 강진을 대표하는 전통다방으로 건전영업을 표방했던 영다방, 산호다방, 모란다방, 신신다방 등은 90년대 전후로 문을 닫았다.

차 배달 문화와 함께 화투놀이는 점심 저녁을 가리지 않고 성행. 식당은 화투와 깔판을 비치해야할 정도로 관행적인 놀이문화로 자리잡던 시대였다. 군수는 심지어 군단위 기관사회단체장 월례회의 때도 차 배달을 했었던 시대였다.

이런 분위기속에 91년 당시 군의원의 날카로운 군정질문에 군수는 떳떳하고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차 배달을 뿌리칠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삼자며 앞으로 다방 종업원 부르지 말고 다방에 가서 차를 마시기로 결의할 정도였다.

이후 기관사회단체장은 물론 임직원에게까지 파급되어 차 배달영업은 점차적으로 감소해 IMF구제금융 이후 차 배달영업은 물론 화투놀이도 사실상 자취를 감추고, 심심풀이 노인들의 놀이문화로 바뀌었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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