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읍교회를 중심으로 민주화운동과 농민운동이 시작됐다

1970년대 중반 강진읍 시내의 모습이다. 가운데 하얀색 원안에 있는 건물이 바로 강진읍교회로 지금과는 모습이 다르다.(사진제공 : 윤순학)
1980년대 중후반은 전국적으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시기로 혼란스러웠다. 이때 강진에서는 강진읍교회가 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군부세력에 의해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광주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저항운동이 거세게 불었다.

강진읍 중심에 있었던 강진읍교회는 1980년대 중반에 장년부가 700여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큰 교회였다. 강진읍교회에서 수요예배와 주말예배를 통해 당시 목사님이 민주화 운동의 당위성을 신도들을 비롯한 강진의 지식인들에게 역설했다.

강진읍교회는 1913년 설립됐다. 설립 직후인 1919년 4월 4일 강진읍교회 정문에 있는 종소리를 시작으로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보은산 중턱 비둘기바위에 태극기가 올라가면서 읍내장터에서 천둥치듯 독립만세 소리가 강진 전역에 퍼져나갔다.

또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는 5월 21일부터 23일까지 윤기석 목사를 중심으로 시위대를 지원하는 거점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강진읍교회는 강진의 근현대사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고 특히 교회 입구의 종은 상당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렸던 강진읍교회의 종탑. 향토유물로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강진읍교회의 종탑은 민족혼을 깨운 역사성을 가진 유물이므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보존하고 관리해 후손들에게 이를 알렸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민주화운동과 함께 강진에서도 농민조직들이 결성됐다.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에는 전국 소수의 군단위에서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가 활동했다. 강진에서도 70년대 가톨릭농민회가 결성돼 활발히 활동했고 1983년 기독교농민회가 결성돼 강진의 농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그후 1987년 강진농민회가 자주적 농민조직이라는 성격을 띠고 결성됐고 이후 신전면과 도암면, 칠량면에 농민회가 결성됐고 1989년에는 작천면농민회가 조직됐다.

농민회에서는 주로 쌀값보장과 농가부채 전액탕감, 외국농축산물 수입 전면중지, 수세폐지를 위한 수세거부 운동을 펼쳤다. 또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거부하자 4‧13 호헌조치 철폐 투쟁 시위 등 민주화운동을 주도해 나가기도 했다. 주로 시위는 강진읍교회에 집결해 강진읍터미널을 거쳐 중앙로와 극장통을 행진한 다음 강진군청 앞에서 최종 시위를 한 뒤 해산했다.

당시 정부에서는 지역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강력한 행정의 대응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강진군청도 중앙 정부의 지시에 따라 군민의 동향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느라 분주했다.
 
강진군뿐만 아니라 경찰서, 국정원 등 주요 정보기관에서도 민주화 진원지 역할을 했던 종교와 농민단체의 동향을 매일 주시하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강진군에서는 내무과 행정계에서 이런 업무를 처리했고 도청에서는 지방과 여론계에서 동향을 수집했다. 

이때 주로 시위 준비는 강진읍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가장 큰 이유는 종교시설인 탓에 정보기관들의 눈을 피해 시위를 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역할을 강진읍교회가 했던 것이다. 군청 공직자들은 군청 앞에서 시위가 발생할 경우 정문을 지키며 대치하곤 했다. 대치하면서 큰 충돌은 많지 않았고 주로 군청 내부로 진입만을 막는 정도로 이뤄졌다.

시위를 했던 사람도 시위를 막는 공직자들도 모두 같은 마을에 거주하고 호형호제하며 형제처럼 지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시위대를 막는 역할을 했던 공직자들도 퇴근이후 읍내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던 시대였다. 이때 공직자들도 마음만은 시위대와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80년대 중후반은 민주화운동외에 국제적인 규모의 스포츠행사 준비가 또 화제였다. 그 중심에는 86아시아경기대회와 88서울올림픽이 있었다. 1981년 9월 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제24회 올림픽대회 개최지가 서울로 결정된지 두달 후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유치가 결정됐다. 이때 강진군에서도 국제대회를 앞두고 경관조성이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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