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주민 황토흙더미서 ‘왕(王)’씌여진 잔탁 발견했다

청자박물관 건립 공사가 한창이던 1994년 6월경 대구면 당전마을에 거주하던 김남순(당시 60세)씨는 농사일을 끝마치고 귀가하던 중 사당리 41호 요지 보호각과 동편 사당리 131번지 청자박물관 공사현장을 지나게 됐다.

그곳에는 황토흙더미가 쌓여있었는데 붉은색 흙 사이로 푸른 빛을 띈 물체가 눈에 반짝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김 씨가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자 청자 잔탁과 잔이었다.

아마도 요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퍼낸 흙더미속에 청자 유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 씨는 현장에 잔은 그대로 놔둔채 잔탁만 집으로 가져왔다. 곧바로 남겨둔 잔도 가지러 갔으나 흙더미가 사라지고 난 뒤였다. 잔은 흙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4년후인 1998년 2월 청자박물관 개관에 맞춰 자신이 주은 잔탁을 박물관에 기증했다. 이 잔탁은 청자상감 화엽문 ‘왕’명 잔탁으로 이름 붙여졌고 높이 6.6cm, 저경 7.7cm의 크기였다. 가장 큰 특징은 ‘王’이라는 글자가 쓰여있었다는 것이다.

‘王’ 명문이 있고 출토지가 분명한 유물로서 가치가 높다는 문화재전문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2008년 8월 5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94호로 지정됐다. 그때 흙더미와 함께 있었던 잔은 아마도 흙과 함께 다시 땅속에 묻혀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분홍나루가 있는 고바우 상록공원에는 예전에 2층 누각 형태의 정자가 있었다. 이 정자는 고려 개경에 청자 기와를 얹었던 정자인 ‘양이정’의 이름을 딴 정자였다. 하지만 정자가 철거되면서 복원을 진행하게 됐다.

양이정은 원래 관청인 궁중의 정자였으므로 복원할려면 청자박물관에 건립되어야 마땅하다고 판단하고 건립을 추진했다.
 
정자의 형태는 조선왕조 경복궁내 향원정(香遠亭)을 따르되 1층으로 하고 지붕은 청자기와로 올리는 것으로 결정했다.

청자기와는 양이정 지붕에 덮었을 것으로 추정된 형태를 본떠 청자박물관 배양수 전 상형실장(현 고봉도예 대표)의 책임아래 제작하고, 후일을 위해 ‘이천사갑신(二千四甲申)’간지를 새겨 넣었다.

정자의 명칭은 청자박물관 뒷산이 여계산(女鷄山, 암탉형국), 계치마을 뒷산 이름은 대계산(大鷄山, 수탉산)으로 닭이 알을 낳듯 청자재현 사업도 알 낳듯 생산하라는 의미를 부여해 ‘계룡정(鷄龍亭)’이라고 이름붙였다.

2003년 말경 청자박물관내에 청자기와를 얹은 정자를 건립한다는 소식을 접한 국립중앙박물관 담당자가 직접 강진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나는 박물관 담장자에게 설계도서와 함께 자세한 설명을 했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큰 연못 가장자리에 계룡정을 본따서 만든 ‘청자정’을 건립했다.

청자촌에는 또 하나의 청자기와로 만들어진 무념정(無念亭)이 있다. 2007년부터 2017년까지 11년에 걸쳐 대구면 수동리와 사당리 152,377㎡에 대해 437억원(국비220억, 도비19억, 군비170억, 민자28억)원을 투자해 공방 42필지 등을 조성하는 강진고려청자문화특구 사업이 진행됐다.

이때 특구사업 일환으로 청자촌 무대시설과 연지 조성사업을 진행하면서 무념정을 건립했다. 연지조성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뜻을 가진 우주관으로 하늘과 땅의 도나 덕을 의미하는 사상인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바탕으로 조성됐다. 모양은 창덕궁 후원에 있는 애련정(愛蓮亭)을 본떠서 건립했다.

무념정 서쪽 전면의 두 기둥이 연못속에 놓은 긴기둥형 초석 위에 정자를 세웠다. 정자의 이름은 연못을 바라보노라면 수초와 더불어 잉어가 노니는 모습을 보면서 번뇌와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을 담았다.
 
현판 글자는 다산 선생의 문집에서 글자를 차용하여 현판에 새겼다. 또 2003년에는 박물관내 가로등을 청자로 제작했다. 이듬해에는 청자촌과 마량에도 설치됐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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