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인 88서울올림픽 개최에 강진주민들도 적극 동참했다

1980년대 후반 경찰서로 향하는 도서관 부근 도로변에 양담배 피우지 않기 홍보 현수막이 걸려있다. <사진제공=윤순학>
1980년대 중후반 가장 이슈는 민주화운동과 함께 국제 스포츠경기대회 유치였다. 1981년 9월 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제24회 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되는 것으로 결정된지 2달 후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유치가 결정됐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엄청난 쾌거였다.

이에 중앙정부에서는 당연히 국제스포츠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 기반 조성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강진으로도 이어지게 됐다. 이 업무를 담당한 군청 내무부에서는 국제대회를 앞두고 지역내 주요 도로변의 경관조성에 모든 행정력을 집중했다.

1985년 강진군에는 새마을과가 있었는데 도로변 주요 경관조성을 위해 새롭게 국토미화계를 신설했다. 이로써 새마을과에는 새마을계와 건전생활계와 함께 3개 계가 하나의 부서를 이루게 된다.

이때 새마을과에서는 여러 가지 운동을 함께 추진했다. 그중에서 몇가지만 살펴보면 쓰레기 안버리기 및 되가져오기, 위락지내 고성방가 하지않기, 청탁풍조 배격, 양담배 안피우기 등 군민의식을 높이는 운동들이 추진됐다. 또 화분 내집앞 내놓기, 불량간판 정비, 빨래 흉하게 널지 않기, 쇼윈도우 및 셔터 닦기, 농약공병과 비닐줍기 등 생활환경 정화 계도도 실시됐다.

이중에서 화분과 셔터 닦기, 농약병 줍기 등은 국제대회에 맞춰 깨끗하고 보기 좋은 거리를 보여주자는 목적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지만 빨래 흉하게 널지 않기는 요즘으로 생각해보면 상상할 수 없는 운동인 듯 하다.

이때는 요즘처럼 잘 만들어진 빨래건조대가 없었기 때문에 주로 집안 마당에 나무나 기둥을 줄로 연결해 그곳에 빨래를 널어놓곤 했다. 이렇게 빨래를 널어놓게 되면 보기 좋지 않아 이를 개선하자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가장 중요한 것이 성화봉송로인 주요 도로변 가꾸기 사업이었다. 이를 위해 모든 행정력이 집중될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도로변 가꾸기를 위해 새담장 쌓기 및 도색하기를 시작했다.

또 주요 성화봉송로가 되는 군동 오산마을~안풍간 도로변 곳곳에 소공원을 조성하고 그곳에 꽃이나 나무 등을 심어 아름답게 가꿨다.

이때 만들어진 소공원들은 30년이 넘는 세월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요즘에는 노인일자리사업을 통해 군동면에서 소공원에 꽃을 심어 외부 관광객들에게 아름다운 강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군동면 뿐만 아니라 주요 소공원들 상당수가 이때 만들어졌고 지금까지도 잘 가꿔오면서 강진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성황봉송 행사는 1988년 8월 31일 오후 2시 30분부터 오후 4시 20분까지 진행됐다. 구간은 크게 남부와 북부구간으로 나눠져 있었고 남부구간은 군동면 오산~강진읍 송정마을까지 6.7㎞ 구간이었고 북부구간은 성전면 낭동마을~월남마을까지 6.6㎞구간이었다. 총 12개 구간 13.3㎞가 강진의 성황봉송로였다. 이때 1구간에 13명이 주자로 나서 총 156명이 성화를 들고 뛰었다.

올림픽의 상징과도 같은 성화가 강진을 지나간다는 소식에 거리에는 환영인파가 넘쳐났다. 기관단체 600여명, 주민 등 6천여명, 학생들 9천여명 등 총 1만5천여명의 주민들이 성화가 지날때마다 박수를 치며 환영해주었다.

이와 함께 성화 봉송을 축하하기 위해 지금은 전남생명과학고로 명칭이 바뀐 강진농고 주악대와 군동 화방마을 농악대, 강진동초 고적대, 중앙초 어린이농악대 등이 거리에서 축하공연을 펼쳤고 성요셉여고생들은 올림픽 노래를 합창하며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했다. 또 성전 원기마을에서는 마당놀이가 펼쳐져 사실상 강진군민들의 큰 축제가 벌어졌다.

그도 그럴것이 이때에는 TV에서만 봤던 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열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았고 다들 축하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와중에 올림픽의 상징인 성화가 강진을 지난다는 소식에 너도나도 구경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던 때였다.

하지만 최근 인천아시안게임, 평창동계올림픽 등 국제적인 스포츠행사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면서 성화가 여러번 강진을 지나갔지만 당시 분위기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듯해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느끼게 한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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