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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수마을 지나 장수제 통과하는 군계주작산 아래에는 봉양마을과 삼인마을이 자리틀어 군계는 해남군 장수마을과 신전면 영수마을을 옛스러운 멋을 풍기는 돌담길을 따라 주작산을 향한다. 영수마을 뒤편으로 작은 개울을 따라 군계가 흘러가다가 보면 장수저수지와 어관마을에 이르게 된다. 군계를 따라 장수저수지 제방에 올라서서 사내방조제 방향에는 초록빛의 보리가 자라나 있는 들판 뒤로 멀리 신전면 영수마을과 장수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반대쪽에는 바로 주작산이 가까이 보인다. 저수지에는 이름 모를 철새 10여마리가 물위를 떠다니며 노닐다가 인기척이 느껴지자 일제히 날아올랐다.저수지 제방 바로 아래에도 마을을 하나 볼 수 있는데 이 곳은 바로 어관마을이다. 신전면 영수마을과 이웃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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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안 기자
2016.01.28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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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화북항 출발 뗏목, 10일만에 마량 도착고대 강진~제주 원시 뱃길 최초 재현 성공 통일신라시대부터 공식적인 교류기록이 있는 강진과 제주 뱃길은 근세들어 목포와 제주를 오가는 동력선이 출현하면서 침체기를 맞는다. 목포에서 기계배를 이용해 제주를 들어가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굳이 강진에서 돛배를 타고 제주에 들어갈 일이 없어진 것이다. 제주말이 마량을 통해 한양으로 가던 뱃길은 조선말에 끊겼다.일제강점기 들어 군동 백금포에서 쌀을 실은 돛배가 제주도를 오갔고, 80년대 초반까지 대구 봉황의 옹기배가 제주를 오간 것 외에는 제주와 강진의 교류는 사실상 끊기게 됐다. 기계배의 출현은 수천년 동안 이어져 온 뱃길을 끊어버릴 정도로 위력이 대단한 것이었다.또 마침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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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6.01.2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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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죽음들, 다시는 이런일 없어야” ■사건개요노점상들의 자리다툼에서 시작된 갈등이 4명의 사상자를 발생하며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지난 15일 10시 20분께 마량면 남부농협 앞 도로에서 약초와 공구를 판매하던 B모(53‧남)씨가 맞은편 도로에서 장사를 하던 C모(53‧여)씨와 농협 직원 A모(53‧남)씨를 흉기를 휘둘러 살해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1시간 여만에 마량면의 자택에서 붙잡혔다. 경찰은 B씨를 살인혐의로 구속했다.B씨가 검거과정에서 낫과 유리 등 흉기를 던지며 저항하는 바람에 지원을 나온 장흥 대덕파출소 김모 경위와 강진경찰서 이모 경위 등 경찰관 2명이 팔과 귀를 크게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공포탄 2발과 실탄 3발을 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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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안 기자
2016.01.2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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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회를 만들고 살아가면서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고 담장을 쌓는 등 표시해왔다. 또 이 영역을 보다 넓게 만들기 위해 주변의 국가나 사람들과 마찰을 빚거나 전쟁을 통해 힘으로 빼앗기도 했다. 이처럼 자신의 영역과 담장은 사람들이 살아왔던 역사와 생활모습이 담겨있다. 이에 2016년 새해를 맞아 군민들의 역사와 생활모습이 담겨 있는 강진군의 경계를 따라가며 생활모습을 살펴볼 생각이다. 강진군의 최남단인 신전면 사초리에서 시작해 마랑면 상흥리까지 140㎞ 군계를 따라가며 주민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지면에 담아낼 계획이다. /편집자 주서쪽 군계의 시작, 신전 사초리 복섬강진의 서쪽 끝은 강진만을 사이에 두고 마량면과 마주보고 있는 신전면 사초리이다. 사초리 방면의 군계는 사내방조제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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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안 기자
2016.01.14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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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국회의원 선거 세차례전두환 육사동기 김식 국회의원 승승장구 80년대에는 세 번의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제11대 국회(1981.4.11 ~ 1985.4.10) 제12대 국회(1985.4.11 ~ 1988.5.29), 제13대 국회(1988.5.30 ~ 1992.5.29)의원 선거가 있었다.제11대 국회의원 선거는 1981년 3월 25일 실시됐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11대 총선까지 1년 5개월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큰 정치적 격변기였다. 전남 제9선거구(장흥․강진․영암․완도)에서 입후보한 후보는 10대 총선 때와 같이 모두 7명이었다. 이 가운데 정당후보는 백정기(白正基․51, 한국국민당) ․ 유재희(柳在熙․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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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6.01.1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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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웠던 시절 강진주민들에게 꿈을 준 일1982년 9월‘가우도 학생들 과학전람회 대통령상 수상’1983년 2월‘국졸 구두닦이 서정암 학생 대학교 입학’ 80년대 초반은 암울한 시대였다. 5.1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나 그 결과는 처참한 것이었다. 군부독재는 다른 사람에 의해 계속됐고, 억압의 정치 역시 단절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감을 잃고 의욕을 상실했다. 그 암울했던 시절 강진에 큰 희망을 던져준 사건이 있었다. 1982년 가우도 학생들이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과 다음해인 1983년 서울의 강남버스터미널에서 구두닦이를 하던 국졸의 강진 출신 서정암 학생이 야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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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12.31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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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인물 소사전’오기호, 허림, 김병국 등 소개2014년 2015년‘강진인물사 1, 2권’발행 강진일보는 지난해 4월부터 ‘강진인물 소사전’이라는 코너를 통해 13명의 인물을 소개했다. 그동안 ‘강진인물사’란 코너를 통해 신문 전면을 차지하는 양으로 5회 이상을 연재 하던 것과는 달리 비교적 지면을 좁게 해서 짧은 양의 원고로 작성된 기사들이었다. 이는 사람의 중요성이 낮아서 그런게 아니라 구할수 있는 자료들이 적어서 불가피하게 원고량을 적게 한 경우였다. ‘강진인물 소사전’ 13명을 연재 한 후 다시 ‘강진인물사’라는 기획연재물로 들어가 다시 현구 김현구선생 대선제분 박세정 회장과 시인 김현구 시인을 연재했다. 현재는 강진출신의 나주 고막원교회 김병균 목사의 집필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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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12.31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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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도 출렁다리 세운 후 강진에 운이 가득전남도공무원교육원 유치도 소가 일을 잘 하기 때문다산수련원 자리, 만덕산이 흘러 내려온 명당전남교통연수원 들어선 성전북초등 자리도 길지1990년도 후반의 일이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풍수지리에 꽤 능통한 것으로 알려진 강진읍의 한 주민이 이런말을 한적이 있다. ‘강진은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국이다. 소가 일은 하지 않고 누워있으니 지역의 인구가 줄어들고 갈수록 침체되고 있다. 소에 멍에를 씌우면 소가 벌떡 일어나 일을 하게 되고 강진이 번창할텐데...’잘 알려져 있다시피 강진읍은 소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우두봉에서부터 시작해 시끄테(소의 혀끝), 목리(초지:소가 풀을 뜯는 곳), 핑경동(생명과학고 자리)등 이 널려 있다. 지금의 도서관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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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12.31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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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여부가 정부와 행사 주최측간에 항상 논란이다. 그만큼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의 정신을 깊게 담고 있다.‘임을 위한 행진곡’은 강진 군동 호계리 출신 김종률씨가 작곡한 노래다. 현재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직을 맡고 있다. 이 노래는 김처장이 전남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1982년 5월 경 소설가 황석영 씨의 제안에 따라 광주지역 노래패 10여명이 모인 가운데 황 씨의 자택에서 1박2일이란 짧은 시간에 완성된 노래라고 한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중 전남도청을 점거하다 계엄군에게 사살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1979년(1978년 말이라는 설도 있음) 노동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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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5.12.24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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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을 이야기하면서 강진 칠량 출신 윤한봉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5.18 마지막 수배자였다. 윤한봉은 1947년 칠량면 동백리에서 태어났다. 광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광주일고에 입학했다. 대학은 전남대 농과대학 축산과를 갔다. 그는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선포에 반대하면서 본격적인 반독재투쟁에 나섰다. 다음해인 1974년 4월에는 민청학련 사건이 터져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전남대에서 제적됐다. 그러다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었다. 그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예견한다. 신군부가 절대 권력을 놓지 않으리라는 것도, 시민들의 큰 희생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그 운동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5.18 이전에 여러 자리에서 이야기한다. 그는 이러한 이유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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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5.12.24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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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시위대 버스 강진도착 5.18 상황전개강진읍교회 식사제공, 남도장 여관에서 숙식 1980년이 왔다. 70년대에서 80년대로 건너오는 길목은 국가적으로 다급함 그 자체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대통령이 시해된 이후 정국은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였다. 수십년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지는 상황이었지만 국민들은 불안했다. 80년은 오고 그해 봄도 또 오고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봄이 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1980년 5월 18일 계엄령 10호가 발표되면서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 포고된다. 5월 17일 광주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윤기석 목사는 그의 회고록 ‘죽고자 하면 살고...’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비상계엄하에서 일어난 광주학생들의 장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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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12.24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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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허출원‘죽음의 사신 쫓아낼 개량연탄’전국 환호사재털어 충남 서산에 연탄공장 건립, 사무실은 서울에 정부, 연탄 KS규격 바꿔가며 전국 업체에‘석회석 넣어라’특허 보호받지 못해 거부 뜻 이루지 못한듯70 ․ 80년대까지만 해도 겨울이 되면 가장 무서운게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한 겨울이 되면 거의 매일 TV뉴스에 공단주변에서, 학교주변에서 자취를 하는 젊은이들이 연탄가스에 중독된 화면이 등장하곤 했다. 70년대 초반 서울에서만 한해 200여명이 연탄가스중독으로 숨지곤 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당시 연탄가스는 ‘죽음의 사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를 극복해 보려는 노력도 다양하게 진행됐다. 서울시는 70년대 초반 1천만원이라는 어머어마한 현상금까지 내걸고 연탄의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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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5.12.18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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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사 가루 만들어 부산, 군산, 인천공장에 공급지역경제 막대한 파급효과 도암, 강진읍 ‘들썩들썩’ 이제 시대는 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고 있다. 새마을운동과 식량증산 운동 등을 통해 삶의 질은 많이 개선됐지만 강진의 산업구조는 여전히 농수산업위주의 산업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강진은 여전히 남쪽에 위치한 ‘교통 사나운’ 농촌이였기 때문에 공장을 유치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가 70년대 말 강진에 업체다운 업체가 문을 두드린게 바로 한국유리와 해태유업이였다. 당시만 해도 강진에서 20인 이상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는 업체가 군동 호계리에서 배합사료를 생산하던 남양산업 딱 한군데였다. 이 회사는 76년 4월에 설립돼 직원을 22명이나 고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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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12.18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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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격의없이 상대하는 성품강진읍 교촌리 강진향교 은행나무 보면서‘나는 저 벼락맞고 태풍에 찢기고 꺾인 은행나무를 좋아하네고난과 상처받은 인생이 깊이가 있고, 경륜이 있는 법이라네’ 그는 젊은이들과 대화하기를 좋아했다. 특히 필자에게 ‘역사적 예수’를 가르쳐주고, ‘사회의식’을 일깨워주었던 분으로 신학과 민주화운동 등 사회참여의 길로 들어서는데, 나의 정신적 멘토가 되었던 분이 황호신 장로이시다. 황호신 장로는 한 말로 잘난 분이었다. 눈에는 촉기(燭氣)가 있었으며, 형안이었다. 식견과 인생경험이 출중하고, 언변이 능하여 어떤 상대도 설득시키고 매료시키는 바, 매사에 사리가 분명하고 논리가 정연했다. 무척이나 입담이 좋은 분이었다. 또한 그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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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5.12.18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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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풍 작가, 전 면장의 설명을 명함에 받아 적은게 모든 자료전 면장의 구술 한가지만 가지고 이뤄진 문제투성이의 줄거리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군동 영포마을 출신 교민 김추윤씨가 2013년 1월에 에 보내온 편지에는 ‘강진 갈갈이사건 방송사건’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됐고, 얼마나 미약한 자료를 가지고 드라마를 만들었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 편지에는 당시 법창야화가 구전에 의존해 소설을 썼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편지의 내용을 중심으로 당시 방송이 제작된 과정을 시간적으로 다시한번 재구성 해보자.# 1973년 12월 중순 어느날 장흥지원: MBC 최풍 작가와 연출자 고무생씨가 ‘새로 법정에서 일어난 일을 소재로 드라마를 만들어 볼까’하고 장흥법원을 찾아갔다. 장흥법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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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5.12.1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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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갈갈이 사건’강진주민들 아무런 항의 안해오히려 강진 사람들이 더 빠져들기도 1974년 4월 첫 방송을 탔던 법창야화의 기획의미는 밝은 사회건설과 인간성 회복이였다. 법창야화는 첫 방송을 시작으로 6년반 동안 47화를 내보내며 2천15회라는 기록적인 방송역사를 만들었다. 법창야화는 47화가 방송되는 동안 ‘밝은사회 건설과 인간성 회복’이라는 긍정적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 76년 방영된 19화 ‘천사와 사형수’에서는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교도소에서 수감중인 한 사형수를 무기수로 감형시키는 막강한 파워를 행사하기도 한다.노모가 아들을 위해 교도소 바로 옆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는 모습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각 종교계와 정계등에서 그 사형수를 감형해야 한다는 동정론이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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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12.10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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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약자와 정의 편에 서기를 좋아하는 기질동성리 강진약국은 야당 인사들의 아지트황호신 선생이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황호신 선생은 일제 말에 서울약전 재학 중에 독립운동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미망인인 오상선 여사(현재 89세, 집사)의 증언에 의하면, 오집사의 외숙모 댁이 서울 돈암동에 살고 있었다. 황선생은 당시 그 댁 문간채에서 하숙을 하다가, 외숙모의 소개로 오여사와 알게 되었다. 오여사는 당시 경북 안동여고에 재학중이었다. 오여사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피신 다니던 황호신 전문학생과 연애를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애국독립군에 위문편지’보내는 심정으로 편지를 적어 보냈다.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쫓겨다니던 청년 황호신과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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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5.12.10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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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부터 3개월 걸쳐 복잡한 단계 거쳐 복제성공 “내가 강진유배중에 병든 아내가 치마 한 폭을 보내왔는데...”余在耽津謫中 病妻寄敝裙五幅다산의 하피첩은 이렇게 시작된다. 알려져 있다시피, 하피첩은(霞帔帖)은 다산(茶山) 정약용이 유배시절 두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삶의 가치를 수록한 작은 서첩이다. 1810년 유배하던 시절 부인 홍씨가 보내온 치마를 잘라 작은 서첩을 만들고 두 아들 학연(1783~1859)과 학유(1786~1855)에게 전하고픈 당부의 말을 적었다. 그리고 하피첩이라 이름 지었는데, 부인의 치마를 아름답게 표현한 것으로 부모의 정성이 담겼다. 이 뜻깊은 문화재(보물 1683-2호)가 지난 9월 경매로 나와 강진군도 이에 참여했으나 결국 7억5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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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12.10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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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들 안오지, 음식도 그렇지…제 그거 인자 나도 못해먹겠단 말이시” 강진에서 나고 자란 A(83)어르신은 평생 고향마을을 지키며 종갓집에서 살았다. 어릴적 집에는 일꾼들이 다섯이나 됐고, 어딜가면 ‘도련님’이라는 호칭도 들었다. 학교는 강진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종갓집 장남으로서 고향에 눌러 앉았다. 결혼도 고향에서 했다. 논밭이 많았기 때문에 사는데 큰 어려움도 없었고, 자식들도 대학까지 가르치며 결혼도 시켜 모두 도시에서 살고 있다.이제 어느덧 83세가 됐다. 80이 넘은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이 지나버렸다. A어르신 부부가 종갓집에 살면서 평생 목숨처럼 해온게 있다. 조상님들께 시제를 올리는 일이다. 직계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이여서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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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5.12.10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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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동 영포출신 교민 김추윤씨 본사에 편지1973년‘갈갈이 사건’취재 온 최풍작가 안내 2013년 1월 미국의 콜로라도 주에서 출발한 한 통의 편지가 편집국에 날라왔다. 그때 그 사건으로 ‘강진갈가리사건’의 진상을 11회 연재한 후였다. 군동 영포가 고향인 올해 70대 초반의 김추윤이란 독자였다. 강진일보 인터넷 홈페이지(Nsori.com)에서 ‘강진갈갈이 사건’ 연재를 보았으며 미국에 산지 벌써 30년이 넘었다고 했다. 김추윤 독자는 ‘강진갈갈이 사건이라는 기사를 계속 보다가 그 과정을 조금 알고 있어서 참고하라’고 편지를 적었다고 썼다. 내용이 이랬다.그러니까, 1973년 12월 중순쯤 되던 날이였다. 가을걷이도 다 끝나고 해서 해가 많이 짧아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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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일보
2015.12.04 1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