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와 탐진은 한 형제… 끊긴 우정 다시 잇자”

제주 화북항 출발 뗏목, 10일만에 마량 도착
고대 강진~제주 원시 뱃길 최초 재현 성공

제주시 화북항을 출발한 물마루호가 10일만에 마량항에 입항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오로지 노를 저어서 제주바다를 건너와 처음으로 고대 뱃길재현에 성공한 기록을 남겼다.
통일신라시대부터 공식적인 교류기록이 있는 강진과 제주 뱃길은 근세들어 목포와 제주를 오가는 동력선이 출현하면서 침체기를 맞는다. 목포에서 기계배를 이용해 제주를 들어가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굳이 강진에서 돛배를 타고 제주에 들어갈 일이 없어진 것이다. 제주말이 마량을 통해 한양으로 가던 뱃길은 조선말에 끊겼다.

일제강점기 들어 군동 백금포에서 쌀을 실은 돛배가 제주도를 오갔고, 80년대 초반까지 대구 봉황의 옹기배가 제주를 오간 것 외에는 제주와 강진의 교류는 사실상 끊기게 됐다. 기계배의 출현은 수천년 동안 이어져 온 뱃길을 끊어버릴 정도로 위력이 대단한 것이었다.

또 마침 1968년 12월에 완도의 내동다리가 연결돼 완도가 육지로 변화되면서 이때부터 완도~제주 뱃길이 제주 뱃길의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고흥 녹동이나 여수, 목포, 부산, 인천 등지로 이어지는 제주 뱃길이 속속 활성화되면서 강진~제주 뱃길은 아주 먼 기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 세월이었다.

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1980년대 초반까지 칠량 봉황에서 주철호씨가 돛배를 이용해 제주도로 옹기를 팔러다닌 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강진~제주 뱃길은 완전히 끊겼다. 그러다가 강진과 제주의 오랜 교류 역사를 다시한번 일깨워준 사건이 있었다. 제주도 사람들이 1985년 10월 4일부터 10일까지 제주도에서 뗏목을 타고 마량까지 항해하는 고대항로를 재현한 것이다. 실로 역사적인 일이었다.

제주신문사(지금의 제주일보)가 창간 4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추진한 이 사업은 제주 사람들에게 고대 강진과의 교류를 다시한번 일깨워준 일이였으며, 강진 사람들에게도 제주와의 교류 중요성을 세삼느끼게 하면서 강진과 제주의 끈끈한 우정을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이 때 사용된 배는 테우라는 고대 뗏목이었다. ‘물마루’호로 명명된 테우는 서귀포에 남아 있는 6척의 테우가운데 가장 크고 견고한 것을 골라 탐사선으로 이용했다.

강진~제주뱃길 탐사단은 처음에 사업을 추진하면서 항해의 시작점과 종착지를 어디로 설정할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바람과 물결에 따라 흘러가도록 내버려 둘 것인지, 아니면 목적지를 향해 그 방향으로 저어가도록 할 것인지하는 두가지 방안에 대한 검토가 있었다.

행사를 준비한 전문가들이 여러 문헌에 대한 조사 결과 제주와 한반도를 연결하는 고대항로의 종착점으로 최초의 지점은 탐진, 곧 지금의 강진군으로 밝혀졌다. 현지조사에서는 강진군에서도 마량포구가 탐라의 교역항으로, 탐라인의 거유지로서 여러 가지 흔적이 있음을 확인하고 탐사의 종착지를 강진군 마량포구로, 시발지를 탐라의 관문이었던 제주시 화북포구로 결정했다. 결론적으로 테우항진은 자연에 대체로 순응하되 옛 뱃길을 더듬어 조사한다는 뜻에서 문헌상의 가장 오래된 뱃길을 항해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좌측부터, 마량에 도착한 제주 탐사대원들이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는 모습이고, 두번째 사진은 한복을 입고 환영나와 있는 주민들의 모습이다. 또 다음 사진은 제주 탐사단원들이 마량시내를 가두행진하고 있는 사진이고, 제일 우측사진은 강진군에서 마련한 환영만찬의 모습이다. 강진군은 열렬한 환영행사를 마련했다.
제주신문사는 <물마루>호로 명명된 탐사테우로 서귀포시 보목동에 남아있는 6척의 테우 가운데 가장 크고 견고한 것을 골라 탐사선으로 사용했다. 삼나무 통나무 14개로 엮어진 이 테우는 길이 590cm, 이물 140cm, 고물 160cm의 크기에다 적재능력 350kg. 범주시험 결과 <물마루>호의 항주 능력은 잔잔한 바다에서 2개의 노만 이용했을 때 최대 2.2노트, 평균 1.6노트의 속력이었다. 테우의 항해는 사공 9명이 조별로 3명씩 3개조로 나누어 2~3시간씩 번갈아 가면서 밤낮없이 노를 저어가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 탐사에는 주최측인 제주신문사 취재 및 업무팀 6명, 대학교수들로 구성된 학술조사팀 6명, 테우 사공 9명, 모선 및 자선 선원 21명, 의사 1명, 그리고 KBS 촬영팀 3명 등 모두 47명이 참가했다. 모선으로는 제주대 실습선인 <제주401>호(389t), 자선으로는 발동선 <승리>호(3t)가 참가, 테우<물마루>호와 더불어 탐사선단을 이루었는데 모선은 전체적인 보급 지원 이외에도 제주바다 해역별 조류․기상관측등 각종 조사활동을 수행했고 자선은 모선과 테우를 오가면서 사공의 교대와 보급임무를 맡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강진군에서도 이 행사에 공동참여해 강진군 입장에서 이 뱃길을 연구했으면 더 의미 있는 행사가 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초 <물마루>호의 항해는 화북포구를 출발, 사수도-청산도-신지도-마량에 이르는 70해리의 직선방향 항진계획을 세웠으며 항해일정도 4박5일로 잡았다. 그러나 이 항해계획은 항해 첫날 조류와 태풍의 북상에 밀려 어긋나고 말았다.

1985년 10월 4일 화북포구를 출발한 <물마루>호는 당초 계획한 북쪽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서북진하다가 하귀 앞바다에서는 밀물이 썰물로 바뀌면서 항진코스도 동북진으로 전향됐는데 이는 서류의 밀물과 동류의 썰물 조류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이 자연에 의한 코스의 수정은 제주해협을 건너던 고대 항법의 추정에 소중한 근거를 제시해 주었다.

그것은 테우와 같이 항해속도가 느린 배로도 6시간 간격으로 바뀌는 조류와 제주앞바다의 화도(관탈섬)․사수도․사수도의 삼각점 항해표적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화북포구를 출발한 뒤 20시간만에 추자도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실험은 갑자기 밀어닥친 태풍<브렌다>에 의해 도중에 중단이 되어 아쉬움을 더하게 했다.

10월에 드물게 불어닥친 태픙 <브렌다>는 엄청난 위력으로 탐사단을 엄습해 왔지만 탐사대원들은 산더미같은 파도와 사투를 벌이면서 바닷길의 험난함을 톡톡히 체험하였고 많은 뒷이야기를 남긴, 소중한 경험을 했다.

태풍으로 하추자도에 피항했던 <물마루>호는 7일 새벽 탐사를 재개, 완도 소안도-신지도-초완도를 거쳐 화북포구를 출발한 지 7일째인 10월 10일 하오 3시 종착지인 마량포구에 도착, 현지 주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당초 예정했던 일정보다 이틀이 더 늦어졌고 항해거리도 처음 예상했던 70해리보다 12해리가 더 늘어난 82해리(152km)에 이르는 대장정의 막을 내린 것이다.

이들이 도착하자 강진군에서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열렸다. 당시 제주신문은 ‘강진군의 환영계획은 너무도 치밀했다’고 적었다. 물마루호가 멀리 고금도 서쪽 해안을 돌아서 모습을 드러내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어선 20여척이 ‘환영 테우 물마루호’라고 쓰인 깃발을 달고 본격적인 환영행사가 시작됐다.

마량에 대기하고 있던 2천여명(당시 제주신문사 기록)의 주민들이 부두로 몰려나와 역사적인 탐사성공을 환호했다. 각 기관의 여직원 200여명이 한복차림으로 나와 ‘환영 고대 제주 해양뱃길 탐사’ ‘탐라와 탐진은 한 형제, 끊긴 우정 다시 잇자’ ‘마유장성 조랑말은 한라산의 형제말’이라는 프랑카드를 흔들었다. 여학생 300여명도 한복을 입고 환영식에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비가 내려 한복을 입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었다.

당시 서정환 강진군수를 비롯한 강진의 기관장들이 모두 나와 이들을 환영했다.  마량 영동마을의 농악대가 나와 탐사성공의 흥을 돋우웠고, 강진농고 악대는 물마루호가 마량포구에 도착하는 순간 ‘제주도의 노래’를 힘차게 연주해 두 지역의 인연을 생각케 했다.

서정환 군수를 비롯한 지역 유지들이 탐사 대원들에게는 화환을 걸어주었다. 이들은 꽃을 목에 걸고 마량 시내를 한바퀴 도는 시가퍼레이드를 펼쳤다. 시가퍼레이드가 끝나고 나서는 대대적인 환영만찬도 진행됐다. 강진과 제주가 실로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푼 순간이였다.
 
서정환 군수는 환영식에서 “격랑을 뚫고 선조들의 뱃길을 따라 이곳에 도착한 탐사대원들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이 역사적인 탐사사업은 제주인의 개척의지를 심어준 쾌거였다”고 말했다. 탐사추진위원장인 김대성 제주신문사장은 “이번 탐사사업이 두 지역을 잇는 가교구실을 하게 되길 바란다.

이날 환영식의 하이라이트는 마량에 사는 고씨와 양씨 대표가 나와 탐사단에게 선물을 전달한 것이였다. 고씨와 양씨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성씨다. 강진에 사는 고씨와 양씨가 제주도에서 온 손님들에게 선물을 전달한 것은 두 지역의 끈끈한 역사성을 담은 일이었다.    

이 탐사사업은 제주사람들이 선인들의 개척정신과 그 발자취를 더듬어 재연하면서 문화․항해 분야의 학술조사를 병행 실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었다.

당시 탐사단은 문화교류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탐라와 탐진과의 지명유래설 뿐만 아니라 제주인이 설촌한 3개 마을을 찾아낸 점, 강진이 과거 제주마의 송출전진기지였으며 그 흔적인 마유장성터를 확인한 것 등이 이번 탐사의 성과라 할 수 있다고 꼽았다.

또 강진 지방에서도 <설문대할망>전설이 전래되고 있는 점, 제주와 연결하는 고대항로가 강진만을 중심으로 시대별로 변천해 왔다는 사실등은 앞으로 이 일대에 대한 종합학술 조사의 필요성을 제기 했다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여기서 말하는 제주인이 설촌한 3개 마을이란 마량의 원마, 대구의 사당, 수동마을을 지칭하는 것이다. 탐사단들은 각종 자료와 강진 사람들의 말을 인용해 조선시대 말을 수송하던 제주사람들이 강진의 남쪽지방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판단했다. 설문대할망의 전설도 재미있다. 설문대할망은 제주에서, 강진에서는 마고할머니라고 불리는 전설이 있다.

마고할머니가 제주를 떠나 마량지방으로 유람을 나갔는데 다도해를 통과할 때에는 바닷물이 여인의 발목밖에 차지 않았으나 마랑 앞바다에 이르러 비로소 허리까지 물이 찼다는 내용이다. 제주와 마량에서 함께 전해오는 이 전설은 강진과 제주와의 인연성을 강조하면서 마량앞바다가 수심이 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당시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마유장성터는 지금의 대구 남호에서 관찰산을 거쳐 장흥의 대덕과 회진까지 가는 돌담을 의미한다. 지금은 그 흔적이 대부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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