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균/고막원교회.강진읍 출신

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격의없이 상대하는 성품

강진읍 교촌리 강진향교 은행나무 보면서
‘나는 저 벼락맞고 태풍에 찢기고 꺾인 은행나무를 좋아하네
고난과 상처받은 인생이 깊이가 있고, 경륜이 있는 법이라네’

황호신 선생과 가족들이 강진읍 동성리에 있던 강진약국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 황호신 선생 유족 제공>
그는 젊은이들과 대화하기를 좋아했다. 특히 필자에게  ‘역사적 예수’를 가르쳐주고, ‘사회의식’을 일깨워주었던 분으로 신학과 민주화운동 등 사회참여의 길로 들어서는데, 나의 정신적 멘토가 되었던 분이 황호신 장로이시다. 황호신 장로는 한 말로 잘난 분이었다. 눈에는 촉기(燭氣)가 있었으며, 형안이었다.

식견과 인생경험이 출중하고, 언변이 능하여 어떤 상대도 설득시키고 매료시키는 바, 매사에 사리가 분명하고 논리가 정연했다. 무척이나 입담이 좋은 분이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항상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고, 토론하고,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고자 애쓴 분이었다.

황호신 선생은 남다른 점이 있었다. 자신의 수준 훨씬 아래 사람들과도 빈부귀천, 유무식, 나이를 가리지 않고 격의없이 상대하는 성품을 갖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백정, 양반, 상놈, 반촌, 민촌에 대한 뿌리깊은 인식이 남아있을 때였다. 그는 어떠한 하류인생도 박절하게 대하는 일이 없었다.

그들에게도 ‘예수 이야기’ ‘시국 이야기’를 차별없이 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황호신 선생은 수많은 민중들의 희망이요, 긍지였던 것이다. 한말로 강진약국은 문턱이 없는 곳이었다. 건달도, 취객도, 몸 파는 여인들도, 실패한 인생들도 황선생을 찾아와서 자신의 불행과 억울함을 털어 놓았다. 그는 소외된 자들에게 있어서 소중한 이웃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황선생에게는 세상에서 실패하고 좌절했던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정도 살만해지면 잘 찾지 않았다. 황호신 장로에게 물질적 도움을 기대하고 접근한 사람도 있었다. 그는 매사에 선이 분명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그들의 인생을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를 주고자 했다. 고기를 잡아준 것이 아니라, ‘고기잡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선생에게서 그의 식견과 지혜를 진지하게 배우려는 사람은 드물었다. 1회용으로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만 알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는 한 때 강진농고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은 적도 있었다. 황장로는 틈만나면 들판을 거닐기를 좋아했다. 주코스는 강진 자비원 뒤, 하마장, 목화동 향교 부근 들판이었다. 그는 필자가 청년시절, 황호신 장로님과 산책할 때가 종종 있었다.

향교 돌담에 박혀 휘몰아치는 풍우를 견디면서 작히 500년 세월은 살았음직한 고목을 가리키면서, ‘나는 저 벼락맞고 태풍에 찢기고 꺾인 은행나무를 좋아하네. 고난과 상처받은 인생이 깊이가 있고, 경륜이 있는 법이라네’라는 말을 했다. 오늘에 와서 생각하니, 그는 고목된 은행나무와 같이 마음에 회한을 품고서, 부러진 날개를 추스르면서 비상하기를 원했던 분이었다.
 
중앙정계나 국제무대에도 설만한 실력과 경륜을 가졌지만, 그의 인생은 강진에 주저앉아서, ‘내가 비록 촌에서 약장시나 하고 있지만...’ 푸념해 가면서, 후학들에게 예수의 시대정신을 심어주고, 자신의 경륜을 설파하는데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그

러나 그는 앉아서 천리를 보고, 서서 만리를 보는 분이었다. 그는 1년 농사만 짓는 농부가 아니라, 사람을 깨우쳐 역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인간교육을 했던 문자 그대로 백년대계를 바라보는 사람 농사꾼이었다.

보라! 그를 추모하고, 그의 사상과 정신과 삶과 가르침에 감화를 받아 이 시대에 정의롭고, 올곧고, 평화의 길을 가는 제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의 필드는 아카데믹한 강의실이 아니었다. 누구나 민초들이라고, 낙백한 인생이더라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초청하는 ‘역사의 예수’ 방식의 교육이었던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남을 가르친 사람이었다. 농촌마을에 사는 촌부들도 아들이나 딸들이 외국에서 가지고 온 편지, 즉 영어, 독일어로 된 편지는 어김없이 황호신 장로에게 가지고 갔다. 어디에 살며, 어떻게 송금된 돈을 찾는지, 외국에 보내고 싶은 물건을 어떻게 부치는지에 대해 일일이 응대해 주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는 금과옥조와 같은 말들은 많이 쏟아 냈는데, 글로 남긴 기록은 찾기가 힘이 들었다. 자서전은 물론 신문사나 잡지사에 기고한 글은 없었다. 그는 필체도 좋았고, 말도 잘했고, 좌담에 능했다, 다만 글로 남긴 것이 없다는 점에 대해 아쉽게 생각한다. 
 
□ 역사의식을 일깨워 준 선각자 황호신 선생
강진약국 황호신 선생은 강진사람들의 정치적, 사회적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선각자였다. 강진의 민초들은 암울했던 군부독재시절에 신문에 나지 않는 시국에 관한 궁금증을 황선생에게 문의해서 해답을 받아내곤 했다. 예컨대 ‘김대중씨는 살았다요, 죽었다요?’ 당시에 김대중이란 이름이 언론계에서는 금기사항일 정도로 박정희의 김대중 콤플렉스가 극심한 때였다. 황호신 선생은 강진의 안테나였다.

그는 강진에서 정권의 핵심을 꿰뚫었으며, 기독교계의 동향과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정세에 박식했던 것이다. 그는 인생을 마칠 때까지, 항상 공부하는 분이었다. 약국 진열장 위에는 항상 때 묻은 영어사전이 놓여 있었고, 뉴스위크지, 타임지를 항상 받아 보면서 미국에서 들어온 한국 민주화 정보를 풀어 놓았다. 강진약국 앞에는 가끔씩 미국선교사들과 외국신부들의 차가 멎어 있었다. 광주전남지역의 외국선교사, 카톨릭 성직자들과도 각별한 교분을 가졌던 것이다.

황호신 선생은 군부독재자나 박정희 일단에 대해 엄청난 반감과 인간적 측은함을 갖고 있었다. 주로 외신을 보고 듣고, 외국 선교사들과의 각별한 교분으로 인해. 군부독재들의 비리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주로 까리타스 수녀원 원장인 토마스 아퀴나스, 또는 한국 독재정권에 의해 추방되었던 오글 목사와도 직간접으로 연결이 되었을 것으로 필자는 짐작한다.

당시 의식있는 지식인들에 대한 감시, 양심적 교수들을 해직시키고, 동아일보 양심적 기자들을 해고시켰다. 그 때를 가르켜 ‘긴조시대’라고 부른다. 긴급조치 9호까지 발하여 국민들의 입과 귀를 봉쇄했던 암울한 시대였다. 지식인들을 말을 해야 산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양심적으로 괴로웠든지, 아퀴나스 원장 수녀와 영어성경 공부를 하고 와서 하는 말이 ‘나 오늘 숨좀 쉬고 왔다’고 말할 정도로 독재세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러한 반면에 미국에 대한 기대는 상대적으로 높았다. 사실 미국이 더 큰 지배세력인 것 만큼은 틀림없으나 민주화, 인권과정에서 일정 정도 긍정적인 역할을 해준 것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한다. 당시 양심세력들에 있어서 한 가지 기대는 민중혁명은 못 일으켜도, 미국의 압력에 의한 권력구조의 개편 내지 인권상황의 호전을 기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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