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공장 최초 설립… 직원복지·지역사회 공헌 최고수준

규사 가루 만들어 부산, 군산, 인천공장에 공급
지역경제 막대한 파급효과 도암, 강진읍 ‘들썩들썩’ 

도암면 석문리 4-13 다산초당 가는 길목에 지금도 남아 있는 한국유리 강진광업소 공장의 모습이다.
이제 시대는 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고 있다. 새마을운동과 식량증산 운동 등을 통해 삶의 질은 많이 개선됐지만 강진의 산업구조는 여전히 농수산업위주의 산업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강진은 여전히 남쪽에 위치한 ‘교통 사나운’ 농촌이였기 때문에 공장을 유치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가 70년대 말 강진에 업체다운 업체가 문을 두드린게 바로 한국유리와 해태유업이였다. 당시만 해도 강진에서 20인 이상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는 업체가 군동 호계리에서 배합사료를 생산하던 남양산업 딱 한군데였다. 이 회사는 76년 4월에 설립돼 직원을 22명이나 고용하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당시로서는 대기업군에 속했던 한국유리공업(주)이 1978년 3월 도암면 석문리 4-13일대에 규사공장설립 신청과 함께 그해 6월 ‘한국유리 강진광업소 규사분공장’을 준공했던 것이다. 또 해태유업도 1979년 8월 강진군 강진읍 학명리 5만여평의 부지에 하루 200톤을 생산할 수 있는 우유공장을 세우기로 발표하면서 강진도 이제 광업과 제조업 부흥이란 꿈을 가지게 됐다.

한국유리 강진광업소의 준공은 강진의 기업문화가 획기적으로 변하는 전환점이 됐다. 회사의 경영방식하며, 종업원들 대우,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 등은 당시로서는 강진에 미친 영향이 막대한 것이였다.

우선 당시 강진광업소의 규모부터 살펴보자. 강진광업소는 유리 원료 중의 하나인 규석을 채취하여 분쇄한 다음, 고운가루(모래수준)로 만들어 유리공장으로 보내는 일을 하는 곳이였다. 규사 가루를 고온으로 녹이면 유리가 되는 순서였다. 여기에 이런저런 기법을 동원하면 반사유리나 판유리, 자동차유리, 유리섬유 등이 되어 각 산업현장으로 팔려나갔다.

도암면 석천마을 뒷편 광산으로 한국유리가 규사 원석을 채광했던 곳이다.
강진광업소는 대지가 2천287평에 건축면적이 123평으로 규사를 분쇄하는 능력이 하루 6시간 기준으로 65톤에 달했다. 한국유리는 이곳에 1억2천700만원을 투입했다. 한국유리는 당시에 인천과 부산, 군산등지에 유리공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강진에서 생산된 고품질의 규사분말을 충분히 소화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유리는 공장을 짓기 전 도암면 일대에 규사암을 채광할 수 있는 양을 1천만톤을 확보하는 등 강진 공장을 장기적으로 운영할 여러 가지 준비를 마친상태였다.

한국유리 공장이 들어선 곳은 도암면 석문리 4-13일대로 공장이 세워지기 전에는 과수원이었다. 이곳에 과수원이 조성된 것은 72년이었다. 농경지조성법에 따라 밤나무 과수원으로 개발된 곳이였으나 생육이 대단히 나빠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교통도 좋지 않은 곳이여서 사람들의 접근성도 크게 떨어진 장소였다.

그러나 당시에도 농지를 전용해 공장을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한국유리는 1977년 7월초 이곳의 농지전용을 정부에 신청했는데 당시 정부가 경제장관회의에서 농지전용을 허가했다는 기록도 있다.<매일경제 신문 1977년 7월 26일자> 그 이유도 분명한 것이여서 경제장관회의에서는 ‘과수원의 규모가 작고 과목의 생육상태가 나쁠 뿐만 아니라 인근이 임야로 다른 농지에 피해가 없어 공장부지로 전용토록 한 것’이라고 신문은 기록하고 있다.

정부입장에서 농지를 보존해 식량을 확보하는게 절대절명의 과제였지만 한편으로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건축의 핵심재료인 유리를 안정적으로 생산해야 한다는 당위성 또한 큰 상황이었을 것이다.
한국유리 만덕광업소는 1978년 6월 3일 최태섭 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준공을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최태섭 회장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중의 한명이었다. 1998년 타계한 그는 훗날 강진의 기독교 발전은 물론 지역의 문화시설 발전등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폈다.

초창기 한국유리의 직원은 56명이었다. 회사직원은 이후 120명까지 불어났다가 1997년 문을 닫을때 직원수가 60명이였다. 20인 이상 고용 회사가 남양사료 딱 하나 있던 시절 직원이 60명이 다되는 회사가 문을 열었으니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직원들의 구성은 전기직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술직들은 외지사람들이 많이 차지했지만 기타 사무직이나 현장직 직원들은 지역 사람들을 채용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대부분 지금말로 정규직 사원이었다는 것이다.

인근 마을에서 농사를 짓다가 강진광업소 생산직으로 들어가 갑자기 대기업 정규사원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서울본사와 부산공장, 인천공장, 군산공장 등의 정규직 사원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매월 15일 월급날이면 흰봉투에 컴퓨터 글씨로 찍혀 나온 월급봉투가 하루도 늦지 않고 지급됐다. 요즘처럼 은행 계좌에 입금해주는 것이 아니라 빳빳한 현금을 봉투에 넣어주는 방식이였다.

10여년 동안 한국유리 강진광업소에서 근무했던 도암면 석천리의 한 주민은 “왠 개벽인가 싶었죠. 8시간 근무에 잔업하면 정확하게 계산해서 돈 더주고, 때되면 따뜻한 밥주고, 봄과 가을이면 여행시켜주고, 대학생 아들 학비까지 지원해주고 세상 부러울게 없었습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유리 공장이 가동되면서 지역경제가 물결치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암면소재지에만 식육점이 여섯군데가 들어섰고, 아가씨를 2~3명씩 고용한 다방이 다섯군데에 달했다. 도암면소재지 마을은 물론 인근 석천과 성자마을에는 빈방이 남아 돌지 않았다. 작은방을 얻어서 살림을 하는 한국유리 직원들이 많았다.

강진읍내도 경제적 혜택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강진읍내에 한때 나이트클럽이 3~4개가 성업을 했고, 해태식당을 비롯한 강진의 한정식이 다시 꽃피우기 시작한 것도 한국유리 강진광업소의 성업과 맞물려 있었다. 

강진광업소는 2~3곳에서 규사 원석을 채굴했다. 대표적인 곳이 도암의 소석문, 그러니까 덕룡산 등산로 입구가 있는 곳에 광산이 있었다. 지금도 채광흔적들이 선명히 남아 있고, 지금도 그 일대 규사암들이 모두 한국유리 소유로 돼 있다.

강진은 거대한 규사암으로 구성된 산맥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강진읍 기룡마을 뒷산에서부터 만덕산을 거쳐 석문산, 덕룡산으로 이어진 산이 모두 규사덩어리다. 이 때문에 강진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광산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60, 70년대에도 만덕광업이란 회사를 통해 채광이 이뤄져 부산 등으로 실려 나갔다. 지금은 출렁다리가 세워져 있는 도암 월곶이는 강진의 규사가 외지로 실려가는 대표적인 항구였다. 강진광업소는 10여년 이상 번창했다. 지역에 자금이 잘 돌면서 경제가 활성화 됐고, 지역발전을 위해 유무형의 지원을 했다. 지금은 사라진 강진군민회관을 건립할 때나, 강진문화원 건물을 세울 때, 각종 문화행사를 할 때면 한국유리 강진광업소는 언제나 가장 큰 후원자였다.

그러나 규사채취는 필연적으로 자연환경 파괴를 동반하는 일이였다.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규사 바위들이 폭파돼 하얀 속살을 드러냈고, 미세한 가루로 분쇄된 규사는 바람에 날려 주변 논경지를 오염시켰다.

근로자들의 건강도 큰 위협을 받았다. 세월이 가면서 근로자들의 경제적 생활은 도움을 받았지만 그들의 폐에는 유리원료인 규사가 쌓이기 시작했다. 생산현장에 있던 근로자들은 특수마스크를 제공받았으나 워낙 미세했던 규사먼지는 마스크 사이로 스며들어갔다. 사무직들도 진폐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근로복지공단 목포지사가 지난 2002년에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80년대 중반이후부터 당시까지 강진지역에서 광산에서 일하다 진폐증으로 사망한 사람이 14명에 이르고 진폐증 증세때문에 일정기간 병원에서 요양을 했던 사람도 70여명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유리 강진광업소는 90년대들어 큰 전환기를 맞는다. 중국에서 싼 규사가 대거 수입되면서 굳이 강진에서 채광을 해서 가루를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한국유리 강진광업소는 1997년 문을 닫았다. 당시에 직원들을 퇴사시키면서 퇴직금과 위로금등을 두툼하게 준 것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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