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우리도 할수 있어… 학생들의 성공소식을 접하며 희망을 품다

어두웠던 시절 강진주민들에게 꿈을 준 일
1982년 9월‘가우도 학생들 과학전람회 대통령상 수상’
1983년 2월‘국졸 구두닦이 서정암 학생 대학교 입학’

1982년 9월 11일자 동아일보 1면에 가우도 어린이들의 입상 소식. 미래의 과학자란 제목이 붙었으나 이들은 지금 평범한 사회인이다. 오른쪽은 1983년 2월 13일 동아일보 사회면기사(윗쪽)와 경향신문 1월 20일자 기사.
80년대 초반은 암울한 시대였다. 5.1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나 그 결과는 처참한 것이었다. 군부독재는 다른 사람에 의해 계속됐고, 억압의 정치 역시 단절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감을 잃고 의욕을 상실했다. 그 암울했던 시절 강진에 큰 희망을 던져준 사건이 있었다.

1982년 가우도 학생들이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과 다음해인 1983년 서울의 강남버스터미널에서 구두닦이를 하던 국졸의 강진 출신 서정암 학생이 야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그것이었다.

강진 주민들은 우리지역의 작은 섬 가우도가 그렇게 TV에서 크게 나오는 것을 보며 기쁨과 감동을 감추지 못했다. 그 내용은 이랬다. 바닷물이 꽉 차기까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고 바닷물이 완전히 빠져나가는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또 밀물과 썰물이 바뀔 때 바닷물이 잠시 머무르는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이같은 내용은 해양전문기관에서 당연히 알아야 할 자료로 보이지만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이를 제대로 알고 있는 기관이 없었다. 학계에서나 정부에서나 바다는 관심밖의 장소였다. 쌀이 중요했지 꼬막이 중요한 시대는 아니였다.

그 수수께끼를 푼 사람들이 다름 아닌 도암 가우도 분교 어린이들이었다. 1982년 9월 11일 제28회 전국과학전람회 심사결과가 나왔다. 일반인들은 관심이 없었지만 전국 교육청들이 목을 메던 행사였다. ‘전두환 대통령’이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던 것이다. 전국 시도교육청에서 1차 심사를 통과한 기라성같은 288점의 작품이 서울 본선에 올랐다.

결과가 나왔다. 최고의 영예를 차지한 이들은 ‘전남 강진군의 외떨어진 낙도 가우도 어린이들’ 이었다. 1949년 과학전람회가 시작된 후 초등학생이 대상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당시 지방신문은 물론 전국 일간지들이 ‘선생님 한명, 전교생 6명의 학교에서 이룩한 쾌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주인공들은 모두 5학년인 김국현(10)군과 김금숙(11)양이었다. 지도교사는 곽영체선생님. 지금 강진제1선거구 도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곽영체 선생님과 김국현군, 김금숙양이 4개월 동안 만든 작품은 ‘밀물과 썰물에 관한 우리들의 관측’. 밀물과 썰물 현상 중 바닷물이 들고 나는 시간은 얼마나 걸리고 밀물과 썰물현상은 달의 움직임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바닷물의 높이는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조사 연구했다.

세명은 밤낮없이 바닷물이 들고 나는 시간을 파악했다. 새벽 1시, 2시에도 일어나 바닷물을 측정했다. 또 ‘간이 조수간만차 기록기’를 만들어 정확한 관측을 시도하는 창의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3명의 진지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밀물과 썰물 때 걸리는 기간은 썰물 때 더 길고, 평균시간은 6시간 13분이며, 밀물과 썰물이 바뀔 때 물이 잠시 머무르는 시간은 4~15분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 달이 뜨고 질때는 항상 밀물이었으며 간조시간에서 달이 뜨고 질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2시간 8분이 된다는 것도 알아냈다. 바람과 밀물·썰물 현상과의 관계는 풍향과 풍속에 따라 바닷물의 높이가 변화한다고 설명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국현군은 장래꿈이 과학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고, 김금숙양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 전두환’이란 글씨가 박힌 상장과 그때 돈으로 200만원의 상금이 수여됐다. 지금으로 치면 2천만원 정도 되는 돈이다.

이같은 초등학생들의 연구결과가 나오자 해양학계가 깜짝 놀랐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분야였지만, 어민들의 실생활에 가장 필요한 연구를 바로 초등학생들이 했기 때문이다. 시상식 이후 가우도를 찾은 해양학자들도 많았다.

이들이 귀향하는 날 강진에서는 대대적인 잔치가 벌어졌다. 가우도 마을잔치는 물론이고 강진읍 중앙로에서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중앙초등학교에서 군민환영대회가 열렸다. 학생들의 연구과정을 그린 라디오 드라마가 만들어졌고, 30분짜리 과학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가우도 학생들의 대통령상 수상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후 큰 침체기에 있던 전남도민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 때 가우도 연륙교 이야기도 처음 나왔다. 학생들이 대통령상을 받은 가우도에 다리를 놔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던 것이다. 일시적으로 용역조사를 한 적도 있었다.

그 때 그 일을 해냈던 어린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평범한 직장인으로 각자 결혼해서 평범한 가정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곽영체 선생님은 강진교육장을 거쳐 지금은 전남도의원을 하고 있다. 아직 우리나라에 미래의 과학자들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는 시스템이 부족했던 것이다.       

전교생 6명, 작은 섬 어린이들 대발견
전국과학전람회, 대통령상 첫 초등학생 수상

강남고속터미널에서 검정고시로 성균관대 합격
훗날 서울대 경제학과 진학, 사법고시 합격해 판사돼     
  

다음해인 1983년 1월 20일, 경향신문에 작은 사진과 함께 역시 작은 기사가 하나 실렸다. 기사 제목은 ‘고속터미널 구두닦이 서정암군 성대합격, 등록금 마련에 안간힘’이었다.

기사는 경부선대합실에서 구두를 닦고 있는 20살의 서정암군이 우수한 성적으로 성균관대에 합격했으나 등록금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였다. 기사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서군은 고입 대입검정고시를 거쳐 대입학력고사에서 270점과 내신 2등급으로 성균관대 무역학과에 지원 19일 오후에 합격통지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기사는 특히 ‘강진군 영파국교 분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포기, 농사일을 돕다가 78년 2월에 상경해 대한어머니회 불우청소년 선도회의 주선으로 강남고속터미널에서 구두를 닦아왔다’고 썼다.

이 기사가 나간 후 큰 반향이 일었다. 다음날 구본석 서울시교육감이 금일봉을 전해온데 이어 서울종합터미널상인협회가 22만원, 전국고속버스협의회가 20만원등 각계에서 성금이 답지하기 시작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제일동포들도 성금을 보내왔다.

소년 서정암은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의 병수발과 농삿일, 집안일을 도맡은 어머니를 도왔다. 농삿일을 하면서도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을 만큼 공부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남달랐다.

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친구들이 중학교에 진학해 공부할 때 그는 빌린 땅에서 농삿일을 하며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서울에 있는 고향 선배를 통해 공부와 일을 병행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구두닦이였다.

“가난한 우리 집을 원망해 본 적은 없어요. 운명처럼 받아 들였죠. 조선시대 수많은 노비가 자신의 출신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만 그렇게 계속 살다가는 공부를 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서울로 올라오게 된 겁니다.

혹자는 무단가출이 아니냐고 묻지만 엄연히 계획된 가출(?)이었죠. 오직 공부를 해야겠다는 일념밖에는 없었어요. 공부만이 내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1978년 3월 1일, 15살이 되던 해에 상경했다. 함께 올라온 몇몇 친구들과 함께 고향 선배의 도움으로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구두닦이를 시작했다.

오전 8시에 일을 시작해 오후 5시에 마치면 그는 꼬박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천호동 야학으로 향했다. 6시부터 네 시간 동안 수업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면 밤 11시. 이렇게 지낸 세월이 약 6년이다. 다른 이들은 일과 공부만 반복하는 생활이 답답해 중도 포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힘들었던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형들이 위로를 많이 해주었다.

소년 서정암은 이렇게 한눈팔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했다. 그 결과 상경한 이듬해 중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일 년 후에 대학교 입학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서정암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변에서 힘들지 않았냐고 많이 물어요. 하지만 구두닦이가 농사보다 쉬웠어요. 앉아서 손님 구두만 열심히 닦으면 됐거든요. 또 차비 외에는 돈을 쓸 곳이 없어서 학비를 차곡차곡 모았어요. 다른 기술이나 재주가 없어 구두닦이 외에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죠. 그 당시에 양재동 말죽거리에 땅을 산 사람들은 지금 큰 부자가 되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했나 싶어요. 아쉽지만 어떻게 하겠어요.(웃음) 공부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외골수라 그랬던 것 같아요.”

서울에 올라온 순간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공부 생각뿐이었다. 특별히 무엇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기보다는 공부를 하면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정고시 학원을 대학 입시학원으로 바꾸면서 구두닦이를 그만 두었다.

입시학원은 검정고시 학원과는 수준이 달랐다. 높은 벽에 부딪친 것 같은 느낌에 잠시 흔들렸고 권투선수를 해보겠다고 6개월 동안 도장을 다닌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책과 씨름을 했고 1983년 성균관대 야간 무역학과에 입학했던 것이다.

서정암씨는 약 1년 후 진로를 바꿔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1991년에 졸업했다. 밑바닥에서 시작해 서울대 합격의 쾌거를 이룬 그는 연일 뉴스에 보도되었고, MBC 9시 뉴스의 엄기영 앵커는 오프닝 멘트에서 그를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취직은 그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나름대로는 서울대 졸업장이 있으면 못 들어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7, 8군데 면접에서 퇴짜를 맞았다. 절망했지만 곧 희망적으로 생각을 바꿨다.
1991년 4월부터 법 공부를 시작한 그는 1993년에 1차 시험에 합격했고 이듬해 2차 시험까지 통과했다. 법에 대한 간단한 용어조차 낯설었던 그가 짧은 기간 내 합격 신화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1994년 12월 36회 사법고시에 합격한 그는 약 2년 동안 사법연수원 생활을 마치고 1997년 광주지방법원 판사가 되었다. 그는 2007년 2월에 법복을 벗고 변호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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